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세습친왕가)] ---- ||<-2> '''{{{#dca600 {{{+1 아리스가와 궁가}}}[br]有栖川宮家}}}''' || |||| [[파일:아리스가와노미야.png|width=200]] || || '''본가''' ||[[일본 황실|황실]](皇室) || || '''가조''' ||다카마쓰노미야 요시히토 친왕[br](高松宮好仁親王) || || '''종별''' ||[[세습친왕가]] (世襲親王家) || || '''출신지''' ||[[야마시로|야마시로국]] [[교토]] (山城国京都) || ||<|2> '''근거지''' ||[[도쿄부]] [[도쿄도]] 코지마치구 [[카스미가세키]] || ||[[효고현]] 아카시군 타루미촌 || || '''당주''' ||'''단절''' || ||<#FEF3D9>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Arisugawanomiya_takahito.jpg|width=100%]]}}} ||<#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Taruhito_Arisugawanomiya_2.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Arisugawa_Takahito.jpg|width=100%]]}}} || || '''8대 당주 다카히토 친왕''' || '''9대 당주 다루히토 친왕''' || '''10대 당주 다케히토 친왕'''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세습친왕가. [[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세습친왕가]] 네 가문 중 세 번째로, 1625년에 창설되었으나 1923년에 단절되었다. == 성립과 소멸 == 1625년 제107대 [[고요제이 덴노]](後陽成天皇)의 7남 [[요시히토]](好仁) [[친왕]]이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를 창설한 것이 가문의 시초이다. 궁가([[미야케#s-3]])의 이름은 요시히토 친왕의 할머니가 기거하던 건물의 이름인 다카쓰노덴(高松殿)에서 따왔다. 초대 당주였던 요시히토에게 자식이 없어서 조카인 나가히토(良仁) 친왕[* 제108대 [[고미즈노오 덴노]](後水尾天皇)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고, 그가 2대 당주가 되면서 궁가의 이름도 '''하나마치노미야'''(花町宮)로 변경되었다. 나가히토 친왕은 제111대 [[고사이 덴노]](後西天皇)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는 뒷날 제112대 [[레이겐 덴노]](霊元天皇)가 되는 사토히토(識仁) 친왕이 너무 어려서 땜빵으로 맡은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나가히토 친왕이 천황으로 즉위했지만 아들 유키히토(幸仁) 친왕은 차기 [[천황]]이 될 수 없었고 궁가의 당주가 되는 데 그쳐야 했다. 3대 당주가 된 유키히토 친왕은 다시 궁가의 이름을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로 바꾸었다. 궁가 명칭의 유래, 변경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교토]]에 [[아리스가와역|아리스가와(有栖川)]]라는 지명이 있으므로 연관이 있는 듯하다. 이후 유키히토 친왕의 아들인 다다히토(正仁) 친왕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서, [[레이겐 덴노]]의 17남 요리히토(職仁) 친왕이 아리스가와 궁가의 5대 당주가 되었고 이후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었다. 아리스가와노미야의 위상은 상당히 높았다. 특히 당시 직황족이 줄줄이 황자들이 요절하고 줄타기로 천황을 계승하며, [[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의 죽음으로 간인노미야가 단절되면서 [[고메이 덴노]] 시기와 [[메이지 덴노]] 시기에는 계승 순위가 1~2위이던 시기가 있었을 정도였다. 8대 당주 다카히토(幟仁) 친왕과 9대 당주 다루히토(熾仁) 친왕이 특히 그러했다. 직궁가에는 [[황태자]]를 제외하고 장성한 아들이 없다 보니, 천황 자리가 방계 황족에게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다. [[후시미노미야]] 계통이 대부분인 방계 황족 가운데서 유독 아리스가와노미야만이 [[레이겐 덴노]]의 황통이라 부계로 따졌을 때, 다카히토 친왕 기준으로 [[메이지 덴노]]와 12촌으로 가장 가까웠다. 이때문에 메이지 덴노도 아리스가와노미야에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다루히토 친왕이 자식이 없자 [[신적강하]] 예정이었던 다케히토(威仁)를 차기 친왕으로 지명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으며, 막 10대 당주가 된 다케히토 친왕을 1899년부터 1903년까지 훗날 다이쇼 덴노가 되는 요시히토 황태자의 교육담당으로 임명했다.[* 동양권의 태자/세자 교육담당이 그러하듯 일본 역시도 보통 황태자의 교육담당은 문관을 임명했는데, 이때 당시 다케히토 친왕은 해군 대좌였다. 하지만 다케히토 친왕은 [[영국 해군]] 전투함에서 1년간 근무하고, 영국해군대학교에 3년 반 동안 유학하는 등 당대 황족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해외 유학파이기도 했었기에 러시아 황태자의 방일때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후계자 다네히토(栽仁) 왕이 [[일본해군병학교]] 생도 시절 [[맹장염]]으로 요절하고 만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구《[[황실전범]]》 시행으로 친왕가에 양자를 들이는 것도 금지되어 단절이 확정되었다. 마지막 당주였던 다케히토 친왕이 1913년에 별세[* 1909년부터 폐결핵에 걸려서 [[후쿠시마현]]에 위치한 별저에서 지냈었다.]한 뒤에는 다케히토 친왕비 야스코(慰子)가 궁가의 당주로 대우받았고, 1923년 야스코가 죽으면서 아리스가와노미야는 정식으로 단절되었다. [[다이쇼 덴노]]는 아리스가와노미야가 사라지는 걸 안타깝게 생각해서, 자신의 3남인 [[노부히토|데루노미야 노부히토]](光宮 宣仁) 친왕으로 하여금 원래의 명칭인 다카마쓰노미야의 이름으로 아리스가와노미야를 계승토록 했다. 