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유튜브 채널, rd1=신사임당(유튜브 채널), other2=과거에 해당 채널을 운영했던 인물, rd2=주언규)] || '''{{{#ffffff 신사임당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한국갤럽 선정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 [include(틀:이달의 문화인물)] ---- [include(틀:한국을 빛낸 100명의 인물들의 등장인물 및 단체)]}}} || ---- ||<-2>
'''{{{+1 신사임당}}}[br]申師任堂'''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신사임당.jpg|width=100%]]}}} || ||<-2> {{{-2 신사임당 추정 초상화}}} || || '''본명''' ||불명[* 신인선으로 알려진 것은 후대의 창작으로 인선이 본명이라고 추정할 만한 근거가 없다.]|| || '''당호''' ||사임당(師任堂) || || '''본관''' ||[[평산 신씨]] || ||<|2> '''출생''' ||[[1504년]]([[연산군|연산]] 9) [[12월 5일]] || ||[[조선]] [[강원도]] [[강릉시|강릉]] 죽헌리 북평촌[br](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 ||<|2> '''사망''' ||[[1551년]]([[명종(조선)|명종]] 6) [[6월 20일]][* 음력 [[5월 17일]].] (향년 46세) || ||[[조선]] [[경기도]] [[파주시|파주군]] 주내면 율곡촌[br](現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율곡촌) || ||<|2> '''부모''' ||부친 - 신명화(申命和, {{{-3 1476 ~ 1522}}})[* [[정선공주]]의 외증손자. [[http://royal.aks.ac.kr/Ge/JokboPageData?bookId=JSK_WJ_K21047&pid=26707|#]]] || ||모친 - [[용인 이씨]] 이사온(李思溫)의 딸 || ||<|1> '''형제자매''' ||5녀 중 차녀 || ||<|1> '''남편''' ||[[이원수(조선)|이원수]](李元秀, {{{-3 1501 ~ 1561}}}) || ||<|2> '''자녀''' ||4남 3녀 [[http://royal.aks.ac.kr/Ge/JokboPageData?bookId=JSK_WJ_K21047&pid=26709|#]] || ||장남 - 이선(李璿, {{{-3 1524 ~ 1570}}}) 장녀 - 이매창[* 같은 시대에 살았던 여류시인 [[이매창]]과는 동명이인이다.] 차남 - 이번(李璠) 차녀 - [[파평 윤씨|윤섭]](尹渉)의 처 3남 - [[이이(조선)|이이]](李珥, {{{-3 1537 ~ 1584}}}) 3녀 - [[양주 조씨|조대남]](趙大男)의 처 4남 - 이우(李瑀, {{{-3 1542 ~ 1609}}}) || ||<|2> '''종교''' ||[[유교]] ([[성리학]])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oney_1_front.jpg|width=100%]]}}} || || '''[[오만 원권|{{{#fff 오만 원권}}}]] 지폐 속 초상화''' || [[조선]] 중기의 [[시인(문학)|시인]]이자 [[화가]]. 호는 '사임(師任)'.[* 13살 때 [[문왕(주)|주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겠다는 뜻으로 직접 지은 것인데 후대에 여자임을 뚜렷이 알기 쉽게 하도록 안주인이 기거하는 별채라는 뜻의 '당(堂)'을 붙여서 '사임당'이라 부르다보니 통칭이 이렇게 고정되어 버렸는데 생전에는 '사임 신씨'였을 것이다.] 아무 근거없이 [[이름]]이 '신인선' 또는 '신선'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름이 나와 있는 문헌은 없는데 1990년대 위인전 [[출판사]]가 작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위인전]]의 원본이 무엇인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20세기 초에 활동하던 [[문학]]가들이 쓴 [[소설]]인 경우가 많은데다 전문적인 역사 서적보다 위인전 같은 [[교양]] 서적의 파급력이 더 큰만큼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이 마치 [[상식]]인양 떠도는 경우가 흔하다. ][* 신인선이라는 아명은 의외로 알려진 역사가 오래된 편으로, 1970년대 중반 국민서관에서 출판된 문고판 위인전에도 등장한다.] 신사임당의 이름이 언급된 문헌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정확한 성명은 현재까지도 불명이다. 현대로 치면 '신 모 씨'지만 호가 있기에 이렇게라도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임당 신씨라고도 부른다.] == 생애 == 신사임당이 속한 [[평산 신씨]]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증조부가 [[성균관]] 대사성, 조부는 [[영월군|영월]]군수, 부친 신명화는 [[벼슬]]을 일부러 나가지 않았지만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증조부인 신자승(申自繩)은 멀게는 '''태종'''과도 인맥이 이어진다. 신자승의 장인인 남휘는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와 혼인했기 때문이다. 외가 쪽도 이름이 상당히 높고 부유해서 엄청나게 강한 집안 내력이 있는데, 외조부 이사온만 해도 [[강릉 최씨]] 집안에 둘째 [[사위]]로 장가를 들었고 신명화의 경우도 이사온의 외동딸과 [[결혼]]을 해서 초년 생활을 처가 [[오죽헌]]에서 했으며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댁에서 [[교육]]을 받았다. 