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6px -11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420e61 20%, #6a1b9a)" {{{#!wiki style="text-shadow: 0 0 5px #6a1b9a; color:#FFFFFF" {{{+1 심수봉}}}[br]沈守峰|Shim Soo Bong}}}}}}''' || ||<-2> {{{#!wiki style="margin:-6px -10px" [[파일:심수봉가수.jpg|width=100%]]}}} || || '''본명''' ||심민경 (沈玟卿)[* 가수로서 성공하려면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권유로 어릴 때 [[스님]]이 지어준 [[법명]]인 심수봉으로 [[예명]]을 정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207827|관련기사]] 〈[[MBC 대학가요제|대학가요제]]〉 때에는 심민경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므로 데뷔 후에 예명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개종 이후 인터뷰에서 본인이 개신교적인 이름으로 바꾸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다.]|| ||<|2> '''출생''' ||[[1955년]] [[8월 28일]] ([age(1955-08-28)]세)[* 음력 7월 11일. [[1950년]] [[8월 24일]] 출생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성립되기 어렵다. 이 설이 맞다면 적어도 1949년 이전에 심수봉의 부모가 만났다는 결론이 나온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2187968|인터뷰]]에 따르면, 심수봉의 모친이 [[평양]]에 살다가 [[1.4 후퇴]] 당시 즉, 1951년 쯤에야 [[월남]]했다고 나온다. 월남하자마자 남편을 만나서 [[임신]]했더라도 최소한 [[1952년]] 생이다. 또한 2011년에 85세이던 모친이 26세 때 부친을 처음 만났다고 증언했다. 이것을 계산하면 첫 만남 시기가 빨라도 1952년이다. 그리고 심수봉은 1978년 〈대학가요제〉와 [[1979년]] [[10.26 사건]] 당시에 [[대학생]]이었다.]|| ||[[충청남도]] [[서산시]][* 출생 당시 [[충청남도]] [[서산군]]]||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본관''' ||[[청송 심씨]][* [[https://www.ynam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405|관련 기사]].]|| || '''신체''' ||[[O형]]|| || '''부모''' ||아버지 심재덕, 어머니 장형복|| || '''형제자매''' ||언니[* 이 언니의 손자가 [[포르테 디 콰트로]]의 [[손태진]]이다.], 이부 남동생 1명, 이부 여동생 1명[* 아버지는 심수봉 출생 직후에 사망했고, 어머니가 [[재혼]]을 해 이부 남동생과 이부 여동생이 각각 하나씩 있다.]|| || '''배우자''' ||김호경[* [[MBC]] 라디오 PD. 심수봉에겐 2번째 남편이며, 남편 또한 이혼 경험이 있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어머니도 과부고 본인도 어릴 적 삼촌한테 학대받아 사랑받은 기억이 적던 심수봉이 짝사랑하다 먼저 고백했다고 한다.[[https://www.newsen.com/news_view.php?uid=202304131156076110|#]] 다만 남편이 군사정권 시절 감옥도 갔다온 운동권 출신이라 그런지 사랑 표현에 서툴러 지금도 사랑에 목 마르다고 한다.]|| || '''자녀''' ||2남 1녀|| || '''학력''' ||[[인화여자고등학교]] {{{-2 (졸업)}}}[br][[명지대학교]] {{{-2 (경영학 / [[학사]])}}}|| || '''종교''' ||[[불교]] → [[개신교]]([[침례회]])[* [[http://m.kmib.co.kr/view.asp?arcid=0005154578|1985년부터 개신교 신자가 되었고, 강남중앙침례교회에 다닌다.]] 현재의 직분은 [[집사]]이다.]|| || '''직업''' ||[[가수]], 아티스트|| || '''소속사''' ||라이트웨이브 엔터테인먼트, 루체 엔터테인먼트|| || '''데뷔''' ||1978년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 || '''팬클럽''' ||심비로|| || '''팬카페''' ||[[https://naver.me/58FRWIGX]]|| [목차] [clearfix] == 개요 == >"최고의 여성 트로트 싱어송라이터" >---- >서정적인 가사에 더해진 애절한 단조의 창법. 흔들림 없이 선율을 장악하는 비음 섞인 떨림. 구슬픔이 담겨있는 애진한 음색. 한국적인 한이 깊이 담겨있는 목소리, 최고의 여성 트로트 싱어송라이터, Legend 심수봉 [[대한민국]]의 [[가수]]. [[트로트]]와 [[발라드]], 그 중간의 간극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운 이른바 트롯발라드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 정석적인 발라드라는 장르 자체는 [[유재하]]가 등장하는 1980년대 후반에야 태동했다는게 정설이긴 하다. 