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후궁]][[분류:성주 이씨]] [include(틀:조선의 후궁(환조 ~ 연산군))]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태종의 후궁[br]{{{+1 신순궁주 이씨 | 愼順宮主 李氏 }}}'''}}} || || '''출생''' ||미상 || || '''사망''' ||미상 || || '''본관''' ||[[성주 이씨]] || || '''휘''' ||정민(正敏) || || '''부모''' ||부친 - [[이직(조선)|이직]](李稷, {{{-3 1362 ~ 1431}}})[br]모친 - [[양천 허씨]] 허시(許時)의 딸 || || '''배우자''' ||[[태종(조선)|태종]] || || '''형제자매''' ||{{{#!folding 3남 2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형제 - 이사후(李師厚), 이사원(李師元), 이사순(李師純) 여동생 - [[민무휼]](閔無恤)[* [[원경왕후]]의 남동생.]의 처 }}} || || '''자녀''' ||없음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태종(조선)|태종]]의 간택 후궁.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으로 있을 때 뽑혀 들어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말선초에 활동한 [[이직(조선)|이직]](李稷)이며, 어머니는 허시(許時)의 딸이다. 또한, 여동생이 [[민무휼]]의 처였다. == 생애 == 1422년([[세종대왕|세종]] 4년), 33세의 나이로 신순궁주로 봉작되었다. 당시 태종이 상왕으로 있었는데, [[세종(조선)|세종]]이 부왕을 위해서 간택하였기 때문이다.[*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1월 6일 갑자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401006_002|#]] ] 사실 신순궁주는 혼인하였다가 일찍 과부가 된 처지였는데, 조선 전기라서 이러한 일이 용납되었다.[* 제3대왕 태종 때 까지는 과부 출신, 기생 출신 후궁들이 있었다가 제10대왕 연산군이 기생출신 후궁들을 들인 이후로는 궁녀 출신은 있어도 과부나 기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후궁으로 궁에 들어온 지 한 달 후에 신순궁주로 품계가 올랐다. 당시에 그녀의 아버지 이직은 [[원경왕후]]의 친정 가문이 몰락하는 중에 휘말려 성주 지방으로 유배를 간 상황이었다.[* 민무휼과 사돈 가문인 것도 한몫했다. ] 그런데 딸이 태종의 후궁 된 덕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직첩과 공신 녹권까지 돌려주었다. 태종은 이직의 딸 때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사헌부]] 등에서는 태종의 말을 믿지 않았는지 이직을 처벌하라고 재차 간언하였다.[*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1월 14일 임신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401014_003|#]] ] [[영의정]] 유정현까지 나섰으나 처벌하지 않았고, 이듬해 이직은 성산부원군에 제수되었다. == 여담 == * 신순궁주는 [[명빈 김씨]], [[소빈 노씨]] 등과 함께 태종과 [[원경왕후]], [[소헌왕후]] 및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권9~10)》[* 자비도량참법은 [[양무제]]가 생전에 죄를 지어 [[구렁이]]로 태어난 황후 치씨의 고통을 구제하고자 편찬한 것이다. 특히 권9~10의 내용은 살아가면서 짓는 온갖 죄, 원한을 참회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여 영혼을 극락으로 천도하는 의미다. ]을 발원하였다. 여기에 그녀의 이름이 '신순궁주 정민(愼順宮主 正敏)'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