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bd58f 0%, #ebd58f 20%, #ebd58f 80%, #ebd58f);" '''{{{#813525 제133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813525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br]{{{+1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br]Ἀρσένιος Ἀυτωρειανός | Arsenius Autorianus}}}'''}}}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rsenios-autoreianos.jpg|width=100%]]}}} || ||<|2> '''출생''' ||[[1200년]] 경 || ||[[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2> '''사망''' ||[[1273년]] [[9월 30일]] (향년 73세) || ||[[로마 제국]] 마르마라 제도 || || '''종교''' ||[[기독교]] || || '''직업''' ||[[성직자]]([[총대주교]])|| ||<|2> '''재임 기간''' ||<#e7e7e7,#1f2023>제133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 ||[[1255년]] ~ [[1259년]][br][[1261년]] [[8월]] ~ [[1265년]] [[5월]]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 133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사후 [[정교회]]로부터 [[성인(기독교)|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아르세니오스 분열]]의 주역이다. == 생애 == [[1200년]]경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아우토리아노이 가문의 일원으로 출생했다. 본래 이름은 요르요스였다. 아버지 테오도로스는 드라마 테마의 재판관이었고, 어머니는 역시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인 이리니 카마테라였다. 부친은 말년에 '아르세니오스'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부친의 전례를 따라 역시 수도자가 되어 게나디오스로 개명하였고, 부친이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처음에는 [[니케아]]의 수도자였고, 이후에는 [[아토스 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1255년]] [[테오도로스 2세]] 황제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 선임되었다. [[1258년]] 8월 18일 [[테오도로스 2세]]가 사망한 뒤, 아들 [[요안니스 4세]]가 제위에 올랐다. 아직 8살밖에 안 되었기에, 요르요스 무잘론과 형제들이 [[섭정]]하였다. 그러나 9일 뒤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열린 황제 추도식 때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잘론과 그의 형제 1명을 주제단에서 살해했다. 귀족들은 뒤이어 테오도로스 2세에게 심한 견제를 받아 [[감옥]]에 갇혀 있던 [[미하일 8세|미하일 팔레올로고스]]를 석방시킨 뒤 섭정을 대신 맡게 했다. 아르세니오스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많이 껄끄러웠을 것이다. 1257년 미하일이 500명 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침략에 맞서 분전했지만, 이피로스군이 테살로니카 성문에 이르는 걸 허용했다는 이유로 니케아에 소환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미하일에게 [[파문]]을 선고한 바 있었다. 그러니 귀족들이 미하일을 구출한 뒤 섭정에 선출했을 때 입장이 난처했을 것이다. 미하일은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국유지를 빈농에게 하사해 [[로마인|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여론은 그의 편이 되었고, 아르세니오스는 파문을 취소했다. [[1259년]] 1월, 미하일은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어 [[공치제|공동황제]]가 되기로 했다. 아르세니오스는 요안니스 4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요안니스와 미하일이 상호 서약을 맺어서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관식]]을 치를 때 요안니스 4세가 먼저 즉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2명의 고위 [[성직자]]를 제외한 [[주교]]들은 미하일이 먼저 대관식을 치를 권리가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아르세니오스는 미하일과 아내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에게 먼저 왕관을 씌웠고, 뒤이어 요안니스 4세에게 특별한 머리 장식을 씌웠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승복할 수 없었던 그는 파스카시오스 수도원으로 들어간 뒤 총대주교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고, 니키포로스 2세가 그를 대신하여 세계총대주교를 맡았다. [[1261년]] [[제1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후, 미하일 8세는 아르세니오스에게 세계 총대주교에 복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고, 1261년 8월 15일 미하일과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의 대관식을 집전했다. 미하일은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아내 테오도라를 내쫓고 [[요안니스 3세]]의 미망인이자 시칠리아 국왕 [[만프레디]]의 누이인 [[호엔슈타우펜의 안나]]를 새 황후로 삼으려 하였다. 테오도라는 아르세니오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미하일은 아르세니오스의 압력을 받자 계획을 포기하고, 1261년 12월 안나가 시칠리아로 가도록 하였다. 1261년 12월 25일, 미하일은 이제 11살이 된 요안니스 4세를 실명형에 처한 뒤 [[비티니아]]의 마르마라 해 디키비제 요새에 감금했다. 아르세니오스는 이에 분노하여 미하일을 파문했다. 미하일이 파문을 거두어 달라 청하자, 그는 [[알렉시오스 1세]]가 쿠데타로 제위를 차지한 뒤 거친 옷을 입고 맨바닥에서 자며 40일 동안 참회했던 것처럼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가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자들과 결탁했다는 참언을 믿고 요구를 거부했고, 두 사람은 4년간 대립했다. 미하일은 [[교황]]에게 항소를 하겠다고 위협하며 파문을 철회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자, 1265년 5월 공의회를 소집한 뒤 아르세니오스를 폐위하고 프로코네소스 섬으로 유배했다. 그는 그곳에서 1273년 9월 30일에 사망했다. 미하일의 이같은 조치에 수많은 성직자와 평신도가 반발하였고, 정교회와 동로마 제국은 [[1310년]]까지 지속된 [[아르세니오스 분열]]에 시달려야 했다. [[1284년]] 아르세니오스의 관이 프로코네소스 섬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야 소피아]] 성당으로 옮겨졌고, 정교회는 그를 시성했다. 축일은 10월 28일이다. [[분류: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동로마 제국)]][[분류:1200년 출생]][[분류:1273년 사망]][[분류:정교회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