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고령 신씨]][[분류:장성군 출신 인물]][[분류:1892년 출생]][[분류:198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 성명 ||신상우(申商雨) || || 자 / 호 ||성도(聖禱) / 후송(後松) || || 본관 ||[[고령 신씨]][* 귀래정공파 24세 우(雨) 항렬.] || || 생몰 ||[[1892년]][*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88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12월 25일]] ~ [[1981년]] [[4월 14일]] || || [[출생지]]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독립유공자 [[신국호]]·[[신태식(1890)|신태식]]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지 ||[[전라남도]] [[장성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신상호는 1892년 12월 25일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에서 아버지 신석휴(申錫休)와 어머니 [[고(성씨)|장택 고씨]] 고응순(高應淳)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3일 저녁 신경식(申耕植)과 [[고용석]]·유상순(柳相淳)·[[유상설]]·[[정병모]] 등이 화전회(花煎會) 모임을 이용하여 시국담을 나누는 자리에 참석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다가 귀가하였다. 그러나 뒤늦게 사가리 헌병주재소에서 일본 헌병이 고용석·유상설·유상학·신진식(申鎭植)을 연행해 가자, 이날 밤 신경식·정병모·[[신태식(1890)|신태식]]·[[신국호]] 등과 만나 연행된 동지의 석방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오전 11시경 오상구(吳相九)·박광우(朴光又) 등 2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헌병주재소로 시위행진하여 주재소 앞에서 연행된 동지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린 헌병들이 장성읍 헌병 분대를 불러들여 합세하여 무력을 행사함으로써 6명의 부상자를 낸 채 강제 해산되었다. 이때 현장에서 체포된 신상우는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 후 장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1년 4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신상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