[include(틀:신라왕릉)] || {{{#fbe673 '''신문왕릉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경주시의 관광)] ---- [include(틀:신문왕)] ---- }}} || || [[파일:정부상징.svg|width=28]]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의 사적}}}]]''' '''{{{#f39100 제181호}}}''' || || {{{+1 {{{#fff '''신문왕릉'''}}}}}} {{{-1 {{{#fff 神文王陵}}}}}} {{{-1 {{{#fff }}}}}} ||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5px" || '''{{{#fff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번지|| || '''{{{#fff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 || || '''{{{#fff 면적}}}''' || 15,463㎡ || || '''{{{#fff 지정연도}}}''' || [[1969년]] [[8월 27일]] || || '''{{{#fff 제작시기}}}''' || [[통일신라]] || ||<-2> '''{{{#fff 위치}}}''' || [include(틀:지도, 장소=신문왕릉, 너비=360)]}}}}}}}}} || [[파일:신문왕릉.jpg|width=450]] 神文王陵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81호 [목차] == 개요 == [[파일:external/www.gyeongjuimage.or.kr/s_%EC%8B%A0%EB%AC%B8%EC%99%95%EB%A6%8903(%EB%B4%89%EB%B6%84)_%EB%8F%84%EB%A1%9D198P.jpg]]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제31대 국왕 [[신문왕]] 김정명의 능. == 역사 == 신문왕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신문왕릉은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전 시대의 [[신라왕릉]]보다 좀 더 장식물이 늘어나고 섬세해진 것이 보인다.[* 예를 들면 여기서 가까운 [[선덕여왕릉]]과 비교해 봐도 그렇다.] [[경주시]]와 [[울산광역시]]를 잇는 [[7번 국도]] 바로 옆에 있고 신문왕릉 정류장에 서는 [[경주시 시내버스]]도 대단히 많아서 접근성은 매우 좋은 편이다. 인근에 [[경주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선덕여왕릉]], 효공왕릉 등의 유적이 있으며 [[동해선]] 철길에서도 상당히 가깝다. === 효소왕릉설 === 사실 이 곳은 신문왕의 능이 아니라 아들인 [[효소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근직]] 교수는 현재 [[효소왕릉]]으로 알려진, [[경주시]] [[조양동(경주)|조양동]]에 있는 [[성덕왕릉]] 옆의 대형 고분은 실제로는 효소왕이 묻힌 것이 아니라 어느 신라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하였다.] [[신라왕릉]]은 각자 수 년~수십년의 텀을 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양식이 변하는 흐름이 존재하는데, 일단 이 무덤은 주인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는 두 왕릉인 [[무열왕릉]]과 [[성덕왕릉]] 사이 어떤 왕의 왕릉인 것은 거의 확실하다. 둘레돌 같은 석물 형태가 두 시대 사이 과도기기 때문이다. 효소왕릉설의 근거는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황복사 3층 석탑]]의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사리함기]]에 새겨진 명문에 두고 있는데, 본래 황복사 삼층석탑은 신문왕이 [[692년]] [[7월]]에 죽자 왕후와 왕위를 계승할 효소왕이 건립하였고, 몇년 뒤에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죽자 [[706년]]에 신문왕의 차남 [[성덕왕]]이 불사리나 다라니경을 넣어 죽은 신문왕, 신목왕후, 효소왕의 명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황복사는 원래 가장 먼저 승하한 신문왕을 위해 건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경주 [[낭산]][* [[남산(경주)|남산]]이 아니며 '''낭'''산이 맞다.] 동쪽에 있는 황복사 터 옆에 당시 신라 왕릉 주변에 장식하던 십이지신상이 파괴된 채로 흩어져 있으며 봉분도 무너진 채 남은 능터가 하나 있다. 그것이 진짜 신문왕의 능이고 배반동의 신문왕릉은 사실 효소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배반동의 신문왕릉은 낭산의 '남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구황동 왕릉지라고 불리는 이 유적을 2017년 발굴조사했는데, 이 과정에서 여기가 실제로 왕이 묻힌 무덤이 아닌 미완성된 왕릉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https://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2052758285096.pdf|#]] 매장 주체부가 확인되지 않고[* 왕릉의 둘레를 이루는 호석만 발견되었다.] 일부 석재는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의 기단을 보수하는 데 사용된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유적은 신문왕릉이 아닌 [[효성왕]]의 가릉으로 여겨지는 것이 맞다. === 진평왕릉설 === 다른 의견으로는([[이근직]] 전 경주대 교수의 견해) 황복사 터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진평왕]]의 능 [[진평왕릉]]이 위치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 진평왕릉이라 전하는 능이 신문왕의 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이건 신문왕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라왕릉]] 중 능 주인이 정확히 확인되는 왕릉은 몇 기 안 된다. 능의 주인이 비교적 정확하게 밝혀진 건 위치상 거의 확실해 보이는 [[선덕여왕릉]]이나, 신라 당시 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된 [[무열왕릉]]과 [[흥덕왕릉]] 등이 있다. 그 외에 [[원성왕릉]], [[성덕왕릉]]과 [[헌덕왕릉]]도 실제 그 왕의 능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편. 그 외 대부분의 신라 왕릉은 '전(傳) ~왕릉'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20607/113813195/1|#]]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신문왕, version=127)] [[분류:신문왕]][[분류:신라왕릉]][[분류:통일신라]][[분류:대한민국의 사적]][[분류:경상북도의 무덤]][[분류:경주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