오죽헌만 해도 이사온이 장인에게 받은 것을 다시 사위인 신명화에게 넘겨준 [[재산]]으로 신사임당이 죽은 이후에 유산을 나눈 분재기를 보면 이 집안의 [[노비]]가 100명이 넘는다. 어려서부터 [[시]], [[글씨]], [[그림]]에 매우 능하였다고 하는데 4세부터 글공부, 7세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데도 [[세종(조선)|세종]] 시대의 [[화가]]였던 [[안견]]의 그림을 본따서 그릴 정도였으며 [[금강산]]에 가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인정했을 정도로 출중했는데 신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쓴 사람 중 1명이 조선 중기의 거물 정치가였던 [[송시열]]이다. 물론 송시열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입장이었으므로 신사임당이 이이의 어머니이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그림을 감상하고 그림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은 이이의 노선을 따르는 조선의 지파인 [[서인]]과 [[노론]]에 속한 정치인들에게는 집단 의식과도 같은 [[의례]]였다. 그들은 신사임당의 그림에 대해 논하며 스스로의 정치적 동질감과 소속감을 다졌다.] 그뿐만 아니라 먼 훗날 [[숙종(조선)|숙종]]도 신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지었다고 하니 그림 실력이 대단했던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뭐가 그녀의 그림이고 실제 역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현대에는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녀가 그렸다고 확실히 낙관을 찍은 그림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림들만 잔뜩 전해지는데, 300년 전에 50세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한 사람이 그렸다기에는 전해지는 작품이 너무 많고, 또한 한 사람이 그렸다기에는 화풍이 너무 상이하다. 흔히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진 <초충도>는 그렇게 전해지는 작품일 뿐 진짜 그녀가 그렸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아들인 이이나 동시대 문인들의 기록에서는 [[포도]], 산수,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하지 초충, 화조를 그렸다는 기록은 없어서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 남편 [[이원수(조선)|이원수]][* 명문가였던 신사임당의 집안과는 대조적으로 남편 이원수의 집안은 한미했는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형제도 남매도 하나 없는 단 하나뿐인 외아들이었다.] [[덕수 이씨]] 가문 자체는 나름 명문가이지만, 정작 이원수의 집은 [[가난]]했다. 벼슬을 하지 못하여 [[친척]][* 신사임당에게 있어서는 시당숙.]이자 [[우의정]]인 당대의 세도가 [[이기(조선)|이기]][* 이기의 어머니는 [[성삼문]]과 6촌지간이며 외삼촌인 [[성담수]]는 [[생육신]] 중 1명이다. 이기는 후에 [[윤원형]]을 도와 [[을사사화]]를 일으키게 된다.]를 찾아다니자 적극적으로 만류했다고 하며 이원수에게 자신이 죽으면 [[재혼]]하지 말라고 [[유교]] 경전까지 인용해 가며 신신당부했을 정도였다.[* 이 대화가 <동계만록>에 남아 있는데 [[공자]], [[증자(인물)|증자]], [[주자(철학자)|주희]]의 고사까지 인용한다. ] >사임당: "제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7남매(4남 3녀)나 두었으니까 더 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기]]>의 교훈을 어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 >[[이원수(조선)|이원수]]: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이오?" > >사임당: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동거하지 않았다 뿐이지, 아주 나타나게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 >이원수: "[[증자(인물)|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 >사임당: "증자의 부친이 찐 [[배(과일)|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공양하는 도리에 어김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해서,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 >이원수: "[[주자(철학자)|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 같은 일이 없소?" > >사임당: "주자가 47살 때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들지 않아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지만, 주자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습니다." 과연 남편의 말에 순응하기만 했던 수동적인 여성이었는지 상당히 의문이 들게 만드는 대목. 