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FB1E5><:>[[퍼시픽 리그|[[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width=30]]]] '''{{{#ffffff 1987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 || 1986년[br][[오치아이 히로미츠]][br]([[롯데 오리온즈]])[br].360 || → || '''아라이 히로마사'''[br]'''([[킨테츠 버팔로즈]])'''[br]'''.366''' || → || 1988년[br]타카자와 히데아키[br]([[롯데 오리온즈]])[br].327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rgba(50%, 50%, 50%, 30%) 0%, transparent)" {{{+1 {{{#000000,#e5e5e5 '''일본의 야구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新井宏昌.jpg|width=100%]]}}} || ||<-2><#FFFFFF> '''{{{+2 아라이 히로마사}}}[br]新井宏昌 / Hiromasa Arai''' || ||<:> '''한국명''' ||박종률 (朴鐘律)[* 개명 전 일본명은 한국명인 종률을 훈독한 아라이 카네노리(新井鐘律).] || ||<:><|2> '''출생''' ||[[1952년]] [[4월 26일]] ([age(1952-04-26)]세) ||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1952~1991)[br][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1991~) || ||<:> '''학력''' ||[[PL학원고등학교]] - [[호세이대학]]|| ||<:> '''포지션''' ||[[외야수]], [[1루수]] || ||<:> '''투타''' ||우투좌타 || ||<:> '''신장''' ||174cm, 69kg || ||<:> '''프로입단''' ||1974년 드래프트 2위 || ||<:> '''소속팀''' ||'''[[난카이 호크스]] (1975~1985)[br][[긴테츠 버팔로즈]] (1986~1992)''' || ||<:> '''지도자''' ||[[오릭스 블루웨이브]] 1군 타격코치 (1994~1997)[br][[오릭스 블루웨이브]] 1군 종합코치 (1998~1999)[br][[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 감독·타격코치 (2000~2001)[br][[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군 타격코치 (2003~2004)[br][[오릭스 버팔로즈]] 1군 치프·타격코치 (2005~2006)[br][[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타격코치 (2007~2008)[br]오릭스 버팔로즈 2군 감독 (2010~2011)[br]오릭스 버팔로즈 1군 타격코치 (2012)[br][[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타격코치 (2013~2015)[br][[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 타격코치 (2019~2020) || [목차] [clearfix] == 개요 ==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재일 한국인]] 3세 출신으로 1991년 [[일본]]으로 귀화했다. 본명은 '박종률(朴鐘律)'[* 1980년대 한국 야구계에서는 일본 이름을 한자로 읽은 박굉창(朴宏昌)으로 통했었다.]로 프로 지명 당시까진 본명을 훈독한 '아라이 카네노리(新井鐘律)'를 [[통명]]으로 사용했으나 프로 데뷔 후 등록명을 히로마사로 바꾼 뒤 귀화와 함께 본명까지 그대로 등록명인 히로마사로 변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역 시절 준수한 배트 컨트롤을 뽐내며 통산 2000안타, 300희생타를 기록한 교타자로, 은퇴 후 여러 프로팀에서 코치로 일하며 [[스즈키 이치로|이치로]] 등의 명선수들을 길러냈다. == 현역 시절 == === 데뷔 이전 ~ [[난카이 호크스]] === [[PL학원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70년 주장으로써 팀을 최초로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코시엔]] 결승으로 이끌고, 가을에 열린 [[국민체육대회]]에서 우승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이후 PL은 [[키요하라 카즈히로]], [[쿠와타 마스미]] 등을 배출한, 20세기 말을 대표하는 야구 명문고로 거듭난다. 그 후 고졸 시즌이었던 1970년 드래프트에서 [[킨테츠 버팔로즈]]의 9위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을 거부한 채 [[호세이대학]] 진학을 선택했고, 대학 시절에도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면서 2차례 리그 우승과 [[베스트나인]] 1회 수상을 기록하고 1974년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대회에도 대표로 뽑힌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프로에 입문하는 계기가 된다. [[파일:external/auctions.c.yimg.jp/psycogun1117-img600x450-1393824947x6amy320987.jpg]] [[난카이 호크스]] 시절. 당초 아라이는 체구가 작아서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당시 난카이의 [[플레잉 매니저]]였던 [[노무라 카츠야]]가 TV로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대회 경기를 관전하던 중 그의 뛰어난 배팅센스에 주목, 같은 해 드래프트에서 [[난카이 호크스]]의 2위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다. 입단 2년차인 1975년부터 주전 [[외야수]]로 정착한 시작한 아라이는 이후 장타력은 낮았지만 3할 전후의 [[타율]]을 기대할 수 있는 교타력과 준수한 주력, 작전 수행능력을 앞세워 팀 타선의 [[테이블 세터]]로 활약하며 2차례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는 등 [[난카이 호크스]] 최후의 황금기와 기나긴 암흑기를 지탱했고, 1979년과 1982년엔 2차례에 걸쳐 당시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던 강타자 카토 히데지,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수위타자 경쟁을 벌였으나 2번 모두 아쉽게 타율 2위에 그치며 수상에 실패했다. 