또한 [[노부히토]] 친왕은 훗날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마지막 당주였던 다케히토 친왕의 외손녀인 [[도쿠가와 키쿠코]][*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친손녀이기도 하다.]와 결혼했다. 1889년에 제정된 《황실전범》[* 2차 대전 패전 이후 대대적으로 개선한 《[[황실전범]]》과 구분하기 위하여 구《황실전범》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신《황실전범》도 1947년 세습친왕가 및 이왕족, [[화족]](귀족)의 폐지에 따른 관련 내용 삭제 및 수정 이외에는 구《황실전범》과 다를 바 없다.]상 [[천황]]의 자식은 궁가의 양자로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구《황실전범》 42조 皇族ハ養子ヲ為スコトヲ得ス. 즉, 황족 신분으로 있는 한 양자를 들일 수도 없고, 양자로 들어갈 수도 없다는 말. 참고로 현행 《황실전범》 9조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궁가를 창설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제사 및 재산을 계승했다. 따라서 [[노부히토]] 친왕은 작은 형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보다 먼저 궁가의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노부히토]] 친왕과 키쿠코 비가 자녀를 낳지 못하여, 다카마쓰노미야도 지금은 단절되었다. == 역대 당주 == || 대수 || 당주 || 생몰년 || || 1대 ||요시히토(好仁) || 1603~1638 || || 2대 ||나가히토(良仁)[* 111대 [[고사이 덴노]](後西天皇)로 즉위했다] || 1638~1685 || || 3대 ||유키히토(幸仁) || 1656~1699 || || 4대 ||다다히토(正仁) || 1694~1716 || || 5대 ||요리히토(職仁) || 1713~1769 || || 6대 ||오리히토(織仁)[*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외할아버지.] || 1754~1820 || || 7대 ||츠나히토(韶仁) || 1785~1845 || || 8대 ||다카히토(幟仁) || 1812~1886 || || 9대 ||다루히토(熾仁)[* [[닌코 덴노]]의 딸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 혼담은 깨지고,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은 [[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에게 시집갔다. 1877년 [[서남전쟁]]에서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 1835~1895 || || 10대 ||다케히토(威仁)[* 차녀 미에코(實枝子) 여왕만이 살아남아 도쿠가와 가문에 출가하여 [[도쿠가와 키쿠코]]를 낳았고, 키쿠코는 [[다이쇼 덴노]]의 3남인 [[노부히토]] 친왕과 결혼했으나 자녀를 낳지는 못했다.]|| 1862~1913 || == 기타 == * 아리스가와노미야에 가전되는 특유의 붓글씨 서체인 '''아리스가와류'''(有栖川流)가 있다. 이 [[서예|서법]]은 궁가([[미야케#s-3]]) 내에서 대대로 전해져왔으며, 다케히토 친왕의 외손녀인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를 통해 지금은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인 [[후미히토]] 친왕이 1990년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하면서 창설된 [[미야케#s-3]](황족 가문). 현재 구성원은 후미히토 친왕, 키코 비, 차녀 [[카코 공주]], 장남 [[히사히토]] 친왕이다(총 4명).] 가문에서 보유하고 있다. 자녀를 낳지 못한 키쿠코 비는 조카 [[아키히토]] 황태자의 둘째(차남)인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에게 이 서법을 가르쳤다. 어린 [[후미히토]] 친왕은 교본에 없는 글자를 질문하는 등 작은 할머니 키쿠코 비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작은 할머니와 조카손자가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키쿠코 비]]는 [[후미히토]] 친왕과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 [[아키히토]] 덴노의 2남 1녀 중 막내]를 손주처럼 귀여워했다. 사야코 공주는 키쿠코 비가 사망하던 해인 2004년에 약혼했는데, 키쿠코 비는 죽음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사야코 공주의 약혼 및 관련 소식들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 황실]]에 남자아이가 없고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외동딸]] [[아이코 공주]]만 있던 당시, 키쿠코 비는 "여자의 [[천황]] 계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발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보수파들은 '키쿠코 비는 여성 천황[* 여성의 몸으로 천황위에 오르는 것.]을 찬성했지, 여계 천황[* 여성 천황의 자손들이 뒤를 이어 천황이 되는 것.]를 찬성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키쿠코 비]]가 사망하고 2년 후인 2006년에 [[키코 비]]가 [[고명아들]]인 [[히사히토]] 친왕을 낳으면서, 여성 천황이나 여계 천황 이야기는 잠잠해졌다. * 9대 당주 다루히토 친왕은 <[[걸판]]>의 배경이 된 [[이바라키현]] 오아라이(大洗)에 있는 오아라이 이소사키(大洗磯前) 신사의 제2 도리이에 현판을 쓰기도 했다. 