하지만 남편 이원수는 이 말을 무시하고 장남 [[이선]]과 연배가 비슷했던 주막집 [[여자]] 권씨를 신사임당 생전에 [[첩]]으로 삼았고, 신사임당이 죽자 권씨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았다.[* 단, [[조선시대]]의 첩은 정식으로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꼭 신사임당의 당부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첩은 정실 부인보다 [[신분]]이 낮아 남편에게 정실 부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 없고 가정 내 대소사에 평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없으며, 첩의 소생은 [[서자]]로서 정실 부인의 소생에 비교해서 [[차별]]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후 이선과 새어머니 권씨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싸웠을 정도였고, 3남 [[이이(조선)|이이]]는 어머니의 탈상 후 이원수에게 말도 하지 않고 [[금강산]]으로 [[출가]]해버렸다.[* 다만 이이는 그래도 형제들을 잘 달래며 상대적으로 새어머니 권씨를 존중했다. 그런데 훗날 [[제자]]인 [[정여립]]은 이이가 새어머니를 핍박하고 [[불효]]했으며 서로 으르렁거렸다는 악성 [[소문]]을 유포하고 다녔다.] == 평가 == 시, 서, 화는 물론 학문에도 능했던 [[엄친딸]]의 표본. 괜히 슬하에서 이이 같은 사람이 나온게 아니며 신사임당 당대에는 '[[안견]]에 버금가는 [[화가]]'라는 높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예술가]]로서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현모양처]]라는 [[이미지]]나 '[[이이(조선)|이이]]의 어머니'라는 명칭이 유명하여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현모양처라는 단어 자체나 이이의 어머니라는 점은 절대로 [[모욕]]이 아니지만 그녀 개인의 역량이 묻혀버린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1980~90년대만 하더라도 동양화가로서의 신사임당을 조명하는 어린이용 전기가 많았고 초충도 같은 작품이 교과서에 실려서 예술가로서도 뛰어나고 가정생활도 잘한 먼치킨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그냥 아들 공부 잘 시킨 엄마 정도의 이미지로 국한되었다. 사실 신사임당이 생존하던 [[조선]] 전기인 16세기 무렵까지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조선 후기에 비해 비교적 높았고 실제로 신사임당도 아들인 이이를 친정에 가서 낳았다. 이후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사회가 [[성리학]]적 관념화에 젖고 [[남성]] 중심주의의 [[가부장제]]가 공고해지면서 여성의 위치가 격하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확실한 것은 신사임당 생존 당시나 16세기까지 [[지식인]]들의 시선에 신사임당은 '이이의 어머니'라는 점보다 '화가 신씨'라는 점이 부각되었다는 것인데 소세양, 정사룡 등은 그녀의 그림에 관한 평을 다수 남겼고 그녀를 뛰어난 화가로 보았다. 신사임당에 현모양처 이미지를 덧씌운 것은 [[송시열]]이었는데 송시열이 53세 때 발표한 아래의 <사임당의 난초 그림에 대한 발문>을 보자. >이것은 고 증찬성 이공 부인 신씨의 작품이다.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며 오행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기운을 모아 참 조화를 이룸에는 어떠하겠는가? '''과연 그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 ><사임당화란발> - 송자대전 이런 송시열의 발문을 시작으로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세력은 이이를 띄우기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 작업의 일환으로 그녀를 격상하는데 힘썼는데 이는 결코 독립된 개인으로서 신사임당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이이의 주변 배경으로만 취급한 것이다. 이런 작업 속에 신사임당은 이정(二程)[* 2명의 정(程)씨로 곧 [[송나라]]의 대유학자인 [[정이]]와 [[정호]] 형제.]의 어머니인 후 부인에게 비견되는바 이는 이이와 이정의 위계를 은연 중에 동일시하는 은유로 기능한다. 신사임당은 이로써 '화가 신사임당'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조선 후기 [[성리학]]은 여성뿐만 아니라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이단]]시했고 기예들을 낮고 비천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후기 신사임당의 평가가 바뀌는 것은 여성의 지위 하락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성리학이 근본주의적이고 경직된 구조로 나가면서 신사임당이 [[재능]]을 발휘했던 [[화가]]의 지위와 평가가 하락했던 점 역시 종합적으로 고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당대 기준으로 상상도 하기 힘들 만큼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현모양처인 동시에 화가이자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재인이라는 점에서나 위인이라고 볼 수 있지만 5만원권에 들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다는 평가가 주류다. == 초상화 == [[파일:신사임당.jpg|width=300]] * 위에 있는 여인 초상화가 신사임당이라고 전해진다. 