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0000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 [include(틀:역대 천주교 대전교구장)] ---- [include(틀:서울대교구 보좌 주교 출신 교구장 주교)] }}} || ||<-3> {{{#000000 '''9대 [[천주교 서울대교구|{{{#000000 천주교 서울대교구}}}]]장'''[br]'''초대 [[천주교 대전교구|{{{#000000 천주교 대전교구}}}]]장'''[br]'''{{{+1 아드리앙조제프 라리보}}}'''[br] '''元亨根''' | '''Adrien-Joseph Larribeau'''}}} || ||<-3> [[파일:external/english.cbck.or.kr/bishop012.jpg|width=100%]] || ||<|2> '''출생''' ||<-2>[[1883년]] || ||<-2>[[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공화국]] [[제르(프랑스)|제르]] 라로뮤 || ||<|2> '''사망''' ||<-2>[[1974년]] (향년 90~91세) || ||<-2>[[프랑스|프랑스 공화국]] [[타른에가론]] 몽베통 || || '''국적''' ||<-2>'''[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 ||<|1> '''주교 임명일''' ||<-2>[[1926년]] 부대목 임명, 주교 수품 || ||<|3> '''재임기간''' ||[[천주교 서울대교구|경성대목구]] 부대목 ||[[1927년]] [[5월 1일]] ~ [[1933년]] [[1월 22일]] || ||[[천주교 서울대교구|경성대목구]]장 ||[[1933년]] [[1월 23일]] ~ [[1942년]] [[12월 20일]] || ||[[천주교 대전교구|대전대목구-대전교구]]장[* 1962년, 정식교계제도 설정에 따라 '대전대목구'에서 '[[천주교 대전교구|대전교구]]'로 교구명 변경] ||[[1958년]] [[7월 4일]] ~ [[1965년]] [[4월 30일]] || ||<-3> [[파일:라리보 주교 문장.jpg |width=300%]] || ||<-3> '''STELLA DUCE'''[br](별을 따라서)[* [[동방박사]] 이야기에서 따온 사목표어.] || [목차] [CLEARFIX] == 개요 ==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제9대 교구장이며 [[천주교 대전교구]]의 초대 교구장이다. 한국식 이름은 '''원형근'''(元亨根). == 생애 == [[프랑스]]의 라로뮤(La Romieu)에서 태어났으며, 1904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해 1907년 3월 10일에 [[성품성사|사제품]]을 받고 [[신부(성직자)|신부]]가 되어, 곧 임지인 [[조선]] 파견을 향해 고국을 떠났다. 1907년 5월 21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1908년에 [[만주]] [[간도]]로 파견되어 삼원봉(三元峰)에서 첫 전교 활동을 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젊은 선교사들이 군복무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자, [[한국 천주교]]는 일손이 달려 더욱 바빠지게 되었는데, 라리보 신부는 이때 [[충청도]] 지방을 맡아 40여개의 [[공소(가톨릭)|공소]]를 돌아다녀야 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1916년에는 [[서울대교구]]의 당가신부가 되어 교구살림을 맡아 보았고, 1926년에 부교구장인 드브레 주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계승권을 가진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1일 성성식을 갖고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위임으로 실질적으로 서울대교구를 다스렸다. 1933년에 뮈텔 주교가 사망하자 자동적으로 그의 뒤를 이어받아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 1942년 1월 5일 사임할 때까지 일제하의 어려운 시기에 서울대교구를 무사히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이 더욱 교회를 탄압하여 외국인 성직자를 구금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자, 라리보 주교는 사임할 것을 결심하는 동시에, [[한국 천주교]]의 보존을 위해 [[한국인]] 성직자를 주교로 임명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노기남]] 바오로 신부가 방인사제로서는 처음으로 주교로 서품되어 [[서울대교구]]를 다스리게 되었다. 서울대교구장직을 노 주교에게 넘긴 뒤 [[용산예수성심신학교]]에 은거한 라리보 주교는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한국인 수녀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파일:external/web.pbc.co.kr/346314_1.0_titleImage_1.jpg]] 1948년 [[충청남도]] 지역이 독립된 포교지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됨에 따라 이 지역의 책임자가 되었고, 1958년 이 지역이 대목구로 설정됨으로써 초대 대목구장이 되었으며, 1962년 교계제도의 설정과 더불어 정식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천주교 대전교구]]장이 되었다. 그 후 [[주교좌성당]]을 신축하는 등 대전교구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그러나 고령으로 점차 격무를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자 [[1965년]] 3월 현직에서 은퇴하고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1974년]] [[8월 12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58년간에 걸친 [[한국 천주교]]를 위한 봉사와 공로로, [[1960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96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에서 문화훈장(현재의 국민훈장 모란장으로 승계됨)을 수훈하였다. [각주][[분류:프랑스의 가톨릭 선교사]][[분류:파리외방전교회 회원]][[분류:프랑스의 가톨릭 주교]] [[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 [[분류: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분류:천주교 대전교구장]] [[분류:1883년 출생]][[분류:1965년 은퇴]][[분류:1974년 사망]][[분류:제르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