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신숙범}}}'''[br]'''愼淑範'''}}}}}}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신숙범.png|width=100%]]}}} || ||<-2> 1941년 2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창씨명''' ||나오야마 요시한(直山淑範)[br]도쿠야마 요시한(悳山淑範) || || '''이명''' ||신진민(愼陳民), 신진택(愼陳宅) || || '''본관''' ||[[거창 신씨]][* 현령공파(縣令公派) 31세 범(範) 항렬.] || ||<|2> '''출생''' ||[[1920년]] [[6월 13일]] || ||[[경상남도]] [[거창군]] 가동면 마상리[br](현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마상리) || ||<|2> '''사망''' ||[[1998년]] [[1월 1일]] (향년 77세) ||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달서구)|도원동]] [[보훈병원|대구보훈병원]]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712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받았다. == 생애 == 신숙범은 1920년 6월 13일 경상남도 거창군 가동면(現 거창군 가조면) 마상리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우산(于山) 신원성(愼元晟, 1891. 4. 30 ~ 1959. 9. 10)[* 초명 신극성(愼極晟).]과 어머니 [[은진 송씨]](1891. 4. 3 ~ 1952. 2. 12)[* 송석명(宋錫明)의 딸이다.] 사이에서 6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원성은 일찍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82|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한 바 있는 유학자이다. 고향에서 가조공립보통학교(現 가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화동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에 거주했다. 1936년 4월 [[경기고등학교|경기중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1939년 11월 학자금 부족 및 실연 등의 이유로 중퇴하였다. 이후 [[만주국]]으로 건너가 방랑하던 중, 재만 한인 동포들의 참혹한 생활상을 목격한 후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40년 5월 귀국하였다. 이때 경성부로 돌아와서는 삼청정(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 거주하였으며, 경성부청 위생과부 임시 고용인으로 취직하여 1달간 근무했고 그해 12월 2일부터 경성부 본정1정목(現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충무로1가]])에 있던 '삼영 캔디스토아'의 배달부로 근무했다. 그리하여 1940년 10월 송택영(宋澤永)·[[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962279|임원빈]](任元彬)[* 창씨명 : 도요카와 모토요시(豊川元彬).] 등의 동지와 함께 조국 독립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해 비밀결사 조선인해방투쟁동맹(朝鮮人解放鬪爭同盟)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조국독립을 위해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이념을 초월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후 이들은 조선인해방투쟁동맹의 선언문을 작성하고 기관지도 발행하기로 결정한 후 조직 확대에 힘쓰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42년 12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미결 구류일수 300일 산입)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06&evntId=0034970063&evntdowngbn=Y&indpnId=000000254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이틀 뒤인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1943년 5월 15일에는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어 복역하다가 1945년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http://db.history.go.kr/id/ia_2795_2168|#]] 출옥 후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만촌동]](現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이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받았다. 1998년 1월 1일 달서구 도원동에 위치한 대구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http://news.imaeil.com/Society/1998010314380157423|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98년 1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거창군 출신 인물]][[분류:거창 신씨]][[분류:1920년 출생]][[분류:199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