조선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초상화로, 신사임당일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한다. 현재는 소재불명. [[https://weekly.donga.com/List/3/all/11/525555/1|기사]] [[파일:신사임당 표준영정.jpg|width=300]] * 이당 [[김은호]]가 그린 [[표준영정]].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머리모양과 한복 차림이라는 [[창작물의 반영 오류|오류]]가 있다. [[파일:external/www.kado.net/688784_253356_749.jpg|width=300]] * 일랑 이종상[* [[김은호]]의 제자. 김은호의 제자가 아니라는 [[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67&newsid=20090616063607376&p=nocut|논란]]은 있으나, 김은호와는 달리 친일 문제는 없다.]이 그린 초상. 김은호 표준영정의 [[창작물의 반영 오류|재현 오류]]를 바로잡은 [[가체]]와 [[한복]] 차림이다. [[오만원권 지폐]]의 신사임당 초상도 이종상의 작품. == 기타 == *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등장한다. * 물론 신사임당이 유능한 것은 사실이고 [[조선]] 중기에 [[여성]]의 위치가 조선 후기보다는 괜찮았다고는 하나 거의 60년 후에 태어난 [[허난설헌]]과 비교를 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배경은 별 것 없는데 남편 [[이원수(조선)|이원수]]가 [[데릴사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신씨의 아버지 [[신명화]] 덕분으로 우선 집안의 [[돈]]이 신사임당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신명화는 일부러 이런 [[사위]]감을 골라서 자신의 둘째 딸을 [[시집]]보낸 것이다. 왜? 딸이 사위에게 눌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당대 어르신들과 달리 딸이 편하게 살게 하기 위해 사위를 일부러 저런 자로 고른 것을 볼 때 신명화가 상당히 [[딸바보]]였던 모양.] 이 때문에 신사임당은 [[시집살이]]를 거의 안 하고 [[결혼]] 시작을 자기 친정에서 시작했고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가 [[사망]]하자 3년상을 이유로 시가(媤家)에 [[얼굴]] 1번 내비치지 않는 생활을 했다. 이후 한참 지나서 시가로 가기는 했으나 이원수의 집안은 전부가 덤벼도 신사임당 한 사람에게도 [[정치]]적/[[경제]]적으로 상당히 밀렸다고 보는게 맞으며[* 남편도 남편이지만 시어머니도 며느리에게 싫은 [[소리]]를 거의 못 했는데 신사임당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고 행실도 바르니 뭐라 할 것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이원수는 충실한 '[[셔터맨]]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직전 6대에 걸쳐서 [[과거 제도|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고 본인의 오빠 친구 아들과 결혼한 허난설헌과는 스타트 라인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덕수 이씨]]가 본격적으로 문/무반 명가로 자리 잡은 건 [[이이(조선)|이이]]와 [[이순신]] 이후이다. 그런데 허난설헌은 신사임당의 아들 이이의 [[정적]]인 [[허엽]]의 딸이고 자신을 [[탄핵]]한 [[허봉(조선)|허봉]]의 누이동생이다.] * [[유관순]]과 함께 위인전이 존재하는 사실상 한국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위인이다. * [[강릉아트센터]] 대공연장인 사임당홀은 신사임당의 당호에서 이름을 취하였다. * [[탄금대 전투]]로 유명한 [[신립]]과는 9촌이다. 증조부인 신자승의 형인 신자준의 현손자가 신립이다. == 대중매체에서 == * 1973년 [[한국방송공사|KBS]] 일요연속극 <신사임당>에서는 탤런트 방인숙이 연기했다 * 2005년 [[EBS]] 드라마 <[[점프(EBS)|점프]]>에서는 등장한 [[아이]]가 신사임당의 둘째이자 장녀인 이매창이 되었다. 여기서 신사임당은 [[현모양처]]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을 그렸다. * 2017년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원제는 '''사임당, the herstory'''였지만 여러 조건을 부합하는 마지막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타임[[루프물]]인데 [[역사]]적 재현도를 고려하면 2013년 [[MBC]] 드라마 <[[기황후(드라마)|기황후]]>보다 못하다.]에서는 배우 [[이영애]]가 연기했다. [[방송국]]에서는 공을 들이며 제작하였지만 좋지 못한 평을 받음과 동시에 [[시청률]]까지 점점 하락하며 기대와 달리 축소되어 종영했다. || [[파일:external/uhd.img.topstarnews.net/1446193721-66.jpg|width=100%]] || || '''스틸컷''' || [각주] [[분류:신사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