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이달의 문화인물)] ---- 申在孝 [[1812년]]([[순조]] 12) ~ [[1884년]]([[고종(조선)|고종]] 21)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이자 작가. 본관은 [[평산 신씨|평산]](平山)[* 현령공파 27세 재(在) 항렬.],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 생애 == 1812년 [[전라도]] [[고창군|고창현]](現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아버지 신광흡(申光洽)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상려(金常礪)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7년(고종 14) [[한량]]으로서 은수룡(殷壽龍)과 함께 빈민 구휼을 위해 돈 500냥을 기부하여 그에 대한 포상으로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14_08A_21A_00180|#]] 이후 가선대부 호조참판에까지 올랐다. 종래 계통없이 불리어오던 광대 소리를 통일하여 12마당을 《춘향가》, 《심청가》 등 6마당으로 정립, 체계를 이루고 독특한 판소리 사설 문학을 이룩하였다. 그는 판소리의 흥행 가능성(?)을 내다보고 광대패를 조성하는가 하면 현재 개념으로 보자면 [[연예 기획사]]에서 [[아이돌]] 양성까지도 해냈다. 그 때까지의 판소리 가창자는 성량으로 승부하는 남성 위주였지만[* 남창(男唱)] 신재효 이 사람은 여성 가창자를 키우는가 하면, 싹이 보이는 아동을 가르쳐 소리를 하게 했는데 이게 당시로선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시도였다. 이렇게 아동에게 소리를 하게 하는 것을 童唱이라 하는데, 신재효는 동창용 판소리를 또 따로 집필해(동창 춘향가) 부르게 했다. 문제는 이 동창용 판소리에 음담패설이 무지막지하게 많았다는 것... 사실 지금이나 당대에나 문제거리로 지적될 일이지만 어린애가 음담패설하는 걸 듣고 좋아라 한 인간이 많았던 모양이다.(...)[* 다만 판소리 창법은 성대에 특수한 결절을 생성하는 노래 방식이기 때문에, 성장기의 성대에 결절이 생기면 '''성장 후엔 [[목소리]]를 아예 잃게 된다.''' 심심찮게 TV에 나오는 판소리 영재들이 성장 후엔 왜 소리없이 사라지는지에 대한 이유 중 하나.] 평소 판소리를 매우 즐겼던 [[흥선대원군]]도 신재효와 [[진채선]]의 재능을 인정해서 [[운현궁]]에 자주 부르는 등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 기타 == * 신재효 판소리 필사본인 고수 청계본의 완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판소리 판본은 모두 1940년대 이후에 정리된 것이라 하며 19세기 당시의 언어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라 한다.[[https://v.kakao.com/v/20200916110900863|#]] * 영화 [[도리화가(영화)|도리화가]]에선 [[류승룡]]이 연기하며 [[진채선]]과의 이야기를 그린다. [각주] [[분류:조선의 음악가]][[분류:판소리]][[분류:고창군 출신 인물]][[분류:평산 신씨]][[분류:1812년 출생]][[분류:188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