일종의 트롯 버전 발라드 [[프로토타입]]격인 셈.] 그리고 현재까지 활동 중인 원조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 또한 후술되었듯, 정치적 사건에 원치 않게 엮여 활동기를 많이 날린, 한동안 불운했던 가수이기도 하다. == 생애 == === 어린 시절부터 가수로 데뷔하기까지 === [[1955년]] [[8월 28일]]에 [[충청남도]] [[서산군]](現 서산시)에서 태어났다.[* [[평양]]에 살던 심수봉의 모친이 [[1.4 후퇴]] 시기쯤 진남포항에서 월남하여 이후 [[충남]]에서 부친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부친은 심수봉이 3살 무렵 헤어졌고, 직후 사망하여 심수봉의 기억엔 없다고 한다. 당시에도 부친의 나이가 [[환갑]]이 다 되었다는거 보면, 26살이던 모친과의 결혼이 일반적인 결혼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외삼촌은 집안 사정 때문인지 심수봉을 [[고아원]]에 넘기려고 했다고.] 그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했던 집안이었고,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등도 모두 음악을 했을 정도로 음악과 연이 깊은 음악가 집안이었다. 이런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그도 음악인의 삶을 걷게 된다. 주 전공은 [[재즈]]였으며, 당시 최고의 음악가들만 설 수 있다는 미8군 무대에 로큰롤 밴드 "논스톱"의 드러머로 서기도 했었다. 그를 트로트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가 [[드럼]]을 치는 모습에 깜놀하기도 했는데 이런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럼을 치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카펜터즈]]의 캐런 카펜터와 함께 이야기되기도 한다. 심수봉은 당초 서산초등학교를 다녔으나, 그의 어머니가 이혼[* 심수봉의 생부 사망 후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하였다. 이것은 새로 한 결혼의 파경.] 후 이사하게 되자, 어머니를 따라 2학년 때 서울 [[은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후, [[영등포구|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했으나 당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뇌신경 인프레’라는 병에 걸려 입원 치료를 위해 다시 2년 휴학을 했다. 뒷날 인천 [[인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만 19세인 1974년에 고교 졸업을 하였다. 심수봉은 같은 해 만 20세의 나이로 대입준비를 하여 재수 끝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도중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다. [[https://youtu.be/BqtRO_Pmyxg|당시 영상 보기]].[* 단, 이 동영상의 음향은 왼쪽만 재생되니 감상시 참고 바람. 좋은 음질은 [[https://youtu.be/VxCUzDMEyyo|여기]]에서. 그러나 동영상은 나오지 않음. 사족으로, 이 동영상의 [[MC]]는 [[이수만]]과 [[임예진]]이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가요제〉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음악적 성향이 [[포크송|포크]]나 [[록 음악|록]]이었던 시절에 심수봉은 자신의 주 전공인 [[재즈]]가 아닌 [[트로트]]로 도전장을 던졌으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 심사위원이 좋은 점수를 안 준 이유는 '너무 프로스러워서'였다. 지금이야 이해하기 힘든 평이지만 당시 〈대학가요제〉의 심사 기준은 대학생의 풋풋함이었기 때문에 심수봉의 세련된 음악과는 상당히 간극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1회 대상 수상자 자격으로 게스트 출연을 했던 여병섭([[샌드페블즈]]의 보컬리스트)이 수상 발표 때에 대기실에서 심수봉 옆에 있었기에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금상까지 자신의 이름이 발표되지 않자, 대상이라고 확신해서 오히려 더 기뻐했다고 한다.[* 출처:〈노사연•이성미쇼〉 2013년 8월 6일 방송.] 음악을 들어보면 피아노와 보컬만으로 빅밴드를 압도할 뿐 아니라 악단은 화성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굴욕을 보인다. 여병섭에 따르면, 악단의 연주 실력 때문에 생긴 사고가 아니라 편곡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였다. 악단이 준비한 [[편곡]]이 불만이었던 심수봉이 공연 시작 전까지 악단장과 말싸움을 했다고 한다. 