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축구선수, rd1=신태영(축구선수))] [include(틀:대한민국 역대 국방부장관)] ||<#ec1e31> {{{#FFF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 ---- [include(틀:대한민국 역대 육군참모총장)]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1e31, #ec1e31 20%, #ec1e31 80%, #ec1e31)" '''[[대한민국 국방부장관|{{{#FFF 대한민국 제4대 국방부 장관}}}]][br]{{{#fff {{{+1 신태영}}}[* 일제강점기 당시 썼던 창씨명은 히라야마 호에이.([ruby(平山輔英, ruby=ひらやまほえい)])][br]申泰英 | Shin Tae-young}}}'''}}}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신태영 참모총장.jpg|width=100%]]}}} || ||<|2> '''출생''' ||[[1891년]] [[2월 1일]] ||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 ||<|2> '''사망''' ||[[1959년]] [[4월 8일]] (향년 68세) ||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서울)|신당동]]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제2장군 묘역-3호 || || '''본관''' ||[[평산 신씨]] 사간공파 || ||<|4> '''재임기간''' ||제3대 육군참모총장|| ||[[1949년]] [[10월 1일]] ~ [[1950년]] [[4월 9일]]|| ||제4대 국방부 장관 || ||[[1952년]] [[3월 29일]] ~ [[1953년]] [[6월 30일]]||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배우자''' ||천기주 || || '''자녀''' ||아들 [[신응균]], 신철균, 신박균 || || '''학력''' ||육군유년학교 {{{-2 (졸업)}}} || || '''종교''' ||[[불교]] || || '''경력''' ||제4대 국방부 장관[br]대한 제대장병보도회 회장 || ||<-2> '''군사 경력''' || ||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2 (26기)}}}[* 동기생으로 [[이응준]], [[홍사익]], [[김경천]], [[지청천]] 등이 있다. [[김석원]]은 27기로 그의 후배.] || ||<|4> '''복무''' ||일본제국 육군 || ||1912년 ~ 1945년 || ||[[대한민국 육군]][* 군번 12311] || ||1948년 ~ 1954년 || || '''최종 계급''' ||중장 {{{-2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육군참모총장[* 당시계급 소장] || || '''주요 보직''' ||육군행정참모부장[br] 호국군참모부장[br] 육군전북편성관구사령관 ||}}}}}}}}}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 제국]]의 [[일본군]] 고급 장교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일본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좌관급 장교|중좌]]였다. 대좌였던 이응준, 김석원보다는 한 계급 아래, 소좌였던 [[이종찬]]보다는 한 계급 위. == 생애 == 1891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191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나고야 제3사단 보병 제33연대에서 복무하였다. 1918년 중위로 진급하고, [[시베리아 내전]]에 참전한 뒤 1924년을 전후해 조선 주둔군으로 옮겨간 뒤 1933년경까지 근무하며 소좌까지 진급한다. 1942년 용산정차장 사령관을 역임하는데, 이 과정에서 경성일보에 올린 수기에 "조선인들은 한시바삐 제국의 신민이 되어 동아시아를 개척해야 한다. 내 첫 출진의 목표는 [[야스쿠니 신사]]다."라는 문구가 있다.[[http://m.ohmynews.com/NWS_Web/Event/Premium/at_pg.aspx?CNTN_CD=A0002621430&CMPT_CD=SNEXT|관련 기사]] [[8.15 광복]] 이후 그의 다른 동기생들은 대부분 [[조선경비대]]에 참여했으나, 그는 한동안 참여하지 않았다가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이 터지면서 입대했다. [[1949년]] [[10월]]에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참모총장]]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대한민국 국방부]]의 [[높으신 분들]]과의 의견 충돌로 7개월만에 그만뒀다. [[6.25 전쟁]]에서는 [[전라북도]] 방어를 맡았으나 [[국방장관]] [[신성모]]와의 마찰로 얼마되지않아 해임되었다가 [[1952년]]에야 복직되었다. 예편 후에는 [[이기붕]]의 후임으로 제4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 되어 휴전협정 직전까지 재임했다. 이후 1959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904090020910301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59-04-09&officeId=00020&pageNo=3&printNo=11325&publishType=00010|별세했다]]. 그 뒤 1974년 5월 29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돼, 현재 초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인 [[이응준]]과 함께 제2장군 묘역에 잠들어 있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응준]] 역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일본군 복역 기록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아들과 함께 수록되어있다. 그러나 그런 이력에도 불구하고 [[국립서울현충원]]의 묘비에는 아래와 같이 왜곡 서술 되어 있다. >"개화의 선구자로 호국의 간성이었고, 강직과 청렴으로 시대의 등불이었으며, 덕과 지용으로 국군을 세워 기르셨으니 뜻의 굳으심이 눈바람에 푸르른 청송이시오. 덕의 굳으심이 뭇 봉우리 우뚝한 태산이시라. 높은 뜻 해와 함께 이 땅 위에 머무르시고 빛난 달과 함께 어둠 속의 등불 되시어 조국을 길이길이 비치오소서. 비치오소서." == 기타 == 그의 아들 [[신응균]] 역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으로 복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종전 당시 계급은 소좌였다. 광복 후 [[이등병]]으로 입대했다가, [[6.25 전쟁]] 당시 [[포병]]사령관으로 [[특별임관]]되었다. 예편 후에 [[국방과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기도 했다. 막내아들인 신박균은 한국전쟁에 하사로 복무하다 전사했다.[[https://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95&fbclid=IwAR1KJ4wT3EydGmPZOPwcKKBm-P6arpeZ5Cg9x25iosSNwzMzXErSePZipLk|관련 기사]] == 둘러보기 == [include(틀:제1공화국의 국무위원)]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평산 신씨]][[분류:국방부 장관]][[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분류:6.25 전쟁/군인]][[분류:1891년 출생]][[분류:1959년 사망]][[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분류:이승만 정부/인사]][[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