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FF '''아바스 왕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칼리파국)] [include(틀:이라크의 역사)] [include(틀:이란의 역사)] [include(틀:시리아의 역사)] [include(틀:이집트의 역사)] [include(틀:파키스탄의 역사)] [include(틀:아프가니스탄의 역사)] [include(틀:요르단의 역사)] [include(틀:아르메니아의 역사)] [include(틀:아제르바이잔의 역사)] [include(틀:투르크메니스탄의 역사)] [include(틀:아라비아의 역사/중세 이후)] [include(틀:튀니지의 역사)] [include(틀:리비아의 역사)] [include(틀:알제리의 역사)] [include(틀:우즈베키스탄의 역사)] [include(틀:조지아의 역사)] [include(틀:타지키스탄의 역사)] [include(틀:키르기스스탄의 역사)] [include(틀: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include(틀:북캅카스의 역사)]}}} || ---- ||<-3> {{{#fff {{{+3 '''아바스 칼리파국'''}}}[br]{{{+1 '''ٱلْخِلافَةُ ٱلْعَبَّاسِيَّة''' }}} [br]{{{-1 '''al-Khilāfatu al-ʿAbbāsiyyah''' }}} }}} || ||<:><-4> [[파일:검은 깃발.svg|width=50%]] || ||<-4><:><#000000> {{{#fff '''국기'''}}}[* 검은색 한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당나라]] 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도 '흑의대식'(黑衣大食)이라고 언급되었다. 반면 아바스 왕조 이전에 이슬람 세계를 지배했던 [[우마이야 왕조]]는 국기가 온통 하얀 색으로 그려진 모습이었다.] || ||<-6>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Abbasids850.png|width=100%]]}}}|| ||<-6><:> {{{#000,#ddd {{{-1 서기 9세기경의 최대 강역}}}}}} || ||<-6><:> '''{{{#fff [[750년|{{{#fff 750}}}]] ~ [[1258년|{{{#fff 1258}}}]]}}}'''[br]'''{{{#fff [[1261년|{{{#fff 1261}}}]] ~ [[1517년|{{{#fff 1517}}}]]}}}''' || ||<#000000><-2> '''{{{#fff 성립 이전}}}''' ||<#000000> '''{{{#fff 멸망 이후}}}''' || ||<-2><#C0C0C0><|2> '''[[우마이야 왕조|{{{#fff 우마이야 왕조}}}]]''' ||<#ffcc33> '''[[일 칸국|{{{#dd0000 {{{-3 1258년:}}} 일 칸국}}}]]''' || ||<#e30a17> '''[[오스만 제국|{{{#fff {{{-3 1517년:}}} 오스만 제국}}}]]''' || ||<#000000><:> {{{#fff '''위치'''}}} ||<-2>[[서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 ||<#000000><:> [[수도(행정구역)|{{{#fff '''수도'''}}}]] ||<-2>[[쿠파(도시)|쿠파]] (749년 ~ 752년) [br][[팔루자|안바르]] (752년 ~ 762년) [br]'''[[바그다드]]''' (762년 ~ 796년)[br][[락까]] (796년 ~ 809년)[br][[바그다드]] (809년 ~ 836년)[br]'''[[사마라(이라크)|사마라]]''' (836년 ~ 892년)[br][[바그다드]] (892년 ~ 1258년)[br][[카이로]] (1261년 ~ 1517년) || ||<#000000><:> {{{#fff '''정치체제'''}}} ||<-2>[[전제군주제]] || ||<#000000><:> {{{#fff '''국가원수'''}}} ||<-2>[[칼리파]] || ||<#000000><:> {{{#fff '''주요 군주'''}}} ||<-2>[[알 만수르]](754~775)[br][[하룬 알 라시드]](786~809)[br][[알 마문]](813~833) || ||<#000000><:> [[화폐|{{{#fff '''면적'''}}}]] ||<-2>11,100,000km² || ||<#000000><:> {{{#fff '''민족'''}}} ||<-2>[[아랍인]][br][[페르시아인]][br][[베르베르인]][br]아람인[br][[이집트인]][br][[소그드인]][br][[튀르크인]][br][[쿠르드인]][br][[유대인]] || ||<#000000><:> [[언어|{{{#fff '''언어'''}}}]] ||<-2>[[아랍어]](공용어)[br][[페르시아어]][br][[아람어]][br][[쿠르드어]][br][[콥트어]][br][[베르베르어]][br][[소그드어]] || ||<#000000><:> [[종교|{{{#fff '''종교'''}}}]] ||<-2>[[이슬람]] [[수니파]] || ||<#000000><:> [[화폐|{{{#fff '''통화'''}}}]] ||<-2>[[디나르]] || ||<:><-2> {{{#FFF '''언어별 명칭'''}}} || ||<|3> [[아랍어]] || الدولة العباسية (앗 다울라툴 압바시야, Ad-dawlat-ul Abbasiya) || || الخلافة العباسية (알 칼리파툴 압바시야, Al-khalifat-ul abbasiya) || || العباسيون (알 압바시야둔, Al-abbasiyadun) || || [[페르시아어]] || خلافت عباسی || || [[영어]] || Abbasid Caliphate || [목차] [clearfix] == 개요 == [[750년]]부터 [[1517년]]까지 존재한 [[이슬람 제국]]. '아바스 칼리파조', 혹은 '압바스 왕조'라고도 부른다. == 소개 == '''[[이슬람 황금기|중세 이슬람의 황금시대]]'''이다.[* 영토는 우마이야 왕조 시절이 좀 더 넓었지만 우마이야 왕조는 급격한 정복의 후유증으로 인해 피정복민의 반란에 시달렸고 정치 불안정도 심해 존속기간도 짧았다.] [[우마이야 왕조]]에 이은 이슬람의 두 번째 세습 제국이며, [[이라크]] 일대가 중심지였다. 이 시기부터 [[페르시아인]]들이 이슬람 세계의 핵심 계층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아바스 왕조가 페르시아인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들의 입김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10세기부터 [[튀르크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9세기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하나피 및 [[무타질라 학파]]가 득세하며 이른바 [[이슬람 황금기]]라 불리는 문화적 번영기를 구가했으나 10세기부터는 시아파 제국들의 융성 및 지방 왕조들의 독립과 함께 쇠락했다. 이후 [[부와이 왕조]], [[셀주크 왕조]]의 꼭두각시가 되어 정치적 실권을 상실했고, 12~13세기에 이라크 일대의 지배력을 회복하며 부흥하는 듯했으나 1258년, [[몽골 제국]]의 [[훌라구 칸]]에게 바그다드가 함락되며 사실상 멸망했다. 이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아바스 칼리파의 친척을 옹립하여 칼리파 계보가 이어졌지만 [[상징적 국가원수]]에 불과했으며 1521년에 카이로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황제 [[셀림 1세]]가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로부터 선양을 받아 완전히 종말을 고하였다. 여러모로 [[이슬람]] 문화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업적을 남긴 왕조로 유명하다. [[칼리파]] [[알 마문]]은 지식 탐구에 관심이 많아 학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지혜의 집]]을 세워 [[바그다드]]를 세계 최고의 경제, 학문 중심으로 발돋움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바그다드는 [[무슬림]], [[그리스도인]], [[유대인]] 등이 공존하는 인구 200만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라는 영예를 누렸으며, 서유럽이 중세와 종교의 암흑기에 잠들어 있을 때 아바스 왕조 치하의 이슬람은 관용적이고 다채로운 문화를 향유했다. 게다가 아바스 왕조의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의 고서들을 죄다 모아 보존해둔 덕분에 유럽에서 실전될 뻔한 [[헬레니즘]] 문명의 지식들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당대 유럽은 [[라틴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로마법 대전]]마저 해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무슬림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대철학자들의 저서를 남겨두지 않았다면 최소한 이들의 저작 몇 권쯤은 충분히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바스 왕조가 고이 모아둔 고대의 지식들은 훗날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찬란한 [[르네상스]]의 바탕이 된다. [[한국사]]에서는 '''[[신라]], [[고려]]와 교류했던 왕조'''로도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중동 관계]] 문서 참조. 다만 세계 최초로 한국이 포함된 세계지도를 작성한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는 아바스 왕조가 아니라 [[무라비트 왕조]] 출신이다.] == 국기 == ||||||
<#000000> {{{#ffffff '''아바스 왕조 국기'''}}} || || [[파일:검은 깃발.svg|width=60%]] || ||<#000000> {{{#ffffff '''흑의대식 (黑衣大食)'''}}} || 아바스 왕조의 국기는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단순한 모양의 국기였다. 원래 선지자 [[무함마드]]는 검은색 깃발과 하얀색 깃발을 사용했는데, 훗날 '멸망의 날이 오면 [[몽골제국|검은 깃발을 앞세운 군대]]가 [[호라산]]에서 몰려올 것이다'라는 예언을 남겼다. 이 예언에서 모티브를 따온 아바스 부족이 [[우마이야 왕조]]를 상대로 혁명을 일으킬 때 검은색 깃발을 내세운 것이다. 특히 우마이야 왕조는 아예 통째로 하얀 깃발을 상징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흑백이 눈에 띄게 대비되어보이는 효과도 줄 수 있었다. 눈에 띄는 검은색을 왕조의 상징색으로 삼았던 탓에 아바스 왕조와 맞섰던 세력들은 모두 자기만의 색깔을 내세웠다. 예를 들어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는 자신의 군대를 붉은색으로 치장시켜 아바스 군대와 구분할 수 있도록 했고, [[파티마 왕조]]는 흰색을 상징색으로 삼았다. 특히 파티마 왕조는 유력한 [[시아파]] 왕조였는데, 꽤 오랫동안 [[수니파]] 아바스 왕조와 대립했던 덕분에 후대에 가면 흰색 VS 검은색 구도가 마치 [[시아파]] VS [[수니파]] 구도로 번지게 된다. 시아파 세력들은 아바스 왕조의 검은색 깃발이 무함마드가 예언했던 그 검은 깃발이 전혀 아니라고 비난했는데, 아바스 왕조가 망해 사라진 이후에도 멸망의 날이 오지 않자 수니파 세력 역시 아바스 왕조의 검은 깃발은 무함마드가 예언했던 그 깃발이 아니라고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고.[*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말한 그 검은 깃발은 더 클 것이며 단순한 빚깔의 검은색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비무슬림이 보았을 때에는 변명일 뿐이지만 무슬림 입장에서 감히 선지자 무함마드의 예언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아바스 왕조는 이미 오래전에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역사성이 워낙 큰 덕에 검은색은 여전히 범아랍권 국가의 국기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아랍 국가들의 국기에서 주로 등장하는 초록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을 묶어서 '범아랍색'이라고 부르는데, 이 중에서 검은색이 바로 이 아바스 왕조에게서 왔다. [[아랍 내셔널리즘|범아랍주의]]의 상징색들 중 하나가 마찬가지로 검은색이기도 하며, 안 좋은 쪽이긴 하지만 테러단체 [[ISIS]]의 깃발이 검은색인 것 역시 아바스 왕조처럼 아랍 전체를 아울러 칼리프 체제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ISIS 외에도 일부 체첸 그룹, 무슬림 극단주의 단체들도 검정 깃발을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면 대부분이 이 아바스 칼리파 체제를 계승하고 선지자 무함마드가 예언한 그 '검은 군대'가 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보면 된다. == [[아바스 왕조/역사|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아바스 왕조/역사)] == 군사 == [[파일:2926167ccb46f1ee8ecc1b70ae830aa0.jpg]] 아바스 군대의 사령관들은 대다수가 아랍계 출신이었다. 허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페르시아인]]이었고, 상당한 비율의 장교들이 [[호라산]]이나 [[트란스옥시아나]], [[아제르바이잔]] 등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페르시아인들 외에도 다양한 민족과 부족민들이 아바스 군대 아래에서 종군했다. 이렇게 민족적 다양성이 풍부한 군대였기 때문에 아바스 지도자들은 그 무엇보다 군대 내부의 균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썼다. 아바스 왕조 최대 개국공신들 중 하나인 [[아부 무슬림]]은 부족이나 민족 비율이 아니라 무조건 병사의 출신지에 따라서 군대를 조직했고, 최대한 부족민들끼리 뭉쳐서 군대 내에 집단을 이루는 걸 경계하고 방해했다. 상비군의 양은 딱히 많지 않았다. '카이드'라고 불리는 지방의 자치 토후들에게 군 소집령이 떨어지면 그 토후들이 알아서 병사들을 불러모으고 중앙으로 집결하는 방법이었다. 