결국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각자 알아서 공연에 임하다 보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출처: 〈노사연•이성미쇼〉 2013년 8월 6일 방송.] 그러나 그는 이 대학가요제에서 부른 〈[[그때 그 사람]]〉이 히트하면서 가수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그와 겨뤘던 출연자들이 후덜덜한데 [[임백천]], [[노사연]], [[배철수]] 등이다. 이들은 대상은 못 탔으나 다들 이후에 가수로 데뷔했다. 후일 노사연 등이 밝히기로는 1회에 샌드페블즈가 대상을 덜컥 수상하자 "뭐야, 저 정도면 우리도 할 수 있겠는데?"라고 여겨서 2회 때 실력자들이 대거 참가했던 것이라고 한다. 대상은 [[부산대학교]] 중창단 썰물이 수상했고, [[노사연]]이 금상, [[배철수]]가 소속된 한국항공대학교 대표 [[활주로]]가 은상을 받았다. 사실 심수봉은 〈대학가요제〉로 데뷔하기 이전 프로가수로 먼저 데뷔할 뻔도 했는데, 2023년 컬투쇼에 나온 심수봉이 "제가 도쿄호텔이라고 [[호텔]]에서 [[피아노]] 치고 [[노래]]하는 [[알바]]를 했다. 그런데 [[나훈아]] 선배님이 누구랑 같이 찾아 오셨다.", "어쨌든 저는 서비스로 그 분 노래를 하나 불러드렸는데 그게 인연이 되고 저를 알아봐 주셨다. 저 사람이 가수 안 하면 안 된다면서 레코드 회사 사장님 두 분을 모셔오셨고, 나훈아 선배님이 〈여자이니까〉라는 곡까지 만들어주셨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나훈아의 주선으로 1976년 신세기 레코드와 50만원에 음반 취입 계약을 맺고 녹음에 들어갔지만, 음반사와의 분쟁으로 음반 발매가 취소되었고, 심수봉은 같은 해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이후 1978년 〈대학가요제〉로 정식 데뷔한 심수봉에게 나훈아는 "이 바닥이 어떤 곳인줄 알고 왔느냐? 이 험한 곳에서 잘 버텨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ffffff>{{{#!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mmo-IX1DwgQ)]}}} || || '''1978년 〈대학가요제〉 참가 장면''' || ||<#ffffff>{{{#!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8KesutvaxxU)]}}} || || '''1979년 10월 8일 TBC 〈쇼는 즐거워〉 1위 장면''' || ||<#ffffff>{{{#!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RPFexoR-dX8)]}}} || || '''1979년 12월 MBC 〈10대가수가요제〉 10대가수상 수상 무대 장면''' || === [[10.26 사건]]과 그 이후 === 심수봉이 〈그 때 그 사람〉을 통해 인기를 모으던 중,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눈에도 띄었는지 [[1979년]] [[10월 26일]], 모델 [[신재순]][* 심수봉은 신재순을 언론에서 언급할때 'Ms.신'이라고 한다. 그 사건 이후로도 둘이 한동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과 함께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대통령 술자리에 불려갔다.[* 《[[검정 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 여행]]》에 나온 장면에서는 심수봉이 기타를 치며 〈[[그때 그 사람]]〉을 부르는데,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부분에서 김재규가 진땀을 흘리며 밖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갔고, '''떠난 사람 못 잊어서''' 부분에서 김재규가 한 손에 권총을 들고 궁정동 안가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민주화된 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술자리에 여가수를 불러 노래를 시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군사독재|그런 시절]]이었다. 어쨌든 그 날도 평소대로라면 조용히 지나가 옛 일 정도로 회자되었을 것이지만[* 이미 세 번째 자리였다는 등의 인터뷰에 따르면 처음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가수들도 몇번 불려간 전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심수봉이 어쩌다보니 그 날 재수없게 휘말린 셈. 이 날 심수봉은 방송 스케줄이 있었음에도 대통령이 부르니 죄다 캔슬당하고 갔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날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측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하고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 [[10.26 사건]]을 터트린다. ||<#ffffff>{{{#!