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평산 신씨]][[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1889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 성명 ||신상태(申相泰) || || 호 ||혜산(兮山) || || [[본관]] ||[[평산 신씨]] || || 생몰 ||[[1889년]] [[4월 1일]] ~ [[1950년]] [[12월 8일]] || || [[출생지]] ||[[경상북도]] [[칠곡군]] 악목면 복성리 || || 사망지 ||[[경상북도]] [[칠곡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신상태는 1889년 4월 1일 경상북도 칠곡군 악목면 복성리에서 신영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동락의숙(同樂義塾)에서 수학했고 서울에 상경해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3년, 그는 [[안희제]], [[남형우]], 배천택 등 30여명의 동지와 더불어 애국결사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15년에는 대구의 안일암에서 시회를 가장하고 윤상태, [[홍주일]], [[서상일]] 등 30여동지로 하여금 대한국권회복단을 조직하여 그 본부를 대구에 지부를 마산에 두었다. 또한 대구은행에 재직한 기회를 이용하여 은행의 출납주임인 이종암과 협의한 후 독립자금으로 쓰기위해 1918년 은행돈 1만 9천원을 인출해 이를 아우 신상헌의 집 뒷산에 묻어놓고 이종암을 아우에게 부탁한 뒤 다음날 평상시와 같이 근무했으나, 은행은 발칵 뒤집혀졌다. 그후 아우 신상헌은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여 낮에는 산속에서, 밤에는 다락방에서 지내다가 수사가 잠잠해지자 이종암을 변장시켜 숨겨두었던 돈을 주어 만주로 탈출하게 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후, 신상태는 독립운동을 꾀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21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동지들과 만나 구국책을 논의하고 만주의 각처를 돌아 다니며, 안동현에서 군자금 전달 및 국내외 투사들의 연락책무를 맡아 활약했다. 그러나 대구에서 밀파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개입해 허홍제, 조중규, 채충식등의 동지와 더불어 시위계획을 논의하다 또다시 체포되었다가 얼마후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후 [[신간회]]에 참가하면서 지하공작을 별도로 준비했으나, 금오산 독립단 잠입사건의 관련혐의로 체포되었다. 또한 신간회 해산반대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기도했다. 1945년 [[8.15 광복]] 직전에 위험인물로 간주한 일제 경찰에 의해 왜관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8.15 광복]] 후 고향에서 병고에 시달리다 1950년 12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상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