아바스 왕조의 주력은 [[호라산]]의 보병과 쿠라사니야의 중기병대였는데, 특히 기병대가 크게 우대받았다. [[알 무스타심]] 시대 들어서는 튀르크계 노예 병사들을 사들여 개인 근위대로 양성함으로써 칼리파의 영향력 증대에 나서기도 했다. 원래 아랍인 병사들에게 줄 봉급을 빼앗아와 이 튀르크계 병사들에게 대신 나누어주었고 그 덕에 튀르크계 병사들의 충성심은 꽤나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튀르크계 병사들은 오히려 칼리파와 아바스 왕조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촉매가 되고야 만다. 이들은 일반 장소가 아니라 머나먼 국경지대에서 징집되었는데, 이때문에 아바스 왕조의 다른 사회계급과 완전히 분리된 채로 자랐던 탓에 자기들끼리만 교류하며 힘을 길렀던 것이다. 나중에 아바스 왕조가 쇠락하자 이들은 역으로 칼리파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이 되고야 만다. 마치 [[게르만족]]을 받아들였던 [[서로마 제국]]과 경우가 비슷했다. 정규군이 없었다지만 군력 자체가 약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아바스 왕조는 [[이집트]], [[시리아]], [[아라비아 반도]], [[페르시아]], [[이라크]] 등 광활한 영토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고 약해빠진 군사력으로는 이 영토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 것이다. 전성기 시절의 아바스 칼리파는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12만 5천 명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을 [[동로마 제국]]과의 국경지대, [[바그다드]], [[메디나]], [[다마스쿠스]] 등 군사적 요충지에 집결시킬 역량이 있었다. 게다가 상비군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아서 칼리파로부터 직접 봉급을 받는 정예 상비군과 특수부대들도 소수나마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전성기 시절의 이야기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바스 왕조의 군사력은 크게 쪼그라든다. 군복은 통일되지 않았다. 애초에 중세 시절에 군복이 통일되어 있다면 그게 더 희한한 일이었다. 기병들은 철로 된 투구를 썼는데, 중세 서유럽의 기사들처럼 얼굴에서 노출된 부분은 코 끝과 눈 앞의 작은 구멍 뿐이었다. 군모를 살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은 그냥 [[터번]]을 두르거나 천쪼가리를 묶고 다니기도 했다. 보병은 장창과 검, 호신용 짧은 창을 지급받았다. [[투석기]], 숫양 머리의 [[공성추]], 사다리, 갈고리 등 다양한 공성 무기를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장 잘 쓰던 무기는 '만자니크'라고 있는데, 서유럽으로 치면 투석기나 다름없는 무기로 거대한 돌을 날려 성벽을 부수는 데 요긴하게 써먹었다. [[하룬 알 라시드]] 시대에는 [[수류탄]]을 사용했다고도 하고, [[낙타]]가 끄는 야전병원이나 구급 시설을 끌고 다니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바스 군대 병종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게 아마 '마가리바(المغاربة)'다. 마가리바는 아랍어로 '서양인'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아는 그 [[백인종]]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인, [[베르베르인]], 동아프리카의 흑인, 아랍계 부족민 등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된 군대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알 무스타심]]이 이집트 총독으로 근무할 적에 처음 구상했으며 이후 그가 칼리파직에 오르자 크게 규모를 확충했다. 주로 [[기병]]에 종사했으며 자유인들과 노예가 섞여 있었다. 노예가 섞여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병종들에 비해서 대우는 확연히 낮았다. 튀르크계 병사들과 근위대들이 보통 하루에 2디르함 씩을 받았던 반면에 마가리바 병사들은 하루에 1디르함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돈을 받고 살았다. 마가리바 외에도 국경지대에서 온 이들로 구성된 '파라기나',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온 '우슈루사니야', [[호라산]]에서 온 '샤키리야' 등 다양한 상비군들이 있었다. 개중 가장 권력이 강했던 건 당연히 튀르크계 병사들이었고, 그 다음이 샤키리야, 우슈루사니야, 파라기나 순서였다. 이들 모두가 860년대의 혼란기인 '사마라의 혼란기' 시대에 칼리파를 좌지우지하며 한자리씩 해먹었다. == [[이슬람 황금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이슬람 황금기)] [[파일:joseph-feely-z-houses-of-wisdom.jpg]] >'''학자의 피는 순교자의 피보다도 신성하다''' > >---- > ''- 아바스 왕조 시대의 격언'' 아바스 왕조의 통치기는 '''이슬람 역사상 최고의 문화적, 사회적 황금기'''였다. 이를 [[이슬람 황금기]]라고 부르는데, 보통 8세기 경 아바스 왕조의 [[하룬 알 라시드]]의 즉위로 시작되어 1258년 [[몽골 제국]]이 [[바그다드]]를 초토화시키기 직전까지 무려 500여 년 동안 지속됐다. 당시 무슬림들은 심지어 [[이단]]의 지식이라 할지라도 유용하고 실용적이다 싶으면 죄다 받아들여 기록으로 남겼다. 이슬람권은 그리스, 로마의 유산을 그대로 흡수했고 이는 훗날 [[르네상스]]의 바탕이 되어주기도 했다. 지금과는 달리 대단히 관용적인 사회였는데, 심지어 '''[[이신론]]을 주장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바그다드에서는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마음껏 활동했으며 [[아르키메데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의 이교도 학자들 역시 거리낌없이 받아들여졌다. 이슬람 황금기의 초기에는 [[동로마 제국]]이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피해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으며 서유럽은 [[바이킹]]의 침략이나 잦은 전쟁으로 피로해진 상태였다. 문명세계의 또다른 축인 [[중국]] 역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당나라]] 말기 ~ [[5대 10국]] 시기라 정복전쟁과 내전이 날마다 일어나며 나라가 피폐해지고 있었던 것. 그래서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 초기까지는 가히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지방이라 불릴 정도였다.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는 정말 '''세계의 수도'''였다. 바그다드는 당대 세계 최대 도시였을 뿐더러 전성기 시절 그 인구가 '''200만 명'''이 넘어갔고 온 누리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바글바글거리는 문화와 예술의 교차로였다. 아바스 칼리파 [[알 마문]]은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을 세워 고전들을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번역하도록 시켰다. 지혜와 학문을 후원하는 건 고귀한 일이라는 인식이 퍼져있었으며 상류층들은 학문 연구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했기 때문.[* 지혜의 집에서는 수많은 고문서 번역 프로젝트를 가동했는데, 개중 한 프로젝트에 쓰인 예산만 해도 당시 영국의 왕립의학위원회 예산 2배가 넘어갔다. 게다가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 같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은 현대로 따지면 최상급 프로 운동선수에 비견된 만한 엄청난 연봉을 받았다.] 이러한 풍조에 힘입어 설립된 지혜의 집에서는 번역 업무만 한 게 아니라서 학문을 연구하고 기록으로 보존하기도 했다. [[연금술]]을 연구하며 중세 [[화학]]을 집대성했고 의학, 철학, 건축학, 생물학, 신학 등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페르시아 시대를 거치며 축적된 지식을 집대성한 학문의 장이라 봐도 무방했다. [[알코올]], [[알칼리]] 등의 화학 용어가 이시기 아랍권에서 유래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아바스 왕조의 학문 수준을 짐작 가능하다. === 교육 === [[파일:800px-المدرسة_المستنصرية_في_بغداد_(3).jpg]] 1227년 [[알 무스탄시르]]가 지은 [[바그다드]]의 '무스탄시리야 마드라사'. 바그다드에서 가장 유명하고 거대한 마드라사였고 현재 무스탄시리야 대학교의 전신이다. 아바스 왕조 시대에 배움은 곧 고귀하고 신성한 일이었다. [[쿠란]]과 [[하디스]]에는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 나와있기에 당시 아랍인들은 지식을 쌓아올리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고 한다. 모든 교육은 이슬람계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당시 초등교육은 집이나 [[모스크]]에 딸린 작은 학교에서 [[쿠란]]과 [[아랍어]]를 배우면서 시작했다. 개중에서 일부 재능있어 보이는 학생들은 따로 가려뽑아 쿠란 해석학과 이슬람 법학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대체적으로 쿠란 구절과 해석 암기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스스로 쿠란을 해독하거나 나름의 해석을 덧붙일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가장 뛰어난 학생들은 이슬람 최고의 지식인, '울레마'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초기에는 체계화된 교육 시스템이 부재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지배 계급들이 종교계의 지원을 받기 위해 '마드라사'라는 이름의 고등교육기관들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마드라사는 저명한 학자들이 거주하며 학생들에게 이슬람 법학을 중심으로 의학, 신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들을 가리지 않고 가르쳤던 기관이었다. 물론 마드라사는 교육 과정이 일관적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 학자 마음대로 커리큘럼과 교육 내용을 짰고, 수료라는 개념도 없었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대학]]이라기보다는 [[서당]]에 더 가까운 시스템이었지만 그래도 혁신적인 발명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남성들만 입학이 가능했지만 여성도 비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남자들과 똑같은 과목을 배울 수는 없어서 주로 무함마드의 훈시, [[캘리그라피]], 시 낭송 교육 위주였지만 그래도 여성에 대한 교육 자체가 금지되었던 동시대의 다른 문화권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마드라사는 공식적으론 법학전문기관이었으나 다른 학문들도 전수했던 터라 굳이 법학자가 꿈이 아닌 사람들도 마드라사에서 수업을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보통 마드라사는 [[모스크]]와 [[도서관]], 숙소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기부]]로 재정을 충당했다. 보통 부호들이 자신의 씀씀이를 자랑하고 지식을 증진한다는 명분으로 돈을 기부하면 그 돈으로 선생의 월급을 주고 학생들을 먹여살렸던 것이다. 여러 학문들을 가르쳤는데 [[무함마드]]의 등장 이전에 성립된 고대 철학이나 학문들은 따로 구분해서 가르쳤다. 물론 고대 철학 역시 중시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무함마드 등장 이후의 학문보다는 낮게 취급해서, 공식적으로 가르친다기 보다는 이슬람학을 가리킬 때 밑바탕을 깔아줄 용도로 알려주거나 보조 학문으로 알려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 당시에 성립된 가장 유명한 대학이 [[모로코]]의 '알 카라윈 대학'이다. 859년 설립되어 [[기네스북]]과 [[유네스코]]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유명한데, 덕분에 모로코 최대의 자랑거리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외에 위 사진에 등장한 [[이집트]] [[카이로]]의 '알 이즈하르 모스크' 등도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다만 알 이즈하르 모스크의 경우 [[아바스 왕조]]가 아닌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세우긴 했다.] === 건축 === [[파일:attachment/baghdad.jpg]] 9세기 경 [[바그다드]]의 원형 도시. 중앙에 녹색 돔을 이고 있는 칼리파의 궁전이 있다. 아바스 왕조 시대 지어진 건축물들의 특징을 보면, [[메소포타미아]]와 [[이라크]] 지방의 건축색이 더욱 짙어졌음을 볼 수 있다. [[우마이야 왕조]]를 거꾸러뜨리고 새로 등장한 아바스 왕조의 중심지가 [[이라크]]와 [[바그다드]] 지방이었던 터라 옛 [[사산 왕조]], [[동로마 제국]]의 영향이 훨씬 적어지고 이라크의 색깔이 더욱 강해진 것이었다. 