그러나 1985년 시즌엔 성적 부진에 빠지면서 출장 기회가 줄어들었고, 시즌 종료 후 노쇠화를 이유로 [[킨테츠 버팔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 === [[킨테츠 버팔로즈]] ===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a0ad75e7.jpg]]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노쇠화를 이유로 킨테츠로 트레이드된 아라이였지만, 킨테츠에서 당시 타격코치를 역임하던 [[나카니시 후토시]]를 만나 지도를 받으면서 오히려 프로에서의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킨테츠에서 [[후쿠모토 유타카]]의 연속 도루왕을 저지한 바 있는 [[호타준족]]의 1번 타자 [[오오이시 다이지로]]의 뒤를 잇는 2번 타자 역할을 맡게 된 아라이는 이적 첫 해인 1986년에 148안타, 리그 최다인 2루타 31개, 데뷔 이래 첫 두 자릿 수 홈런인 12홈런을 기록하며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고, 이듬해인 1987년엔 '''타율 .366/184안타 13홈런'''를 기록하며 과거 2차례나 놓쳤던 수위타자 수상에 성공한 데 이어 [[베스트나인]]과 함께 생애 유일의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는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이 해 아라이가 기록한 184안타는 그 해 [[퍼시픽리그]] 최다안타이자 당시 [[퍼시픽리그]] 단일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었고, 1994년 자신이 가르친 [[스즈키 이치로]]가 210안타를 쳐내면서 이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1987시즌 당시 일본프로야구 전체 최다안타 기록은 [[센트럴 리그]] 기록이었던 [[후지무라 후미오]]의 191안타로, 센트럴리그 기록도 2005년 [[아오키 노리치카]]에 의해 경신되었다.] 또한 2004년 킨테츠가 해체될 때까지 깨지지 않은 킨테츠 소속 선수의 단일 시즌 최다안타 기록이기도 하다. 1988년엔 [[10.19]]를 경험하기도 했고, 다음 해인 1989년엔 2번 타자이자 팀내 유일한 3할 타자로써 팀을 견인하며 그 해 킨테츠가 치열했던 우승 경쟁 끝에 9년 만에 [[퍼시픽리그]]를 제패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1989년 일본시리즈|같은 해 일본시리즈]]에서도 팀은 충격적인 [[리버스 스윕]]으로 우승을 놓쳤으나, 아라이는 23타수 9안타, 타율 .391의 성적으로 교타력을 과시하며 [[일본시리즈]] 패전팀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수에게 주는 감투선수상을 수상했다. 한편으로 난카이 시절엔 1번도 나가지 못한 [[올스타전]]에도 4번이나 출장했다. 다만 4번 모두 팬투표로 뽑힌 게 아니라 감독 지명으로 출장했다. 그렇게 킨테츠에서 1991년까지 준수한 활약을 이어갔지만 만 40세 시즌이었던 1992년에 노쇠화에 따른 극도의 성적 부진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 해 대망의 통산 2000안타, 300희생타를 달성하며 [[명구회]]에 가입하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전력 외 통보를 받으며 현역 커리어를 끝마쳤다. 통산 성적은 '''2076시합 출장, [[타율]] .291/[[OPS]] .737, 2038안타 88홈런 680타점 165도루 300희생타'''이며, 수상 기록으로는 '''1987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1989년 일본시리즈]] 감투선수상 및 [[골든글러브(일본프로야구)|골든글러브]] 1회, [[베스트나인]] 4회 수상''' 경력이 있다. 이 중 통산 300희생타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5위이다. == 지도자 경력 == 은퇴 후 해설가/평론가로 활동하다가 1994년, 당시 감독이자 긴테츠 시절의 은사 [[오기 아키라]]의 부탁으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타격 코치로 취임했고, 후에 종합 코치와 2군 감독을 맡았다. 오릭스 선수였던 사토 가즈히로와 [[스즈키 이치로]]의 등록명을 "펀치"와 "이치로"로 각각 변경하도록 고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치로의 타격 지도를 맡으면서 이치로가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로 우뚝서는데 기여했고 1995년과 1996년의 리그 우승, 1996년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오기와 함께했다. 그 후 오기가 2001년 성적부진으로 물러나면서 같이 오릭스를 떠나게 된다. 그 후 2003년부터 2년간 [[오 사다하루]] 감독이 이끌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타격 코치를 맡아 [[2003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다이에에 있으면서 [[이구치 타다히토]], [[마츠나카 노부히코]], [[조지마 겐지]], [[페드로 발데스]]의 '''100타점 4인방'''이 이끄는 '다이하드 타선'을 완성했으며, 2003년 다이에의 '''팀타율 .297'''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 기록으로 남았다. 2005년 [[오기 아키라]] 감독을 따라 [[오릭스 버팔로즈]]의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로 오릭스에 복귀했지만, 2006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다시 호크스로 돌아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지만, 2년간 타선의 타격성적이 저조하면서 해임되었다. 이후 2010년부터는 3년간 오릭스에서 2군 감독을 역임(2012년에는 타격코치도 겸임)했다. 2013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타격코치로 이적하여 [[마루 요시히로]], [[키쿠치 료스케]] 등의 신진 강타자들을 육성했으나 2015년 팀의 전반적인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코치직에서 물러난 이후엔 야구 해설자 및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다시 2019년에 호크스 2군 타격 코치로 복귀하여 2년 간 코치를 역임했다. == 여담 == [[파일:external/cdn.snsimg.carview.co.jp/fc18ff16ae.jpg]] 딸들이 미인이다. 장녀는 2011년 미스 일본 미스 기모노에 선정되었으며, 3녀는 2012년 미스 일본 그랑프리에 선정되었다. 두 명 모두 모델로 활약.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1952년 출생]][[분류:히가시나리구 출신 인물]][[분류:PL학원고등학교 출신]][[분류:호세이대학 출신]][[분류:명구회 멤버]][[분류:일본으로 귀화한 인물]][[분류:1975년 데뷔]][[분류:1992년 은퇴]][[분류:우투좌타]][[분류:내야수]][[분류:외야수]][[분류: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은퇴, 이적]][[분류: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은퇴, 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