이 도리이는 신사의 본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시작 부분에 있는데, <[[걸장판]]>에서도 현판은 나오지 않지만 해당 도리이가 묘사되기도 했다. 아래는 해당 현판의 사진. 아리스가와류 서체가 어떠한지 구경할 수 있다. [[파일:external/blogimg.goo.ne.jp/f606072dafc65b9f5d245b9b7ca319e1.jpg]] * 10대 당주 다케히토 친왕은 황실 외교에 자주 참여했는데, [[니콜라이 2세]]가 황태자 시절, 일본 방문시 접대역을 맡았다가 [[오쓰 사건]]을 겪기도 했으며, 1907년 [[다이쇼 덴노|요시히토 황태자]]가 방한했을 때 수행역이 되어 한국에 와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rown_Prince_Yoshihito_and_Crown_Prince_Lee_Eun_1907.jpg|width=200]][* 왼쪽부터 [[다이쇼 덴노|요시히토 황태자]], [[영친왕]], 다케히토 친왕] *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궁가인 데다가, 이름이 주는 느낌이 서구적인 느낌을 주는지[* 아리스(アリス)=앨리스(Alice). 심지어 다케히토 친왕은 생긴 것마저 서구적으로 생겼다.~~진짜 미남이다~~ 물론 실제 아리스는 외국어나 외래어가 아니라 정상적인 일본 한자어로, "아리"는 아리가토할때 그 아리(有)다.] 주인공 이름을 이 궁가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도 그 예시이다. * 가끔 이 궁가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사기 사건이 벌어진다. 아래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경우이다. == 아리스가와노미야 [[사칭]] 사건 == 2003년 4월에 일어난 황족 사칭 사건이다. 아리스가와 궁가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자가 가짜 [[결혼식]]을 올리고, 하객들에게 축의금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뜯어낸 사기 사건이었다. 범인인 기타노 야스유키(北野康行, 당시 41세)는 아리스가와 사토히토(有栖川 識仁)라는 [[가명]]으로 '아리스가와노미야 기념사업단'의 '''총재'''를 칭했다. 더불어 자칭 '''"[[전하(호칭)|전하]]"'''를 일컬었다. 그리고 공범인 사카모토 하루미(坂本晴美, 당시 45세)는 비(妃) [[전하(호칭)|전하]]를 자칭했다. 이들 둘은 애당초 혼인관계에 있지도 않은 사이로서, 일본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일본 황실|황실]]의 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악용했다. [[파일:external/f.st-hatena.com/20150804145900.jpg]] 특히 역대 당주들의 이름을 보면 통자인 '''히토'''(仁) 외에 모두 이름에 '''戈'''(창 과)가 들어가는 한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제5대 요리히토 친왕 이후로 제7대 츠나히토 친왕을 제외하면.] 사토히토(識仁)는 이 관례에 따라 지은 이름인데다가, 자칭 '전하'께서는 [[노부히토]](宣仁) 친왕의 사생아임을 주장했는데, [[교토]]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생전의 [[노부히토]] 친왕으로부터 아들임을 [[인지(친족법)|인지]]받고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했다. 서자이지만 친왕의 아들이니 [[미야고]] 다카마쓰 대신 아리스가와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고 나름 치밀한 이유를 제시했으니, 황실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속아 넘어갔을 정도였다. 여기에 극우단체까지 합세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꼴통극우단체인 일본청년사에서는 '사토히토'를 '''명예총재'''로 추대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임기 만료로 퇴임했다.'는 식으로 어물쩡 넘어갔다.] 이들은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여기저기 청첩장을 돌렸는데, 여기에 낚인 사람들 가운데는 꽤 유명한 재계 인사 및 연예인들도 섞여 있었다. 물론 가 보고 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 수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본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면서 범죄가 적발되었다. 문제는 이때 [[키쿠코 비]]가 아직 살아 있었고, 그로 인해 아리스가와노미야를 사실상 계승한 다카마쓰노미야가 존재했으므로, 사토히토에게는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제사를 지낼 정통성이 없었다. 게다가 현행 《황실전범》은 '''적계 적출의 황자 및 황손에게만 계승권을 인정했다. 설령 그가 진짜 [[노부히토]]의 [[사생아]]였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낚인 사람들만 바보~~ 한국에서는 [[MBC]]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을 방송한 적이 있다. 이들 사기범들은 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후 만기출소한 상태인데, 아직도 자신을 '''[[전하(호칭)|전하]]'''라고 부르며 조직 재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류의 '황족 사칭' 사기범들 가운데서는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한편, 아리스가와 궁가의 당주를 주장하는 자칭 '아리스가와 치카히토'(有栖川 親仁)라는 작자도 있다. [[분류:세습친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