게다가 아바스 왕조가 워낙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다스린 덕에 [[미나레트]], 곡선형 스투코 아치 장식 등이 아랍권, 북아프리카 곳곳으로 빠르게 전파되면서 이슬람 건축학적으로도 나름 의미있는 시대였기도 하다. 870년 이후로 아바스 왕조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위축되긴 하지만 아바스 왕조가 남겨놓은 건축유산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고, 이는 [[이집트]]를 위시한 북아프리카 지방, 그리고 아랍권 대부분에서 독자적으로 건축술이 발전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아바스인들은 보통 도시와 건물들을 지을 때 널찍널찍하고 거대하게 지어댔다. 이라크 지방 자체가 평평하고 거대한 규모의 평야이다보니 지형의 제약없이 마음껏 크기를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말린 진흙 벽돌을 사용해 저렴하고 빠르게 건물을 올리는 방법을 써서 더욱 빠른 시일 내에 도시를 지을 수도 있었다. 도시의 집들은 대부분 2층으로 지었고 1층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약간 땅을 파서 바닥을 땅보다 조금 낮게 만들었다. 위쪽에는 무더운 여름에 더위를 쫒기 위한 시원하게 지었는데, 목재로 천장을 올렸고 평평한 계단식 지붕을 쌓았다. 외관은 딱히 화려하지 않았으나 내부는 굉장히 정교하게 장식했다. 대부분의 집 내부에는 화장실과 냉각 장치가 구비되어 있었으며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해 집들이 죄다 따닥따닥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아바스 왕조가 남긴 가장 유명한 건축 유산들 중 하나가 바로 바그다드의 원형 도시였다. 공식 이름은 '평화의 도시'(مدينة السلام)인데 바그다드의 명실상부한 중심지였으며 [[지혜의 집]]도 이 안에 위치했다. [[알 만수르]]가 762년 8월에 건설을 시작했고 10만 명의 노동자와 장인이 투입되었으며 무려 1,800만 황금 [[디나르]]를 쏟아부어 완성했다고 한다. 반경 약 1km 정도의 원형을 띠고 있어 '원형 도시'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면적은 대략 3제곱킬로미터 정도였다. 도시의 중심에는 칼리팔 궁전, 모스크, 경비본부가 자리했고 그 밖에 귀족들의 사원이나 저택이 세워졌다. 도시에는 총 4개의 문이 있었는데 각각 '쿠파 문', '다마스쿠스 문', '호라산 문', '바스라 문'이라는 이름이 달렸다. 한때는 도시 전체가 금과 꽃으로 장식되어서 굉장히 아름다웠다고. 다만 아바스 왕조의 쇠락과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야 말았고, 현재는 거의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는 수준이다. ||[[파일:001124-MalwiyaMosque-Samerra-IMG_7824-2 (1).jpg|height=280]]||[[파일:حصن_الاخيضر_(3).jpg|height=280]]|| ||사마라의 미나레트 ||알 우카이디르 궁전 내부의 안뜰 회랑 || [[바그다드]]의 원형 도시와 함께 아바스 건축의 금자탑으로 꼽히는 건물이 바로 [[사마라]]의 대모스크다. 848년에 지어져 851년에 완공되었는데 건설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모스크였다. 모스크의 외벽은 구조를 지탱하는 44개의 반원형 탑들과 그 탑들을 잇는 진흙 벽돌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벽에는 총 28개의 창이 뚫렸고 16개의 문이 있다. 내부에는 사방이 아치형 기둥 열주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는데, 지금이야 모두 사라졌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안뜰 한가운데에 대리석 타일로 만들어진 분수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모스크 전체가 금빛과 푸른빛 모자이크 타일로 덮여있었지만 현재는 역시 모두 사라져서 진흙 유적 밖에 안남았다. 모스크의 열주들 역시 볼만한 구경거리였는데, 무려 464개에 달하는 기둥들이 높이 11m에 달하는 높다란 천장을 받치고 있어서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여행객들에게 장대한 느낌을 선사했다고. 사마라의 대모스크가 유명한 이유는 아마 모스크보다는 독특한 모양의 첨탑형 [[미나레트]] 때문일 것이다. '달팽이 첨탑'이라고도 불리는데 마치 계단이 위로 올라가는 나선형 원주 모양 디자인 덕분에 유난히 눈에 띄는 모습이다. [[사암]]으로 지어 아직까지도 보존된 채로 남아있으며 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유별난 모습으로 사마라의 [[랜드마크]]나 다름없게 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에서 파생되었다고도 하고, 다른 사람은 [[사산 왕조]]의 미나르에서 영감을 받았다곤 하는데 사실 어디서 영향받았다 하기 힘들 정도로 모양이 독특해서 확실한 답은 없다. 다만 이라크의 비구한 역사 때문에 이 미나레트 역시 수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2005년 [[이라크 전쟁]] 때 미군에게 폭격을 받아 꼭대기 부분이 날라가기도 했고, 아예 미군 병사들의 저격탑으로 사용되기도 하면서 외관 곳곳에 흠이 많이 가서 현대 [[이라크]] 정부에서 복원했다. 아바스 왕조 시대의 궁전에 대해서는 남은 게 별로 없다. 정궁으로 쓰이던 [[바그다드]]의 중심에 자리한 '황금 문의 궁전'은 이미 오래전에 파괴되어 사라진지 오래고, 그래서 현재 남은 몇 안되는 궁전 중에 그나마 알 우카이디르 궁전이 유명하다. 알 우카이디르 궁전은 775년 요새 겸 궁전으로 세워졌는데, 그 규모는 상당히 거대하지만 정작 칼리프가 사는 주거 구역은 작은 편이다. 초기 사산 왕조나 우마이야 왕조의 건축술을 거의 그대로 따랐는데 총 4개의 문으로 출입이 가능하다. 내부에는 현관 홀, 중앙 안뜰, 현관 반대편 안뜰로 열린 주거 구역 등이 있는데 기둥들이 하나같이 두껍고 거대한 아치들을 받치고 있어 육중하고 무거운 느낌을 준다. 지금이야 저 위의 사진처럼 그냥 단조로운 흙색이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유리나 도자기 조각들을 붙여놓아 색색이 화려했고, 비단이나 향등을 걸어놓기도 했다. [[바그다드]]의 황금 문의 궁전 역시 사이즈만 더 거대할 뿐 내부는 거의 저것과 비슷했다는 말이 있다. === 의복 === ||[[파일:5ef96997bf59d62113054f94660180c4.jpg|height=300]]||[[파일:main-qimg-ef83ff982dc6846ef485f8be0565e98d.webp|height=300]]||[[파일:warriors-of-the-abbasid-caliphate-2.jpg|height=300]]|| |||||| 아바스 왕조 시대 사람들의 옷차림 |||||| 이슬람 발흥 초창기에는 화려한 복식은 곧 죄악이었다. [[무함마드]]가 호화로운 옷을 멀리했고 제 지지자들에게도 지나친 호화를 부리며 자기를 꾸미는 건 죄악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인간의 욕망을 어찌할 순 없었던지 자연스레 아바스 왕조의 옷차림도 갈수록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상류층들의 경우 넘쳐나는 돈으로 멋지고 예쁜 옷을 입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욕구였고, 이슬람 법학자들도 어쩔 수 없이 이를 눈감아주면서 지배층들의 옷차림은 순식간에 미친 듯이 화려해졌다. 더이상 새틴이나 [[비단]]이 경원시당하지 않았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식의 곱고 우아한 복식 스타일이 유행했다. 종교 최고 지도자였던 칼리파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차려입고 다녔는데 특히 [[알 무스타심]]은 고운 새틴을 덧댄 페르시아식 모자를 쓰고 그 위에 터번을 둘러 뽐내기를 좋아했다. 당시 사람들은 여러 겹의 옷과 천을 몸에 둘둘 두르고 다녔다. 주로 양모, 리넨, 비단, 양단 같은 직물들을 사용해서 옷을 지어입었고 그럴만한 돈이 없는 하류 계급들은 그냥 양모나 동물가죽처럼 값싼 재료를 써서 대충 옷을 지어입고 다녔다.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다닐 수록 그 사람의 지위가 높다는 의미였고 때문에 아바스 왕조의 사람들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얇은 옷을 여러 겹 둘러입고 나들이를 다녔다. 여자들의 경우 원단 자체가 빨간 직물들을 제외하곤, 검정색, 녹색, 붉은색, 분홍색 옷은 웬만하면 입지 않았고 주로 사향, 백단향, [[용연향]], [[히아신스]] 등으로 몸에 향을 냈다. 신발은 주로 [[모피]]로 만든 페르시아식 신발을 애용했다. 궁정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애초에 아바스 왕조의 상징색이 검은색이기도 했고, 특히 칼리파 [[알 만수르]]가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라는 의도로 칼리파의 색깔인 검은색을 신하들에게 입기 권유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대 아바스 궁정에 들어가면 죄다 사람들이 시꺼먼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중국]]과 [[동로마 제국]] 사람들은 이걸 보고 신기하게 여겨 아바스인들을 '검은 옷의 사람들'이라 부르기도 했다. 검은색을 주 바탕으로 다른 색의 옷도 보조적으로 겹쳐 입을 수는 있었지만 색 조합을 잘 정해야 했다. 궁궐 안에서 감히 칼리파보다 더 튀는 옷을 입는 건 미친 자나 할 법한 짓거리였고, 검은색과 색 배합이 잘 안 맞는다고 여겨진 밝은 노란색[* 금색은 예외였다.]의 옷은 입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아바스 칼리파들은 금실이나 은실로 꼬아 만든 페르시아식 가운과 소매 앞쪽에 단추가 달린 우아한 카프탄을 입었다. '카프탄'이란 소매가 꽉 끼고 아래는 바닥까지 끌리는 기다란 망토 비슷한 옷인데, 당시 사람들은 이걸 정장처럼 입었다. 멋을 내기 좋아했던 [[알 무크타디르]]는 은실로 만들어 실크로 장식한 카프탄을 입고 다녔으며 그의 아들은 한술 더 떠서 [[동로마 제국]]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값을 주고 사온 카프탄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카프탄 옷은 아바스 왕조의 정복 활동과 함께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심지어 저멀리 [[당나라]]에까지 퍼져 유행을 탔다. 심지어 830년대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필로스]]가 터번과 카프탄을 두르고 거리를 돌아다녔으며, [[당나라]] 시대 [[광저우]]에도 페르시아식 카프탄이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 문학 === [[파일:Vasnetsov_samolet.jpg]] 하늘을 나는 [[양탄자]]. [[천일야화]]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장면이다. '''[[천일야화]]의 배경이 아바스 왕조 시대다.''' 아마 이슬람 세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가장 유명한 이슬람 소설집으로 꼽히는 [[천일야화]]는 인도에서 모티브를 따온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일화 모음집을 [[바그다드]]의 아랍인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각색하고 번역하면서 만들어졌다. 훗날 아랍,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심지어 이집트까지 천일야화의 방대한 세계관 속에 통합되었고, 10세기 경에 구체화되기 시작하더니 14세기에 이르러서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최종본의 형태가 등장했다. 주요 줄거리는 [[페르시아]]의 한 왕이 여인들과 결혼한 다음 매일 밤마다 죽여대는데, [[세헤라자드]]라는 지혜로운 여인이 하룻밤마다 한 가지씩 이야기를 들려주며 왕을 궁금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무려 천하루의 밤을 살아남아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아는 [[알라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신드바드]]의 모험 등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서구권에 천일야화가 처음 전파된 건 18세기 경이다. 이후 [[오리엔탈리즘]]과 맞물려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지는 등 현재는 명실상부 이슬람과 아랍권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들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노골적인 연애 이야기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로맨스 이야기가 바로 이슬람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는 '라일라와 마즈눈'의 이야기다. 옛날옛적 라일라와 카이스라는 두 연인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소꿉친구여서 어딜 가나 손을 꼭 잡고 다녔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쟤네 연애하나봐' 이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라일라의 아버지는 대로했다. 그는 일부러 카이스의 접근을 금지했고, 라일라를 저멀리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버렸다. 카이스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렸으며 '미친놈'이란 뜻의 '마즈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편 라일라는 카이스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못하고 외로워하다 병이 들어 죽어버렸고, 이 소식을 들은 마즈눈은 황량한 들판으로 나가 살며 라일라의 무덤 앞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마즈눈을 말리려 했지만 그 주위에 맹수들이 으르렁거려서 다가갈 수도 없었다. 