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덕군 출신 인물]][[분류:1868년 출생]][[분류:193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 성명 ||신재휴(申載休) || || 생몰 ||[[1868년]] [[10월 17일]] ~ [[1934년]] [[3월 24일]] || ||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 || || 사망지 ||[[경상북도]] [[영덕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신재휴는 1868년 10월 17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영해읍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인다는 연락을 받고 동지들을 규합한 뒤 시위대를 이끌고 영해로 가다가 인근 동리에서 영해로 가는 군중을 만난 뒤 시간 여유가 없으니 영해로 가는 것보다 창수리주재소로 가기로 합의했다. 이후 그는 군중을 이끌고 창수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 앞에서 주동자 이수각(李壽珏) 등과 같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몽둥이와 곡괭이를 든 시위군중은 곧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주재소 청사·숙사 등 3동의 창문·벽·천정 등을 완전히 파괴하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오후 7시경 해산하였다. 이후 시위 주동자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방해죄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34년 3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신재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