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img.donga.com/41340816.1.jpg|width=100%]] }}} || || '''왼쪽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심수봉이고, 오른쪽은 [[신재순|{{{#fff 신재순}}}]]이다.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151124_0010436097#_enliple|자료]]''' || [[암살]]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합동수사본부가 [[10.26 사건]]을 강도 높게 조사하면서 심수봉도 조사를 받았고, 현장에 있던 것뿐이었던지라 최종적으론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시대는 그녀를 파란으로 몰고 갔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어 한창 활동해야 될 시기에 [[방송]] 활동이 [[금지]]되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그녀는[* 10.26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은 이때만 해도 조사받던 심수봉에게 수고가 많다며 당시 100만 원 위로금을 건네주기도 했을 정도로 나름 자상했다고 한다. 허나 대통령이 된 이후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돌변한듯 이런 고충을 겪으면서 심수봉 본인은 전두환 정부 시절 심적·금전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한다.], 이후 잠시 영화계로 진출하여 〈아낌없이 바쳤는데〉라는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도 했지만, 가수로서는 활동할 수 없었다. 1984년이 돼서야 방송 활동 금지가 풀리면서 또 다른 대표곡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히트 치면서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발표한 〈무궁화〉가 국민을 선동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방송된 지 단 하룻 만에 [[금지곡]]이 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심수봉 본인은 "대중가요란 건 원래 많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함축성 있는 가사를 써야되다 보니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 되는데 그걸 데모곡이라고 단정지어 금지곡을 때려버렸다."라고 아쉬워했다. 사족으로 〈순자의 가을〉이란 곡도 금지곡이었는데, 이유는 노래 제목이 [[이순자|당시 영부인]]의 이름과 같아서였다(...).] 1987년에는 〈[[사랑밖엔 난 몰라]]〉가 히트했고 이후 꾸준히 콘서트와 음반 발매를 하면서 현재까지도 가수로서 활동하고 있다. 1993년 [[SBS]] 〈[[주병진]]쇼〉에 출연해 [[암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본인은 "자신이 가수인데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대중들이 자신을 가수보다는 그 이야기 쪽으로만 연관짓는다."라며 힘든 심정을 밝히고, 당시 상황에 관해 비교적 담담하게 진술하였다. 본인이 갔을 때는 이미 정치적 얘기가 한창 진행되고 이제부턴 여흥을 즐길 막바지 타임이라[* 다만 이때도 [[김재규]]와 [[김계원]]은 표정이 로봇처럼 굳어있어 본인도 뭔 일 있나하고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많은 얘길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박정희가 7시 뉴스를 보다 주한 미 대사와 만난 김영삼 총재를 보고 이미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총재도 아닌 사람]]을 왜 만나냐고 화를 냈고, 이에 자신은 속으로 '강제로 밀려난거지.'라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일이 터지고 놀란 심수봉은 박정희가 이미 죽은지도 모르고 머리에 확인 사살하려는 김재규에게 그러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고 이후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 방으로 피신한 이후부턴 신재순과 문을 걸어잠그고 죽을지 살지 몰라 두려워하며 쥐 죽은듯 있었다고. 이후 체포되어 같이 조사받는 김재규를 보고 인생사 참 허망했다고 한다. ||<#ffffff>{{{#!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7jYjDqPEKEU)]}}} || || '''심수봉 〈주병진쇼〉 출연''' || == 음악성 == 주 장르가 [[트로트]]지만 드물게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도 가지고 있는 가수로 그의 히트곡들은 거의 대부분 그가 직접 [[작사]]·[[작곡]]하였다. 