결국 마즈눈은 사랑을 지키며 혼자 굶어죽었다는 새드엔딩이다. >유리에 퍼지면 무수한 색을 자랑하여 모든 혀들을 잠잠케 하고 > >연인의 부탁에 아름답게 말을 건네는 나긋나긋한 청년의 손에 재단사와 같은 튼실한 금빛 몸매를 과시하며, > >관자놀이에는 곱슬머리가 물결치고 재앙을 불러오는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면 > >그는 그리스도인일지어니, 그는 호라산에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윗가슴과 목을 훤히 드러내고 다니나니 > >당신이 이 고상한 아름다움에 말을 건다면, 아마 이슬람 교리조차 높은 산꼭대기에서 당장 던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어다 > >모든 죄인을 범죄케 하는 그의 약탈을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 >나는 그의 종교로 개종하여 알면서도 사랑으로 그 종교에 들어갈 것이었을지라, > >만약 그가 참된 교리를 믿고 있지 않았다면 알라께서 이 젊은이를 이토록 아름답게 구별하지 않으셨을 것이라 착각했을 터이니 > > > - 아부 누와스의 시.[* 이 시는 아부 누와스의 대표작으로서 그의 시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들 중 하나로 꼽힌다. 읽어보면 대충 알겠지만 [[소년애]] 성향이 대놓고 드러난게 특징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예찬, 심지어 [[이슬람교]]에 대한 풍자마저도 섞여 있다. 술과 쾌락을 좋아했던 아부 누와스는 동성애와 술을 혐오하는 무슬림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성향의 시들을 많이 남겼다.] 아랍 시는 큰 발전을 이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바스 왕조의 최전성기보다는 오히려 아바스 왕조의 분열기와 혼란기 시대에 걸쳐서 황금기를 누렸는데 이같은 전성기는 [[페르시아]] 통일 제국들이 등장할 때까지 쭉 이어진다.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해짐에 따라 반대로 예술은 발전했던 것. 아바스 왕조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은 9세기 경 칼리파의 지원을 받아 활동한 '아부 탐맘'과 '아부 누와스'가 있다. 아부 탐맘은 아랍 역사상 최고의 선집으로 일컬어지는 10권의 시집 '하마사'를 발표했고,[* 그는 폭설로 [[하마단]]에 갇혔을 당시 그 곳에 있는 대도서관에서 장서들을 추려내 하마사를 저술했다.] 아부 누와스는 천일야화에도 등장할 정도로 위대한 시인들 중 하나였다. 놀라운 점은 아부 누와스가 에로틱한 시들, 심지어 [[동성애]]를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시를 남겼다는 점이다. 그는 [[이슬람]] 자체를 조롱하며 대담하고 재치있는 시들을 500여 편 넘게 썼는데, 당시 사회상 자체가 대단히 자유로운 편이었을 뿐더러 동성애 코드도 드문 것이 아니었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룬 알 라시드]] 치하의 바그다드는 수많은 서점과 책방들로 유명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로 인해 중국에서 제지술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탈라스 전투에서 사로잡힌 [[당나라]] 군대 포로들 가운데에 제지술을 아는 자가 있었고, 이 기술을 높이 평가한 칼리파는 [[사마르칸트]]에 이 기술자를 머무르게 해 아랍 최초의 제지소를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는 싸고 가벼운 장점 덕에 양피나 가죽을 제치고 대표적인 기록 매체로 자리했고, 책 생산량은 폭증했다. 단순히 책의 발행량의 늘어난 것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일반인들에게도 종이가 전파되며 사업, 문학, 은행업 등 수많은 분야에 쓰이기 시작했고 사회 전반 자체가 뒤집혔던 것이다. 거의 서구 유럽의 인쇄 혁명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 덕분에 바그다드는 수많은 서적들과 종이더미로 넘쳐났다. === 공예 === 중동 지방은 이미 [[로마 제국]] 시절부터 대표적인 [[유리]] 공예품 생산지이자 최상급의 크리스털을 만들어내는 명소로 유명했다. 특히 로마 제국이 중동에서 쫒겨나고 새로 들어선 [[사산 왕조]] 시대에도 유리 공예 기술은 끊임없이 전승되며 발전했고, 이 명맥이 그대로 아바스 왕조 시대까지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바그다드]]의 유리 공예소에서는 병, 플라스크, 접시, 컵, 화병 등 온갖 종류를 망라한 유리 기품들이 제작되었으며 그 위에 정교하기 짝이 없는 장식들을 세공하곤 했다. 다만 [[우상화]]를 엄격히 금지했던 이슬람 문화권답게 사람의 형상은 웬만하면 그리지 않았고, 대부분이 복잡한 [[아라베스크]] 문양이나 식물 덩굴 무늬, 기껏해봐야 동물이 끝이었다. 회화도 발전했다. 안타깝게도 아바스 왕조 시대의 회화 작품은 남은 것이 많지 않은 실정이라 자세한 연구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것들을 조사해보면 우아함과 섬세함이 강한 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사마라]]의 궁전 폐허에서는 벽화와 스투코 조각들이 남아있는데, 잘보면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동물들, 하렘의 풍경 등이 아름답게 그려져있다. 특징이라면 이전 문화권인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적 특성이 짙다는 점. 아바스 왕조 시대의 회화나 건축 기술은 이전 페르시아과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것을 모방해온 성격이 강하지만, [[도자기]] 기술만큼은 아바스 왕조만의 독창적인 분야라고 단언할 수 있다. 가지각색의 형상과 빛깔을 띤 도자기들이 범람하듯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는 아바스 왕조의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바스 도자기는 주로 8세기와 9세기에 그 정점을 찍었다. 도공들은 노란색 흙으로 도기의 형상을 빚었고, 특수 제작한 [[유약]]을 발라 여러차례 소성하면 금색, 갈색, 붉은색 등 다양한 금속성 광택을 내는 아름다운 도자기들이 만들어졌다. 어찌나 기술이 발달했는지 도금이 아니라 유약으로도 금속성 금빛을 내는 것이 가능했고 이걸 이용해서 [[코란]]의 글귀를 황금빛으로 새겨넣기도 했다. [[사마라]]에서는 주로 [[칼리파]]가 사용할 도자기들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다양한 색깔의 타일들을 만들어 납품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지방은 섬유 생산의 중심지였다. 주로 [[콥트교]] 그리스도인들이 원단 생산에 종사했는데 그 품질이 대단히 뛰어나 지중해권 국가들에게까지 수출했다. [[튀니스]]의 경우 아예 원단을 뽑아내는 대규모 공장이 세워져 있었으며 도시 전체에 무려 5,000여 개가 훌쩍 넘어가는 [[베틀]]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만든 대표적인 특산품은 고급 [[터번]]용 천인 '카사브'와 상류층들만이 쓸 수 있었던 고급 원단 '바다나'였다고. 특히 아바스 왕조는 뛰어난 직모 기술을 활용해 [[메카]]의 [[카바]] 신전을 덮는 천 '키스와'도 튀니스 지방에서 따로 제작했다. 키스와는 그 무엇보다도 신성한 천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는데, 최고급 흑색 비단에다가 순금을 뽑아만든 실을 박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키스와를 공급하는 것 자체가 이슬람권에서 엄청난 영광이었기에 아바스 왕조는 자금을 아끼지 않고 키스와 생산에 열을 올렸다.[* 이는 현대에도 유효하다. 현재 [[메카]] 신전의 키스와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서 공급하고 있지만,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집트 왕국]]에서 자청해서 자신들이 키스와 공급을 하겠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다만 사우디아라비아가 [[오일머니]]로 국력이 커지고 이슬람권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자신들이 직접 키스와를 공급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 의료 === >병원은 환자가 회복될 때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환자를 보호해야 한다. 먼 곳에서 온 이든 가까운 곳에서 온 이든, 현지인이든 외지인이든, 강건한 자이건 약한 자이건, 천한 사람이건 높은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직업이 있는 자이든 무직자이든, 눈이 먼 사람이라도, 몸이 아픈 사람이라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모든 치료비는 병원 측에서 부담해야 한다'''. 환자들은 병원에 진료비를 지불할 의무가 없으며 돈을 내지 않았다고 간접적으로 눈치를 주거나 무례하게 구는 일도 없다. > >당시 아바스 왕조의 '''무상의료'''를 다룬 글. 아바스 왕조의 의료 기술은 시대를 감안할 때 대단히 훌륭한 수준이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이슬람 병원은 805년 경 [[하룬 알 라시드]]가 [[바그다드]]에 세운 것으로 982년에는 [[부와이 왕조]]의 주도로 짓긴 했지만 어쨌든 바그다드에 최대 규모의 병상이 들어섰다. 10세기까지 바그다드 도시 한 군데에만 10개가 넘는 병원들이 새로 신축되었으며 [[다마스쿠스]]에는 6개의 병원들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군인 병상이나 황실 전용 병상이긴 했지만 이정도의 병원이 있다는 건 그만큼 의료보건 수준이 높다는 걸 의미했다. 당시 병원은 전신질환, 외과, 정형외과 등 진료 부문이 각각 나뉘었고 대형병원일수록 진료하는 과가 다양했다. '전신질환'은 오늘날의 [[내과]]에 해당하며 열, 감염, 소화기 문제 등 하위 부문들로 나뉘어졌다. 병원은 일반적으로 [[주치의]]이자 학장직을 겸임하는 대표 의사, 그리고 그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비의료 행정관 '샤이크 사이달라니', 수석 약사 이렇게 3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꾸려나갔다. 이들만으로 병원이 굴러가는건 아니었기에 청결만을 담당하는 위생 검사관과 회계사, 기타 행정관리원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근무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병원은 보통 매일 밤 해가 지면 문을 닫았으나 10세기 경에 24시간 내내 진료하는 병원을 따로 두도록 의무화했다고 한다. 꼭 병원이 도시에 고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무슬림들은 금요일마다 도시 광장이나 모스크에 모여 대규모 설교를 듣거나 예배를 하는데, 이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레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의사들은 응급사고가 일어났을 때 곧바로 달려가기 위해 응급진료소를 차려놓고 의사를 상시대기시켜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외딴 지역의 의료 서비스를 맞춰주기 위해 일부러 의사와 약사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이동식 진료소를 꾸려 주기적으로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도록 만들었고, 심지어 10세기 초 경에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감옥 시설에도 죄수들을 위한 병원을 차려줬다. 당시 죄수들은 사람 취급을 못받았던 걸 생각하면 시대적으로도 엄청나게 앞선 발상이었다. [[카이로]]에는 세계 최초의 정신병원이 세워졌고 시리아 [[알레포]]에는 풍부한 빛, 신선한 공기, 흐르는 물 및 음악 따위로 정신병 환자를 치료했다. [[파일:Abulcasis_Islamic_physician-SPL.jpg|width=500]] 환자를 진료하는 무슬림 의사의 모습. 이 시대의 의료 시스템에는 놀랍게도 '''의사 면허'''라는게 필요했다. 당시 웬만한 문화권들은 동서양의 구분없이 의사 면허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는데,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들에서는 의학 학위를 소지해야만 진료를 공식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의대생들은 의사와 직접 동행하고 진료를 보조하며 경험을 쌓았다. 학위를 따고 싶다면 칼리파가 지정한 지방 의료 책임자 앞에서 시험을 치면 된다. 시험은 2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면허를 받고 싶어하는 분야에 관하여 [[논문]]을 작성해 책임자에게 검사를 받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직접 책임자와 면접을 하면서 그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이 두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만 의사 면허가 주어졌다. 의사들은 정해진 시간에만 일했으며 급여도 딱 정해져 있었다. 의료의 질을 어느 정도 수준에 맞춰놓기 위해 의사가 치료하던 환자가 죽으면 가족이 다른 의사들에게 주치의의 처방전을 제시하고 해당 처방이 그 환자에게 올바른 것이었는가 따지도록 했다. 환자의 죽음이 막을 수 있는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가려 의사의 자격이 없는 사람을 쫒아내고자 한 목적이었다. 남자 위주의 이슬람권에서 당연히 대다수의 의사들은 남자였으나 여의사들도 의외로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산부인과]]의 존재 때문이었다. 산부인과 관련 진료를 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음부를 보여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자들이 제 여인들을 외간 남자들에게 함부로 보여주기를 꺼렸기에 어쩔 수 없이 같은 여자 의사에게 진료를 맡긴 것이었다. 