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의열단)]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신악}}}[br]申岳'''}}} || || '''이명''' ||이동화(李東華) || || '''본관''' ||[[고령 신씨]][* 귀래정공파 24세 우(雨) 항렬. 족보명은 신창우(申彰雨).] || ||<|2> '''출생''' ||[[1892년]][* 고령신씨대동보 권15 303쪽에는 1890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 ||[[경기도]] [[양평군|양근군]][br](현 [[경기도]] [[양평군]])[*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Merit&mngNo=7860|독립유공자 공훈록]]][* [[http://db.history.go.kr/id/im_108_10569|용의조선인명부]]에는 [[평안도]] [[숙천군|숙천도호부]] 우상방 도덕리(현 [[평안남도]] [[숙천군]] 용덕리)가 출신지 겸 본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 ||<|2> '''사망''' ||[[1945년]][* 고령신씨대동보 권15 303쪽에는 1942년 봄에 충칭에서 전사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 ||[[중화민국]] [[충칭]] || ||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신악은 1892년 경기도 양근군(현 양평군)에서 아버지 신병휴(申炳休, 1854 ~ ?)와 어머니 [[밀양 박씨]](1854 ~ 1891)[* 박기회(朴氣會, 1817 ~ ?)의 딸이다. 박기회는 1858년(철종 9) 식년 [[진사|진사시]]에 3등 16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58_033105|입격한 뒤]] 안산군수(安山郡守, 종4품)와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종4품) 등을 역임했다.]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신문로2가|서대문정2정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46번지[* 현재 이 지번에는 [[http://naver.me/xrPuqryU|돈의문박물관마을작가갤러리]]가 위치해 있다.]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신악의 집안은 직계 5대 내에 고조부 신현록(申顯祿, 1743. 7. 27 ~ 1789. 4. 24) 외에 4대가 벼슬길에 나아간 당대의 명문가였다. 그의 아버지 신병휴는 1887년(고종 24)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2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7_014504|급제한 뒤]] [[사간원]] [[대사간]](정3품)과 [[병조]] [[참의]](정3품) 등에 올랐고, 조부 신만구(申萬求, 1806. 12. 26 ~ 1884)는 1840년(헌종 6) 식년 [[진사|진사시]]에 3등 68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40_031357|입격한 뒤]] [[음서]]로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정3품)에까지 올랐다. 생조부 신헌구(申獻求, 1823. 5. 7 ~ 1902)는 1862년(철종 13) 정시 문과에 병과 5위로 은사(恩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62_013329|급제한 뒤]] [[예조판서]](정2품)에 올랐다. 증조부 신응모(申應模, 1784. 9. 21 ~ 1864)는 1822년(순조 22) 식년 진사시에 2등 7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22_029671|입격한 뒤]] 음서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올랐다. 5대조 신택권(申宅權, 1722 ~ 1802)은 1763년(영조 39) 증광 [[생원|생원시]]에 2등 25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63_023527|입격한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에 올랐다. 한편, 신악은 일찍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1919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후 [[황포군관학교]]를 4기로 졸업하고 [[국민혁명군]]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의열단 활동을 위하여 국민혁명군에서 전역하고, 1935년 4월 [[강소성]] 강녕현(江寧縣) 상방진(上坊鎭)[* 현 중국 [[장쑤성]] [[난징시]] 장닝구(江寧區) 샹팡진(上坊鎭).] 황룡산(黃龍山) 기슭 천녕사(天寧寺) 경내에 설치된 의열단의 한국혁명군 간부양성훈련반의 교육주임, 중국군관학교 간부훈련단 군사부장 및 제1기 교관 등을 맡아 군사훈련에 전념하였다. 또한 [[조선혁명당]]에 입당하여 중앙검사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6년에 3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서기부 재무과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전쟁 중이던 [[우한시]]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그는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이에 가입하여 중국군과 함께 항일전쟁에 참전하였다. 1940년 그는 조선의용대 본부 기요조장(機要組長)에 임명되었다가 1941년에는 [[김원봉]] 휘하의 부대장(副隊長)의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유로 [[한국광복군]]에 통합되자 그는 한국광복군 중교(中校)로서 제1지대에 편입되어 대부(隊附)의 직을 맡았고, 이후에는 제1지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후 광복군에서 계속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을 채 보지 못하고 중화민국에서 별세하였다. 다만, 고령신씨대동보 권15 303쪽에 따르면, 1942년 봄에 중화민국 충칭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의열단/단원]][[분류:고령 신씨]][[분류:양평군 출신 인물]][[분류:1892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