보통 유명한 트로트 가수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곡을 써서 부르기 보다는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아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심수봉은 상술됐다시피 이미 악기를 다루는 능력부터 [[먼치킨(클리셰)|먼치킨]]스러우니 자기 스스로가 곡을 쓸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러다보니 심수봉의 곡은 단순 트로트 곡이 아닌 것이다. 여타 트로트 가수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아티스트]]'다. 심수봉의 대표곡으로는 〈[[그때 그 사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사랑밖엔 난 몰라]]〉, 〈여자이니까〉[* 나훈아 작사, 작곡.], 〈백만송이 장미〉[* 외국곡 리메이크, 심수봉 작사.], 〈미워요〉, 〈비나리〉, 〈무궁화〉, 〈나의 사계절〉, 〈나의 신부여〉 등이 있다. 후배 가수들도 심수봉의 곡을 많이 [[리메이크]]한다. 〈[[백만송이 장미#s-1]]〉는 러시아 가요[* 사실 [[라트비아]] 가요 '''〈마라가 준 삶〉'''이다. 그게 러시아에서 알라 보리소브나 푸가초바의 가요로 번안되고, 심수봉이 다시 리메이크한 것.]를 [[백만송이 장미#s-1.4|번안]]하여 히트를 쳤다. == 팬클럽 == 2000년대 초반 심수봉의 팬카페 '심수봉을 사랑하는 사람들' 을 시작으로 해서 팬들이 직접 홈페이지를 만들고, 심수봉도 팬들과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한다. '심.수.봉'이라는 이름으로 된 팬들이 만든 홈페이지 공간은 어찌된 일인지 현재는 관리가 안 된다고 한다. == 활동 == 2011년〈 [[불후의 명곡|불후의 명곡 2]]〉 첫방송에서 [[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10604184506146?f=m|첫번째 전설]]로 등장했다. [[불후의 명곡/심수봉 편]] 참고. 이후 2013년 97회, 2023년 600회에 다시 출연했다. 2019년 12월 20일에 〈[[유희열의 스케치북]]〉 [[성탄절]] 특집에 출연하였고, [[명불허전]]의 공연을 보여주어 '역시 심수봉'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ffffff>{{{#!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UqDt5wbUNmg)]}}} || || '''〈2021 한가위 대기획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 || 〈[[2021 한가위 대기획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을 2021년 9월 19일 오후 8시에 [[KBS 2TV|KBS2]]에서 선보였다.[* 다만 다시보기 및 VOD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는다.] [[MBN]] 〈[[불타는 트롯맨]]〉 준결승전에서 [[남진]], [[주현미]]와 함께 전설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였다.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에서 신곡 부부 행진곡을 발표하였다. 〈[[불타는 트롯맨]]〉의 후속인 〈[[불타는 장미단]]〉 방송에 2023년 05월 02일에 첫 출연하였다. 당시에 조카손자인 [[손태진]]과 〈[[그때 그 사람]]〉 을 듀엣으로 불러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를 모았다. == 매체에서 == 본업인 [[가수]]로 매체에 출연하는 경우가 압도적이지만, 현대사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하나의 배역으로서 종종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 중 하나인 [[10.26 사건]]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다만 비중상 단역 배우들이 주로 맡는다. * 〈[[제4공화국(드라마)]]〉에선 정은수가 연기했다. 심수봉 본인이 촬영장에 와서 고증을 지도했다. * 〈[[제5공화국(드라마)]]〉에선 [[신동미]]가 연기했다. * 〈[[코리아게이트(드라마)]]〉에선 [[권은아]]가 연기했다. * 〈MBC 스페셜 - 1979: 1부 나는 저항한다〉에서는 [[요요미]]가 연기했다. * 〈[[그때 그 사람들]]〉에선 [[자우림]]의 [[김윤아]]가 연기했다. * 〈[[남산의 부장들]]〉에선 정미형이 연기했다. == 여담 == * 많은 사람들이 심수봉이 처음으로 작사, 작곡한 곡이 〈[[그때 그 사람]]〉인줄 아는데 실제로는 〈영원히 이대로〉라는 곡을 처음으로 작사, 작곡 했다고 한다. * [[포르테 디 콰트로]] 소속 [[손태진]]의 이모할머니다. * 〈[[KBS 빅쇼]]-심수봉, [[김수희]] 두 여자가 사는 법〉을 보면, 둘이 과거부터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https://youtu.be/AV2lt5tC77Y|#]] * 심수봉의 결혼 주례를 성라자로마을 제1,7대 원장으로 역임하셨던 이경재(알렉산델) [[신부]]님께서 해주셨다.[[https://youtu.be/916dk-AsZIU|#]][* 영상 44분 17초를 보면 이 이야기가 나온다.] [[분류:심수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