산부인과 뿐만 아니라 아예 남자 의사에게 몸을 보이는 걸 싫어하는 남자들도 많아서 이런 남자들을 위해 여의사들만 근무하는 여성 전용 병원도 따로 있었다. 맨 위에도 나와있는 내용인데, 아바스 왕조와 [[이슬람 황금기]]가 절정을 찍던 시기에는 '''무상의료'''를 시행하기까지 했다. 자금은 모두 병원의 자선재단이 지급했고 사람들은 아프면 병원 [[비마리스탄]]에 찾아와 무료로 진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 서비스는 모든 시민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었고 이집트에서는 매일 4천명에 달하는 환자들에게 무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한다. 물론 완전 공짜로 해주는건 아니어서, 환자들이 감사의 표시로 의사들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고 일부 실력이 특출난 의사들은 따로 선물이나 재화를 받기도 했다. 다만 시대를 감안했을 때 무상의료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중세치고는 확실히 엄청난 의료시스템이었음이 틀림없다. [[약학]] 역시 의학의 발전과 함께 큰 진전을 이루었다. 가장 저명한 약학자는 '유한나 이븐 마사와이'라는 인물로 777년 약사의 아들로 태어나 [[바그다드]]에서 공부했다. 이후 바그다드에 있는 병원의 원장이 되어 4명의 칼리파들을 치료하는 주치의라는 명예를 누렸고 다양한 그리스 의학서를 아랍어, 시리아어로 번역하는 업적을 남겼다. 특히 약학과 해부학에 소질이 굉장히 뛰어났는데, 그를 평소 좋아하던 [[알 무타심]]은 그가 해부할 수 있도록 [[유인원]]들을 잡아서 선물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쨌든 마사와이로 대표되는 아바스 약학은 8세기 경에 독립적인 약국이 세워지며 이미 [[의약분업]]의 수준까지 이르렀고 [[연금술]]의 발전과 함께 약학 역시 발전했다. [[쿠란]]에서 약의 청결함과 위생을 강조하고 있었던 터라, 매년 '무타시브'라는 정부 감찰관이 내려와 약국들의 위생을 관리했다. 의사와 약사의 업무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고 약사 역시 면허 소지자만 할 수 있는 직업이라 다른 사람이 함부로 약사 행위를 하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외과 수술도 유명한데 중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수준의 수술도 이루어진 바 있다. 10세기 경 아랍 의사 '아부 알 카심 알 자라위(أبو القاسم خلف بن العباس الزهراوي,)[* 생몰은 936 ~ 1013으로 에스파냐 출신 아랍인]는 '수술의 아버지'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여성형 유방]] 절제술'''과 [[유방암]] 치료를 위한 '''세계 최초의 유방 절제술'''을 집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갑상선]] 절제술'''을 성공시켰으며 수술에 사용되는 278개의 기구 목록이 포함된 '내과 의사 매뉴얼'을 망라한 3권의 수술 교과서를 저술했다. 그야말로 아랍 수술의 기초를 놓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 외과에만 업적이 있는게 아니라 [[혈우병]]의 유전적 특성을 규명하는가 하면 자궁외임신의 하위 유형인 복부 임신을 처음으로 기술했고 [[마비]]의 근본 원인을 최초로 발견했다. 게다가 [[제왕절개]]와 [[백내장]] 수술을 위한 도구를 개발하는 업적도 남겼다. 그의 저작들은 훗날 유럽에 건너가 500년 동안 최고의 수술 참고서 대접을 받았다. === 과학 === ||[[파일:800px-Bodleian_MS._Huntington_214_roll332_frame36.jpg|height=280]]||[[파일:Alhazen1652.png|height=280]]||[[파일:Taqi_al_din.jpg|height=280]]|| ||[[이차방정식]]의 기하학적 해법이 담긴 알 콰리즈미의 책 페이지 ||인간의 안구 구조 해부도 ||천문을 관측하는 학자들 || [[하룬 알 라시드]]의 시대 이래 시작된 [[이슬람 황금기]]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누가 뭐라해도 찬란한 과학의 발전이었다. 특히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와는 달리 비무슬림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학문을 흡수하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던 덕분에 수많은 인재와 자료들을 쉽게 흡수할 수 있었고,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부터 저 먼 인도와 중국의 사상가들까지 다채로운 인재풀을 습득했다. 특히 [[네스토리우스교]]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바스 왕조 아래에 고용되어 수많은 그리스어 서적들을 아랍어와 [[시리아어]]로 번역해주면서 서구에서 끊길뻔한 학문의 명맥을 이었다는 의의도 남겼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학자들 중 하나가 '알 콰리즈미'다. 일부 사람들은 [[디오판토스]]가 아닌 알 콰리즈미를 '대수학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 그는 '키타브 알 자브르 와 이 무카발라'라는 수학 서적을 집필했는데 여기서 '[[대수학]]'이라는 용어가 파생될 정도로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선형 및 [[이차방정식]]의 첫 체계적인 풀이법을 제시했고 대수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다룬 첫 학자였다. 게다가 항을 반대 편으로 넘겨서 소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등 현대 대수학의 기본적인 요소를 정립하며 세계 수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알 콰리즈미'라는 단어라고 하면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는데, 그건 바로 [[알고리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저멀리 인도에서 만들어진 [[아라비아 숫자]]와 인도의 선진적인 수학 체계를 지중해권에 소개한 알 콰리즈미에 대한 헌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븐 알 하이삼'은 '광학의 서'라는 저서에서 빛의 내향 이론을 제기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서 빛이 방출되어 그 빛이 사물에 맞고 눈으로 돌아오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븐 알 하이삼은 그 이론을 부정했고, 반대로 외부에서 들어온 빛이 사물에 맞은 뒤에야 눈에 들어와 뇌가 인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시각이 주관적이고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시각이라는 감각 자체가 뇌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했으며, 훗날 [[페르마의 원리]]로 정리될 '최소 시간의 법칙'을 최초로 제기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의의는 '모든 진리는 확인 가능한 절차나 수학적 추론에 기초한 실험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라는 현대 과학의 정석과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르네상스]]보다도 500년이나 앞선 시대를 뛰어넘은 마음가짐으로, 그래서 그에게는 '진정한 세계 최초의 과학자'라는 멋진 타이틀을 붙여주기도 한다. [[천문학]]의 발전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시리아 천문학자이자 아랍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알 바타니'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번역하고 다듬으며 거기에 자신만의 의견을 덧붙여 독창적인 우주관을 창조했다. 그는 태양을 관찰해 [[금환일식]]의 원리를 이해했으며 지구가 황도와 적도면 사이에서 이루는 각도를 정확히 측정했다. 그 외에 태양년, 분점을 정확히 계산해냈고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때 [[사인]]과 [[접선]]을 도입해 고대 그리스의 낡은 기하학적 추론법을 대체했다. 그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알 바타니의 저서들은 [[이탈리아]]와 서유럽에까지 건너갔으며, 훗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율리우스력]]을 수정할 때에도 그의 자료를 참조했고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에서도 3부에 걸쳐 그의 저서를 인쇄했다. === 기술과 무역 === [[파일:7544061_orig.jpg]] 아바스 왕조의 영토와 무역로의 위치. 8세기 경에는 [[탈라스 전투]]를 거쳐 들어온 중국인에 의하여 마침내 아랍에도 제지술이 퍼졌다. [[양모]]보다 훨씬 만들기도 쉽고 두께도 얇아 보관이 용이했으며, [[파피루스]]보다 쌌고 내구성이 강했으니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종이가 특히 빠르게 퍼진 이유는 [[쿠란]] 때문이었다. 이슬람 법학자들은 쿠란을 필사하는 것이 엄청난 미덕이라고 여겼는데, 잉크도 잘먹고 보관하기도 쉬운 종이가 등장하자 그 누구보다 이를 반기며 빠르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후 종이는 [[후우마이야 왕조]]의 안달루시아 지방을 거쳐서 10세기 경에야 겨우 유럽으로 전파되게 된다. 종이를 만든 것은 분명 중국이 맞지만 그걸 전세계로 퍼뜨린 것은 아바스 왕조였다는 이야기다. 중국에서 종이 뿐만 아니라 [[화약]]도 함께 들여와서, 점차 [[대포]]나 [[폭탄]] 같은 신병기들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던 때이기도 했다. 농업과 무역은 크게 번창했다. 일단 아바스 왕조는 [[풍차]] 기술을 도입해 관개 기술과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아몬드]]와 감귤류, [[설탕]] 등을 유럽으로 수출했다. 아바스 왕조는 그 넓은 땅덩어리에도 불구하고 [[나일강]],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거대한 배가 항해할만한 수심이 깊고 폭이 넓은 강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규모 해상 무역은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다. 강을 통해 이동하는 것과 바다를 건너는 것은 천지차이였으니, 아바스 항해사들은 기초적인 수준의 항해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육분의]]를 사용해 나중에는 굳이 해안가를 따라가지 않고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마음껏 항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당시 유럽과 지중해에는 돛이 달린 삼중선 '트리에레스'가 이미 오래전에 실전되어 찾아보기 어렵게 된지 오래였다. 이 거대한 선박들을 다시 지중해로 도입한 것 역시 아바스 왕조였으며[* [[캐러밸]]이라는 단어 자체가 '카리브'라는 아랍 선박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아랍 상인들은 16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이 치고 올라오기 전까지 [[인도양]] 무역을 석권했다. 아바스 왕조는 [[호르무즈]]과 [[예멘]] 연안 지방을 중심으로 저멀리 [[인도]]의 술탄국들과 활발히 무역을 진행했고, 저멀리 [[동남아시아]], [[중국]], 심지어는 [[한국]]과 [[일본]]과도 무역을 했다. '''[[신라]]와 [[고려]]와 무역을 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아바스 왕조다.''' 서쪽으로도 무역을 활발히 전개했다. 아랍 상인들은 [[제노바]], [[베네치아]], [[동로마 제국]]을 주요 무역 상대로 삼아 전 지중해를 휘젓고 다녔으며, 북쪽으로는 [[브리튼 섬]]까지도 다다랐다. 어찌나 멀리 갔던지 [[러시아]]나 [[스웨덴]] 지방에서도 아랍 금화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바스 왕조는 [[지중해]], [[카스피해]], [[흑해]], [[인도양]], [[남중국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무역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 [[실크로드]]를 통한 중개무역을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부를 거둬들였다. 다만 이 시대 아바스 왕조의 해상 무역 수준을 지나치게 고평가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물론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된 것은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 소수의 사치품 교역만을 위하여 진행된 것이었다. 꽤나 많은 아랍 캐러밴과 선박들이 목적지까지 닿지도 못한 채 침몰하는 것이 일상사였으며 [[해적]], 선상반란, [[태풍]] 등 다양한 원인 때문에 해상 무역에서 이익을 내는 건 매우 까다로운 일이었다. 얼마나 해상무역이 힘들었던지 중국에 무사히 갔다온 사람은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축하해줄 정도였다. 아바스 왕조 시대에 지어진 [[신드바드]]의 모험만 봐도 해적들의 이야기가 수두룩하게 나오니 얼마나 해상 무역이 위험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해상 무역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이용한 육로 무역 역시 번성했다. 주로 [[금]]과 [[노예]] 목적으로 [[아프리카]]와 교역했으며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통한 중앙아시아와도 교류했다. 