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련 문서, top1=몽골 간섭기, top2=여몽 관계, top3=동녕총관부, top4=탐라총관부)] || {{{#ffffff '''원간섭기의 고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파일_원 간섭기 시기의 고려.png|width=100%]]}}} || [목차] == 개요 ==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원나라]]에서 [[1258년]] 동북면 화주[* 조선의 [[영흥군]], 현재 북한의 [[금야군]], [[요덕군]]으로 갈라졌다.]에 설치한 통치 기구이다. == 역사 == 원래 이곳은 [[고려]]의 영토이긴 했지만 [[여진족]]과 얽혀져서 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던 지역이다. 1258년, [[조휘]]와 [[탁청]]이라는 사람이 이 지역의 고려 관리를 죽이고 원에 항복하여 [[몽골 간섭기|원 간섭기]] 당시 원이 직접 통치를 하게 된다. 이때 조휘는 초대 쌍성총관, 탁청은 천호가 되어 [[한양 조씨]]가 쌍성총관을 세습하고 탁청의 후손이 천호를 세습한다.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의 [[병신정변|무력 정벌]]로 [[1356년]]에 4대 쌍성총관인 [[조소생]]이 패배하여 없어질 때까지 약 100여 년 간 이어졌다. 공민왕은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공천보와 김원봉을 부사로 삼고 강릉도존무사 [[이인임]]과 함께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게 했다. 유인우 등은 철령을 지나 쌍성에서 200리 떨어진 등주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조소생은 천호 탁도경과 숙부 조돈을 쌍성으로 부른다. 조소생의 숙부 조돈이 쌍성총관부 수복에 큰 역할을 했다. 조소생은 조돈이 [[충숙왕]] 시절부터 고려에서 벼슬을 지냈기에 배반할 것을 우려해 호위를 붙여 사실상 구속시켰고, [[이인임]]은 조돈을 회유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유인우를 설득한다. 조돈은 조소생의 참모 백호 조도적을 회유하고 동생 조천주와 함께 쌍성을 탈출했으며, 용진에서 네 아들을 데리고 유인우의 진영에 나아가 항복한다. 조돈은 장남 조인벽을 내세워 쌍성 사람을 회유할 것을 유인우에게 제안했고, 민심을 고려 쪽으로 돌리는 것에 성공한다.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도 쌍성총관부 정벌에 공을 세웠다. [[공민왕]]은 쌍성의 천호들을 거느린 이자춘을 보내 유인우와 합세하게 하고 98년만에 쌍성총관부를 수복한다. 쌍성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은 처자를 버리고 여진의 땅으로 도망쳤고 [[나하추]]까지 끌어들여 대항했지만, [[이성계]]에게 패했고 이후 여진족 다루가치 소음산(所音山)과 총관 부카(不花)에게 처자 및 부하 50여 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조돈은 고려에서 벼슬을 계속해 용성군 작위를 얻기에 이르렀는데, 조돈의 회유에 넘어가 탈출을 도운 조도적은 동북면천호에 임명되었으나 곧 유인우에게 살해당한다. [[이자춘]]은 동북면병마사가 되어 고려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쌍성총관부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조돈과 아들들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때도 활약했으며 조돈의 장남 조인벽은 이자춘의 딸 [[정화공주]]와 혼인을 하여 [[이성계]]와 매형-처남 관계가 되고 아우 조인옥과 함께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다. == 역대 총관 == || '''대수''' || '''이름''' || '''재임기간''' || || 초대 || [[조휘]] || 1258 ~ ? || || 2대 || 조양기 || ? ~ 1327? || || 3대 || 조림 || 1327? ~ 1354 || || 4대 || [[조소생]] || 1354 ~ 1356 || == 기타 == *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의 직속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동녕총관부]]와 유사하다. * [[원사(역사책)|원사]]에는 등장하지 않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 측 기록에만 등장한다. 더불어 [[조휘]]도 한국 측 기록에만 등장한다. 그나마 비슷한 것이 원나라에서 [[영녕공]]에게 임명한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 정도가 있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 원사에 고려쌍성(高麗雙城)이라는 지명이 언급되어있고, 같은 시대 인물인 이곡([[이색(고려)|이색]]의 아버지)도 3대 총관인 조림을 쌍성등처군민총관(雙城等處軍民總官)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름이 쌍성인 것은 맞아보인다.][* 여담으로, 지금의 [[랴오닝성]] [[톄링시]] 서쪽의 요나라 때 이름이 한자까지 같은 쌍성(雙城)이었다.] * 쌍성총관부 화주와 인접한 [[함흥시|함주]] 일대는 여진족이 거주했으며 [[요양행성]] 합란부에서 관할했다. [[분류:고려(원간섭기)]][[분류: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