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Adolf Borchers.jpg]] '''아돌프 보르허스(Adolf Borchers : 1913년 2월 10일~1996년 2월 9일)''' [[분류:1913년 출생]][[분류:1996년 사망]] [목차] == 형제는 용감했다 == 맏형 헤르만 보르허스(Hermann Borchers : 1910~1974), 차남 '''아돌프 보르허스''', 막내 [[발터 보르허스]](Walter Borchers : 1916~1945)가 전부 [[2차 대전]]에서 종군하며 각각 [[무장친위대]] 지휘관, 단발 전투기 조종사, 그리고 요격기조종사로 복무한 보르허스 삼형제는 셋 모두 [[철십자 훈장|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희귀한 케이스이다. 그중에 차남인 아돌프 보르허스는 [[니더작센]]주의 뤼네부르크 부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1938년에 [[루프트바페]]에 입대하자마자 [[스페인 내전]]에 지원 병력으로 파견되기 위해 편성된 콘도르 군단에 선발되었다. [[스페인]] 해외 파병에서 돌아온 는 제77전투항공단 제2비행중대(2./JG 77)로 배속받았는데, 이 부대는 나중에 제51전투항공단 제11비행중대(11./JG 51)가 된다. 비행병 보르허스는 이 부대에서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 작전에서 참가했고, 연이어 [[배틀 오브 브리튼]]까지 출격하며 5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다. == 동부전선에서 == [[바르바로사 작전]] 지원을 위해 [[동부전선]]에 파견된 뒤로 그의 격추 페이스는 급상승해서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41년 말에 그의 스코어는 23대까지 늘어나 있었다. 전시 진급 대상자로 뽑혀 장교가 된 그는 1942년 10월 8일에 JG 51 제11비행중대장이 되었고, 그 해가 저물기 전까지 38회의 승리를 헤아리는 베테랑 조종사가 되었다. 1943년에 보르허스는 동료 전우들의 축하를 받으며 당시 저명한 여성 [[스키]] 선수였던 크리스틀 크란츠(Christl Cranz)와 결혼식을 올렸다. 78대 격추 전과를 세운 싯점에서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상한 그는 1944년 6월 11일에 제52전투비행단의 수석 중대인 제1비행중대의 지휘관이라는 중임이 맡겨졌다. 당시 독일 공군 지휘관 편제에서 항공단장과 비행단장 다음으로 인정되는 수석 중대장은 [[장교]] 출신자가 아니면 거의 뽑히지 않던 보직이었는데, 보르허스는 그런 관행조차 무시할 만큼 실력을 갖추고 평판까지 뛰어났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7월 26일에는 100대째 전과를 올리고, 9월 2일에 그가 118번째 승리를 통해 거둔 격추 전과는 JG 52를 통틀어 격추 10,000기째라는 상징적인 기록이 되었다. 그의 부하들은 화환과 푯말, 그리고 새끼돼지를 준비했다가 그가 돌아오자 [[헹가래]]를 쳐주며 환영해주었다. 아돌프 보르허스는 패전이 얼마 남지 않은 1945년 2월 1일에는 [[소령]]으로 진급하며 JG 52의 제 III 비행단장으로 발탁되었으나 이미 그와 함께 싸워 온 전우들은 대부분 죽은 후였다. == 패전 이후 == [[미군]]이 진주해오자 보르허스 비행단장은 부하들을 인솔하여 항복했지만, 미/소군 사이에 맺어진 협정에 따라 중상을 입은 부상자를 제외하곤 거의 모두 그들을 벼르고 있던 [[소련군]]에게 넘겨져 버렸다. 보르허스 소령은 그때까지 800회 이상의 작전을 거듭하면서 공식 격추 132기를 인정받고 있던 수퍼 [[에이스]]였던 탓에, 소련군도 이 사실을 알고 그를 특별하게 융숭히(?) 대접했다. 나중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 크란츠와 함께 스키 학교를 개설해 자신이 은퇴하던 1987년까지 그 학교를 운영했다. == 서훈 == 2급/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1941년 10월 13일) [[독일 십자훈장|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10월 15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4년 11월 22일) [include(틀:2차 세계대전/전투기 에이스 52~66위)] [[분류:에이스 파일럿]][[분류:스페인 내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