아바스 왕조의 장인들은 에너지 사용에 탁월한 아이디어들을 쏟아냈다. 기술자들은 머리를 쥐어짜내며 조력, 수력, 풍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방법을 찾았고, 그 결과 이슬람권에서는 이미 7세기에 [[물레방아]]가 발명되었으며 [[펌프]], [[기어]], [[댐]]을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사용하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 이미 아바스 왕조 거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물레방아와 펌프를 이용한 제분소들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 아직도 손으로 일일이 밀알을 까부르던 서유럽에 비하면 상상도 하지 못할 비약이었다. == [[지혜의 집]]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지혜의 집)] [[파일:house-of-wisdom-01.jpg]] '지혜의 집(بيت الحكمة )'은 [[바그다드]]에 위치한 거대한 아카데미이자 황립 대도서관으로 [[하룬 알 라시드]]가 8세기 후반에 제 장서들을 보관하기 위하여 처음 지었다. 이 곳의 가장 대단한 업적은 '''고대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해 그대로 보존했다는 것'''이다. 사실 아랍인들은 이미 4세기 경부터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세계 문화권들의 지식을 아랍어로 번역해 흡수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 도서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위치한 중앙 도서관으로서 고대의 마지막 대도서관으로 꼽힌다. 로마 제국 시절부터 내려온 유산들이 고스란히 소장되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4차 십자군 원정 도중 실수로 모두 불탔다.] 등의 자료들을 아랍어로 번역, 필사했고 유용한 지식이라면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가져왔다.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도 [[무아위야 1세]]가 [[다마스쿠스]]에서 책을 모으기 시작해 의학, 연금술, 물리학, 수학, 점성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들을 후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다양한 지식들을 모으길 좋아하던 아랍인들의 지식욕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절정을 찍으니 그 소산이 바로 지혜의 집이다. 당시 아바스 왕조가 관용적인 정책을 피면서 그 수도 [[바그다드]]에는 온갖 출신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인종의 용광로가 되었고, 자연스레 수많은 외국산 기록들이 흘러들어오자[* 아랍인들이 스스로 외국으로 나가 귀중한 고서들을 가져오기도 했다. [[알 마문]] 시대에는 천년고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오직 고서 수집만을 목적으로 사절을 파견할 정도였다.] 이 모든 것들을 아랍어로 번역해 '지혜의 집'에 보관해놓았던 것이다. [[그리스어]],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시리아어]] 등 온갖 언어들로 써져서 뿔뿔히 흩어져 있던 책들이 죄다 바그다드에선 아랍어로 번역되어서 대도서관에 비치되었다. 가장 많은 건 의학, 수학, 천문학 책들이었고 [[철학]] 책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고 한다. 지혜의 집은 [[알 마문]] 칼리파의 시대에 전성기를 누렸다. 알 마문은 전쟁의 전리품으로 과학 서적을 황금보다 더 선호했을 정도로 지식욕구가 엄청난 인물이었다. 알 마문은 정기적으로 지혜의 집을 방문하며 학자들과 토론을 나누었고, 자신이 궁금한 것들을 지혜의 집에 머무는 현자들에게 직접 질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세계지도를 작성하라고도 시켰고 [[알마게스트]]에 나오는 환산값들이 정확한지 검토하라고 지시한 적도 있으며 [[지구]]의 실제 크기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문의한 적도 있다.[* 원래 알 마문은 매우 호기심이 많았던 인물이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도굴해서 처음으로 왕의 방 안까지 들어간 기록을 남긴 사람도 이 알 마문이다.] 바그다드에 최초의 [[천문대]]를 지은 것도 바로 이 알 마문이며 과학 연구에 어마어마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학문 진흥에 압도적인 기여를 했다. 알 마문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 전체에 학계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건 명예로운 일이라는 인식이 퍼져있었고, 사람들이 과시욕에서라도 학자들을 재정적으로 밀어주니 학자들은 생계 걱정없이 오직 연구에만 전념이 가능했다. 번영하던 지혜의 집은 알 마문 사후 조금씩 쇠락했다. 알 마문의 후계자인 [[알 무타심]]과 [[알 와시크]]는 전임자의 선례를 따라 지혜의 집을 잘 보살펴 후원했지만, 알 와시크의 후계자 [[알 무타와킬]]은 지혜의 집에 별 관심이 없었다. [[쿠란]]과 [[하디스]] 경전의 현학적인 해석을 더 선호했던 알 무타와킬은 지혜의 집에서 그리스 학문을 연구하는 걸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며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혜의 집은 칼리파의 암묵적인 방치 속에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래도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가듯이 지혜의 집은 이후에도 300년 가까이 쭉 아랍 무슬림의 지식의 보고나 다름없었는데, 하필이면 1258년 2월 13일 [[몽골 제국]]이 쳐들오면서 말그대로 [[개발살]]난다. 책 따위에 관심이 없던 [[훌라구]]는 도서관의 모든 걸 파괴했다. 훌라구는 말들이 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책을 던져서 다리를 만들었는데, 얼마나 많이 던졌던지 [[티그리스강]]이 책의 잉크로 검게 물들었다고... 게다가 책의 종이로 발을 감쌀 샌들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책들을 찢어 신발로 만들어버렸다고도 한다.[* 그나마 포위전 직전에 40만 권의 책들을 따로 선별해 이란 북서부의 도시 [[마라게]]로 가져가서 겨우 살렸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지혜의 집의 최대 업적은 번역 작업이다. 200년에 걸친 엄청난 대프로젝트 끝에 수많은 고서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부터 시작해서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유클리드]], [[플로티누스]], [[갈레노스]], [[수슈루타]], 아르야바타,[* 인도 천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천문학에 엄청난 공헌을 남긴 인물이다.] [[브라마굽타]]의 서적들이 죄다 아랍어로 통번역됐다. 그렇다고 번역만 해놓은 것도 아니었다. 번역 도중 시대가 바뀌어 사실관계에 어긋나거나 더 나은 기록이 있으면 수정 변경하기도 했고, 주석이나 해석을 달아놓거나 독창적인 논평을 추가했다. 어떤 경우 아예 제목을 바꾸어버리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알마게스트]]. 원래 이름은 '메갈레 신타시스'였다. 번역 작업만 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아랍 학자들은 이렇게 많이 모아둔 기록들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연구를 하고 성취를 이룩하는 데 성공한다. 수학자로 유명한 알콰리즈미는 [[대수학]]의 발전에 기여한 업적을 남겼고, 알 킨디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슬람 철학과 융합해 향후 400년 동안 발전할 이슬람 철학계의 근간을 닦았으며 알 자이스는 [[여우]]와 [[개]], [[늑대]]와 같은 동물들이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진화]]해 왔을 것이라는 학설을 제기했다. 지혜의 집에서 일하던 현자들은 '스스로 연주하는 악기'를 포함해 기초적인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기계 100여 개가 수록된 '기발한 장치들의 서'를 발간했고, 모함마드 무사는 물리 법칙의 보편성을 지적한 세계 최초의 학자였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많아서 이븐 알 하이삼은 [[광학]] 분야를 연구했고 후나인은 [[안과]] 수술 관련 논문을 남겼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기록을 입증할 거대한 천문대에서 하늘을 관측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학문과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지식들을 탐구했던 것이다. == 여성의 지위 == [[파일:harem-interior-.jpg]] 안타깝게도 아바스 왕조 내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딱히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무함마드]] 본인부터가 여자의 사회 진출을 꺼렸고 부계중심적인 아랍 사회 특성상 여자의 지위가 높다면 그건 그거대로 더 이상할 일이었다. 그래서 남자들이 사회 밖으로 나가 전투를 벌이거나, 정치를 하거나 학문을 배우는 동안 거의 압도적 다수의 여자들은 반강제로 집에 들어박혀 살아야 했고 활발히 사회활동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이건 아바스인들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여인상'이었고, 실제로는 살기도 바쁜데 여자가 집 밖으로 나오는 걸 대놓고 막거나 그러진 못했다. 여자가 시장에 나가지 못하거나 밖 출입이 통제되면 그만큼 노동력이 줄어드는 셈이므로 가계 형편이 훨씬 팍팍해졌기 때문. 그래서 중산층 이하의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면이 있었다. 아바스 왕조가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노예들이 제국 내로 유입됐다. 개중 압도적 다수는 [[사산 왕조]] 출신의 여자와 어린아이들이었는데 피정복민들의 남자는 극히 일부가 아니면 죄다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어찌나 노예들이 많이 유입되었던지 권력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면 최대 1천 명에 달하는 노예들을 소유할 수도 있었고 하다못해 병사들조차 돈을 잘 모으면 10명 정도의 노예를 부릴 수 있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노예가 차츰차츰 해방되기 시작했고, 특히 노예들 가운데 무슬림의 비율도 많아지자 같은 무슬림을 노예로 부리는 걸 금지한 법 때문에 아바스 왕조 내부에서 노예들의 비중은 점차 줄어든다. 이슬람스럽게 [[하렘]]도 당연히 존재했다. 주로 가정의 어머니, 딸, 노예 첩, 여성 친척, 여성 및 환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매우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집단이었다. 하지만 하렘 내부인들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사회에서 최대한 격리되어있기를 바랐으며, 하렘 내부에서도 두꺼운 커튼을 치고 문을 닫아걸어 함부로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하렘의 크기가 커질 수록, 소속된 여인들의 수가 많을 수록 남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기에 남자들은 최대한 많은 여자들을 소유하는 데에 집중했다. 특히 상류층들이 이런 풍조가 심해서 여인들을 애정 관계라기보다는 성욕의 해소 대상으로 여기거나, 아예 일종의 [[트로피]]처럼 전시해놓는 비뚤어진 만족감이 사회적으로도 만연했다고 한다. 아바스 하렘의 정점인 [[칼리프]] [[알 무크타디르]]는 4,000여 명의 노예 첩들, 11,000여 명의 하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렘을 거느렸다. 하렘의 꼭대기에는 칼리파의 어머니가 있었다. 다른 문화권과는 달리 아바스 왕조에는 본처의 개념이 없었고, 아내들은 본처나 후처의 구분없이 모두 똑같이 대해야 했다. 여럿이 존재하는 왕비들과는 달리 칼리프의 어머니는 단 한 명뿐이었으니 당연히 하렘의 최고 자리를 꿰차게 되었던 것이다. 왕비들은 모두 지위가 동등했고 출신은 노예일수도, 평민일수도, 귀족일수도 있었으나 신분이 아니라 칼리프의 총애 정도에 따라 서열이 갈렸다. 왕비 아래에는 '마지야트'라는 노예 첩들이 있었다.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쾌락의 대상이라 주로 성적 기술을 배우거나 음악, 노래, 시, 춤 등을 갈고닦았다. 잘만 하면 칼리프의 눈에 들어 그의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는데, 이러면 신분이 '옴 왈라드'[* '아이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주인의 아이를 낳은 노예 여자를 말하는 용어다. 아이를 낳은 여인은 팔 수도 없었고 주인이 죽으면 바로 자유인으로 바뀌었다. 움 왈라드가 낳은 자식은 노예의 자식이 아니라 주인의 적법한 후계로 간주되었으며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도 있었다. 하지만 주인이 여자가 낳은 아이를 자기 친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여자는 간통죄로 처벌받아 자유는커녕 목숨마저 간당간당해질 수도 있었다.]로 격상됐다. 마지야트보다 더 아래에 있는 여인들이 '자와리스'였다. 노예 신분으로 보통 칼리프와 여인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무희에 불과했는데 이들 역시 칼리프의 마음에 들면 마지야트로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하렘 내부에서 유일하게 바깥출입이 가능한 존재는 '카라마나'라는 여시종들로, 밖에 나가서 물건을 사오거나 하렘 여인들의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아니면 하렘의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개인 시종, 잔심부름을 하는 등 그 역할도 굉장히 다양했다. 환관들과 함께 거의 유이하게 하렘을 나갔다 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덕분에 하렘 내부에서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고 한다. [[환관]]들은 여인들과 간통하는 걸 막기 위해 싸그리 [[거세]]시키고 들여보냈다. 이같은 하렘 시스템은 훗날 [[오스만 제국]]까지 전해내려가 오스만 하렘의 기본틀이 된다. == 이교도들에 대한 처우 == [[파일:orientalism-and-orientalist-painters.jpg]] 아바스 왕조 시대의 길거리 모습. 아바스 왕조 아래에는 당연히도 [[무슬림]]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나 [[유대인]], [[조로아스터교]] 신자 등 수많은 종교들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슬림들은 이들을 '딤미'라고 부르면서 무슬림들과는 확연한 사회적 차별을 두었다. 딤미들은 종교세인 [[지즈야]]를 지불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병역, 세금, 재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무슬림들과 차별대우를 받았다. 가장 이교도들에게 가혹했던 칼리파는 [[알 무타와킬]]이었다. 그는 이교도들이 입을 수 있는 옷부터 제한을 걸었고 아예 무슬림과 잘 구분할 수 있도록 눈에 확 띄는 노란색 옷을 입고 다니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사회에서 이교도들을 분리시키는 한편, 이교도들의 주택을 무슬림 관리들 마음대로 압류할 수 있는 권한과 이교도들이 교육받는 걸 더욱 어렵게 만드는 법안을 만들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이교도들에게는 썩 좋지 않은 칼리파였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되는게, 전반적으로 다른 칼리파들은 [[알 무타와킬]]만큼 불관용적이지 않았다. 아바스 왕조는 시대마다, 그리고 특히 재위중인 칼리파의 성향마다 이교도들에 대한 대접 수준이 달라졌는데 알 무타와킬은 개중에서도 최악에 가까울 정도로 불관용적인 칼리파였다. 즉 다른 칼리파들은 그에 비하면 훨씬 유한 태도를 보여줬다는 의미다. 게다가 차별적인 법이 있어도 대충 지켜지거나 아예 안지켜지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위의 알 무타와킬 역시 이교도들이 공직에 오르는 걸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었으나 그 자신도 여러 그리스도인 비서들을 따로 두고 있었다. [[알 만수르]]는 이교도들이 공직에 등용되지 못하는 법안을 만들었지만, 재무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라면 종교를 가리지 않고 그냥 재무부 총괄직을 서슴없이 맡기기도 했다. 즉 법안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했을 뿐 실제로는 그때그때 따라서 임의적으로 이교도를 얼마든지 사회에 진출시켰다.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분명 무슬림들에 비하면 낮았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의사]]나 학자, 높은 관리처럼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직업을 가지는 게 가능했고[* 아바스 왕조 최고의 번역자이자 학자로 꼽히는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 역시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믿는 그리스도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혜의 집]]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으며 엄청난 봉급을 받으며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재산을 합법적으로 쌓아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아바스 왕조는 꽤나 [[능력주의]]적인 사회라서 출신이나 종교에 상관없이 능력만 출중하다면 그에 걸맞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칼리파 아래 최고의 자리인 재상직에 등용된 그리스도인도도 있으며, [[이븐 바투타]]가 남긴 여행록에도 유대인 의사가 들어오자 무슬림들이 일어나 예를 갖추는 내용이 나왔을 정도. 물론 아무 차별을 받지 않은 지상낙원은 아니라서, 무슬림들은 이교도가 자신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면 당연히 질투했고 폭력적으로 재산을 빼앗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유럽]]에서 이교도, 그리고 특히 [[유대인]]들이 받던 버러지 취급에 비하면 아바스 왕조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아바스 왕조 아래에서 행해진 이교도들에 대한 차별은 타 국가들에 비해서도 유하거나 비슷한 수준이었다. 서양 제국의 대표주자 [[로마 제국]]만 해도 차별이 없는 게 아니었다. 4세기의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이 공직에 오르는 걸 금지했고 로마 시민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 역시 엄벌했으며 로마 군대에 복무하는 유대인들을 이유없이 강등시키기도 했다. 반대로 아바스 왕조는 최고 대재상이 한 그리스도인 장군을 군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 위해 신하들과 옥신각신 다투기까지 했고, 결국에는 관철해내는 데에 성공한다. 즉 당시의 아바스 칼리파들은 로마의 황제들에 비해서도 훨씬 관용적인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랍인들이 아닌 민족들 대부분도 아바스 왕조의 울타리 안에서 나름 행복하게 살수 있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관용이 두드러진 편이었다. 수도 [[바그다드]]의 유대인들 대부분은 아랍인 공동체에 편입되어 살 수 있었으며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아바스 사회에 녹아들었다. 일부 유대인들이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따로 배우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교양에 그쳤다. 다만 종교에 한해서는 얄짤이 없어서 철저한 [[유대교]] 중심의 교육을 받았다. 칼리파들은 유대인들이 제국 내의 유대 커뮤니티를 재건할 수 있도록 허가했으며 바그다드에는 무려 10개의 랍비 회당과 23개의 유대 회당이 세워졌다. 동시대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면 온갖 수난을 당하고 살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유대인들 외에 아라비아 반도에 거주하는 비-아랍인들도 아바스 왕조의 관용 아래 동화되기 시작했고, 스스로 [[아랍어]]를 배우고 쓰기 시작하며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종교를 믿는 범무슬림이라는 개념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는 전대 이슬람 제국인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와의 가장 큰 차이였다. 우마이야 왕조는 비아랍인들과 비무슬림들을 철저히 차별해 그들의 반감을 사서 멸망한 반면, 아바스 왕조는 이들을 관용으로 대했고 그 덕분에 오랜 세월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 후계자 논쟁 == 아바스 왕조가 [[정통 칼리파 시대]] - [[우마이야 왕조]] - 아바스 왕조 이렇게 보편 [[칼리파]]의 왕통을 잇는 왕조였던 탓에 아바스 왕조가 망하고 난 이후에도 그 후계를 칭하는 왕조들이 여럿 나타났다. 마치 [[유럽]]에서 [[로마 제국]]이 망하고 난 이후 [[제3의 로마]] 갈등으로 수많은 나라들이 다투었던 것과 비슷하다. 일단 가장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국가는 [[오스만 제국]]이다. 애초에 [[셀림 1세]]가 최후의 아바스 칼리파 [[알 무타와킬 3세]]에게 칼리파직을 선양받은 만큼, 정통성 면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압도적이다. 게다가 오스만이 무려 400년 가까이 중동과 서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이렇게 이슬람의 3대 성소를 관리했던 것만으로도 정통 칼리파의 후계를 자칭할만한 자격은 충분했다. 이 시기의 오스만 황제들은 '세 성소의 보호자'라고 불렸으며 거의 대부분의 [[수니파]]들을 다스렸다. 심지어 저멀리 떨어져있지만 국력만큼은 [[오스만 제국]]에 맞먹었던 [[악바르 대제]] 시절의 [[무굴 제국]]도 오스만 칼리파의 눈치를 보았을 정도였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의 국력과 정통성이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는 자신들이 아바스 왕조의 정통 후계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많이 일어났다. 선지자 [[무함마드]]의 자손을 자칭하며, 아바스 왕조의 건국자 [[아부 알 아바스]]가 무함마드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아부 알 아바스는 [[메카]]의 지배 부족인 쿠라이시 부족의 하위 부족인 바누 하심의 일원이었다. 또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숙부인 아바스 이븐 압둘 무탈리브의 고손자였다. ] 같은 무함마드의 후손으로서 아바스 왕조를 계승할 명분이 있다는 게 주장의 요지였다.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수단]] 지방의 [[와다이 술탄국]], [[파키스탄]]의 카이르푸르 술탄국과 바하왈푸르 술탄국, [[페르시아]]의 바스타크 칸국 등이다. 다양한 세력들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까닭은 아바스 왕조의 후손들이 실제로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탓이 컸다. [[몽골 제국]]이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한 직후, 아바스 왕족들은 죄다 도망쳐 온갖 곳으로 피신했다. 이들은 피신한 곳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거나 세력을 길렀는데, 이들이 자손을 낳고낳아서 결국 수많은 방계혈통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스타크 칸국 역시 이런 맥락에서 건국된 왕국이었다. 바그다드가 함락되던 날, 아바스 왕족 생존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던 이스마일 2세가 가솔을 이끌고 이란 지방으로 도망쳤고 결국 바스타크 지방에 이르렀다. 이스마일 2세의 후손들은 결국 17세기에 독자적인 칸국을 세우기에 이르렀고, 이때는 마침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이 쇠퇴하던 시기였기에 감히 [[칼리파]]의 후계를 자칭할 수 있었다.[* 바스타크 칸국의 마지막 지배자였던 모하메드 아잠 칸 바니에바시안은 1967년 사망했다. 이로 인해 바스타크 칸국은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이와 함께 왕위를 지켜오던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방계 혈통도 대가 끊겼다.] [[와다이 술탄국]] 역시 스토리는 비슷비슷하다. 몽골이 쳐들어오자 살리흐 이븐 압둘라 이븐 아바스 왕자는 저멀리 [[헤자즈]] 지방으로 달아났다. 그에게는 '살리흐'라는 이름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마침 [[헤자즈]] 지방을 순례하던 한 학자가 그 아들을 보고 왕의 자질이 있다싶어 아들을 데리고 수단 지방으로 돌아갔다. 살리흐 왕자는 수단 지방의 비무슬림들을 싹 다 개종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이 것이 바로 와다이 술탄국의 기원설화다. == 평가 == 아바스 왕조에 대한 평가는 대체적으로 좋은 편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하룬 알 라시드]], [[알 마문]] 등 초기의 [[칼리파]]들은 관용을 중심으로 비무슬림들을 포용하는 정책들을 실시했고, 이는 비 무슬림이나 비 아랍인 정도가 아니라 쿠라이시 가문 위주의 족벌주의로 나가다가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고꾸라진 [[우마이야 왕조]]에 비하면 상당한 발전이었다. 아바스 왕조의 강역 확장에 힘입어 이슬람교는 본격적으로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인도]], [[아라비아]] 지방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이는 아바스 왕조 멸망 이후에도 이슬람이 확고부동한 중동의 제1종교로 남아있을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평등을 기치로 내걸고 성립된 국가인 만큼 민족과 종교에 상관없이 능력이 있다면 관직에 공평히 등용되고 대우받았다. 특히 종교에 대해 굉장히 이성적이고 관대하여 제국의 백성들은 종교에서 차별을 받지 않으며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했고, 심지어 '''[[이슬람]]을 배교한채 대놓고 [[이신론]]이나 [[불가지론]]을 선언해도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었다.'''[* 이 당시 활동했던 유명한 이슬람 비판가로는 아부 이싸 알 와라끄, 이븐 라완디를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이신론자 겸 불가지론자 시인이었던 [[https://en.wikipedia.org/wiki/Al-Ma%27arri|아불 알라 알 마알리]]가 알려져 있다.][* 아바스 칼리파조의 영역내에서 마니교도들은 무슬림들을 상대로 선교하는 일이 많았고, 적지 않은 학자들이 마니교 신도들이었다. 후대에는 아바스 왕조 내 마니교도(이른바 [[https://en.wikipedia.org/wiki/Zandaqa|잔다까]])들이 무신론자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슬람 황금기 시대 학자 중 무신론자로 알려진 사람 중 진짜 무신론자인 것이 확실한 사람은 [[https://en.wikipedia.org/wiki/Ibn_al-Rawandi|이븐 알 라완디]] 정도밖에 없고, 나머지 상당수는 다른 학자들에게 비방당하는 과정에서 [[악마의 편집]]을 당해 무신론자로 잘못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거의 유일하게 확정된 사례인 이븐 알 라완디의 경우도 80세가 넘어 죽기 직전에 자신이 무신론자인 것을 밝혔다.]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경전은 아랍인들에게 선교할 목적으로 아랍어로 번역되었으며, 바그다드 성벽 안에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을 포함한 여러 로마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들이 번창했다. 제국 내의 이슬람과 타 종교는 서로 비난하거나 치열한 논변으로 싸울지언정 사적 제재로 살해당하거나 법에 의해 처벌받을 우려가 없었던 시기였다. 현대의 이슬람 국가들과 신자들이 타 종교와 이슬람 비판가, 무신론자들을 대상으로 악명높은 탄압과 공적, 사적 제재, 증오 범죄를 일삼는 것이 흔한 것을 감안하면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융성하게 되고 수많은 무슬림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교리가 대대적으로 정비되어 [[이슬람]]이 아랍 민족종교에서 벗어나 세계종교로 발돋움을 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전의 이슬람 교리는 '그냥 알라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믿으면 됨'의 성격이 강했지만, 학자들은 각종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이슬람 교리에 대한 근거를 만들었다. 아바스 왕조 이후에도 수많은 《타프씨르》[* 《꾸란》의 주석서를 말한다.]가 만들어져 왔지만 아바스 왕조 때만큼 다양한 시각에서 이슬람에 접근하려 한 《타프씨르》를 찾아볼 수 없으며, 실제로 현대의 이슬람 개혁가들의 주장도 아바스 왕조 때의 문헌에 기초한다. 하지만 이 시대를 너무 이상화하는 것도 곤란하다. 당시 그리스어를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에서 희곡들이 번역되지 못한 것은 그럴 수 있다 쳐도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의 역사서들은 번역되지 못했다. 그리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을 담은 헤로도토스의 책은 당시 아바스 칼리파조의 실세였던 페르시아인들의 감정을 건드린 듯 하고, 투키디데스의 저작은 아테네 정치인들이 대중들 앞에서 연설한 내용이 상당히 많이 포함된 것은 물론[* 칼리파를 비롯한 아랍인 지식인들은 대중들 앞에서 [[금요일]] 예배를 집전하면서 설교 형식으로 연설을 했는데(아랍어로 이를 '쿠트바'라고 한다.) 투키디데스의 《역사》에 기록된 연설들과 금요일 예배를 전후하여 행해지는 설교는 엄연히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투키디데스의 책에 묘사된 연설 방식은 당시 그리스도인인 번역가들이나 무슬림 독자들 입장에서는 다소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고대 민주주의 국가 아테네 시민이던 투키디데스의 관점에서 참주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내용이 적지 않기 때문에, 당시 황실의 후원을 받는 번역가들이 건드리기 적합한 책이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바스 칼리파조 학자들에게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 중에서도 《정치학》(Politika)은 번역되지 못했다. 본래 고대 아랍인들은 [[https://en.wikipedia.org/wiki/Shura|슈라]]에 바탕을 둔 원시적인 형태의 민주주의 및 평등주의가 강했지만 우미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시대가 되면서 칼리파들은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황제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다만 완고한 보수 성향의 아랍인들은 이러한 칼리파들의 행동을 두고 "왜 당신들은 아랍의 전통을 버리고 이교도인 페르시아나 로마인들을 흉내내는가?"라고 불만을 품었다.] 당시 수도였던 [[바그다드]]를 그대로 물려받은 아바스 왕조의 장녀 [[이라크]]의 경우 아바스 왕조에 대한 평가가 당연히 좋은 축에 속한다. 한때나마 바그다드가 인구 200만에 달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였다는 데에 대하여 자부심이 굉장하고, [[사담 후세인]]이 아랍 제국을 세우려 했던 야심 역시 한때 이라크가 아바스 왕조 아래에서 아랍 세계의 중심지였던 것과도 무관하다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아무래도 [[이라크인]]들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역사 최고 자랑거리는 아바스 왕조가 아니라 세계 최초의 문명으로 손꼽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보니, 약간 [[콩라인]]처럼 이라크인들의 선호도와 인식 쪽에서 뒤로 밀리는 감은 있다. 그 사담 후세인조차도 [[신바빌로니아]] 제국과 메소포타미아 시대에 빠져서 '함무라비 사단'을 창설했지만 아바스 왕조에서 이름을 따온건 없다. 그래도 이라크인들이 생각하는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들 중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 [[함무라비]]와 함께 [[하룬 알 라시드]]가 꼽힐 정도로 아바스 왕조에 대한 인식이 괜찮은 건 맞다. 하지만 [[페르시아]], 즉 [[이란]]의 입장은 썩 좋지않다. 일단 아바스 왕조는 페르시아인들이 중용되었던 왕조였지만, 아바스 왕조는 결정적으로 [[수니파]]고 현 이란은 [[시아파]] 국가다보니 평가가 좋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아바스 왕조는 건국 이후 최대 공신이자 페르시아인이었던 [[아부 무슬림]]을 숙청했고, [[시아파]]의 [[이맘]]을 독살해 죽여버리거나 체계적으로 시아파 무슬림들을 탄압한 전적도 있다보니 아바스 왕조에 대한 입장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아부 무슬림 사후 극렬히 반발한 페르시아인들은 [[호람딘]]을 창설해 아바스 왕조의 골머리를 썩혔고 페르시아와 아바스 왕조의 관계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관계]]만 읽어봐도 알겠지만 현대 이란과 이라크는 하루 종일 으르렁거리는 사이인데, 아무래도 아바스 왕조의 중심이 이라크였고 그 중심지였던 [[바그다드]]와 [[사마라]] 등의 대도시들마저도 죄다 이라크에 있다보니 이란으로서는 아바스 왕조에 대한 인식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서구권에서는 아바스 왕조에 대해 인식이 나쁠만한 이유가 없다. [[우마이야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처럼 유럽을 직접 침공한 것도 아니고, 현대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처럼 종교에 미쳐 날뛰었던 것도 아니니 오히려 바람직한 무슬림들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게다가 [[천일야화]]의 시대적 배경이라는 메리트 덕분에 [[오리엔탈리즘]]의 주요대상으로 살짝 미화되는 감도 없지않아 있다. 특히 실전될 뻔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들을 잘 보존하고, 훗날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근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집트]], [[레바논]] 등 다른 중동권도 마찬가지다. 아바스 왕조의 시대는 이슬람이 역사상 가장 잘나갔을 시대였고, 특히 북아프리카의 패자 [[맘루크 왕조|이집트]]는 아예 아바스 칼리파들을 [[카이로]]에 납치해서 부려먹기까지 했으니 딱히 아바스 왕조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만한 건덕지가 없다. == 여담 == * '''대식국'''(大食國)은 이슬람 제국을 이르는 말인데, 기록은 적으나 색상을 기준으로 몇 가지 바리에이션이 있었다. 검은 군기를 사용한 아바스 왕조는 '''흑의대식'''이라 불렸으며 제일 유명한 '대식국'이기도 했다. 또 [[아라비아]] 반도 전체 혹은 한때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 일부, 중앙아시아까지 차지했던 우마이야 왕조는 흰 군기를 사용해 '''백의대식'''이라 불렸다. 또한 이집트를 지배하던 쉬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 파티마 왕조는 '''녹의대식'''이라 불렀다. * '대식국'이란 [[중국]] [[당나라]] 때 표기된 말인데 다양한 유래가 전한다. 하나는 '대식'의 중국어 음역 ‘Tashi’가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무역상의 뜻을 가진 ‘Taijr’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650년 이후 이슬람 세력이 서역에서 급속하게 영토 확장을 해나가자 이를 군사야욕이라 규정한 중국인들이 아라비아를 ‘영토의 탐욕자'(=영토 먹기에 환장한 놈)라는 모멸감 섞인 말인 '대식'으로 불렀다는 설, 또다른 하나는 풍족하게 살아서 식사량이 많아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 전성기 시절, 약 800년대의 [[바그다드]]는 그 인구가 무려 200만 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 역사상 처음으로 수표가 쓰인 것도 아바스 왕조 치하의 바그다드에서였다. [[https://youtu.be/EgKsu9obCGU|#]] * [[천일야화]]의 배경이 된 곳 역시 [[하룬 알 라시드]] 치하의 아바스 왕조 시대다. 그래서 잘 읽어보면 간간히 아바스 왕조 시대의 인물들이 천일야화에 등장하는 걸 알 수 있다. 대표적 인물이 아랍의 위대한 시인들 중 하나로 꼽히는 '아부 누와스'. * 교과서나 참고서 등에서 나오는 아바스 칼리파조의 영토는 [[우마이야 왕조]]의 강역에서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알안달루스]]만 뺀 마그레브(모로코, 알제리)에서 트란스옥시아나(우즈벡)까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제국의 전성기였던 알 만수르나 하룬 알 라시드 시대의 제국은 이프리키야(튀니지, 리비아)에서 이란까지였고, 제국의 최전성기(일명 이슬람 황금기)인 알 마문의 시대에는 이집트에서 이라크까지만 아바스 칼리파의 직접적인 권력이 미쳤다. 또한, 크레타 섬이나 시칠리아 섬 일대를 아바스 칼리파조의 영토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시칠리아는 아바스 조의 속국이었던 아글라브 왕조가 점령해서 연관성이라도 있지만 크레타는 후우마이야 왕조에서 추방된 안달루스인들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바스군에게 격퇴된 일단이 점령한 것이라 더더욱 연관이 없다. * [[어쌔신 크리드: 미라지]]의 등장 배경이다. 860년 ~ 870년 사이 '사마라의 혼란기' 시대의 [[바그다드]]를 주 등장무대로 한다. == 아바스 왕조의 계보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bbasids.png]] == 역대 칼리파 == [include(틀:역대 보편 칼리파)] ===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 === || 대수 || 이름 || 재위기간 || 비고 || || 1대 || [[아부 알 아바스]] || 750~754 || 아바스 왕조가 개창되었다('''제3차 피트나'''). 당나라와의 [[탈라스 전투]]가 일어났다. || || 2대 || '''[[알 만수르]]''' || 754~775 || 수도를 쿠파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 아바스 칼리파의 권력이 강해졌다. || || 3대 || [[알 마흐디]] || 775~785 || 바그다드가 번영했다. || || 4대 || [[알 하디]] || 785~786 || || || 5대 || '''[[하룬 알 라시드]]''' || 786~809 ||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고, 칼리파의 권력이 더더욱 강화되었다. 아바스 왕조와 이슬람의 황금기가 열렸다. 북아프리카를 서서히 상실하기 시작했다. || || 6대 || [[알 아민]] || 809~813 || 알 아민과 알 마문의 내전('''제4차 피트나''')이 벌어졌다. || || 7대 || '''[[알 마문]]''' || 813~833 || 알 아민과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제국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났다. 이슬람의 황금기가 지속되었다. || || 8대 || [[알 무타심]] || 833~842 || 튀르크계 용병이 중용되기 시작했다. ~~이슬람 왕조 몰락 플래그가 섰다~~|| || 9대 || [[알 와시크]] || 842~847 || 마우로포타모스 전투가 일어났다. || || 10대 || '''[[알 무타와킬]]''' || 847~861 || 많은 건설사업이 벌어졌다. 이슬람과 아바스 왕조의 황금기가 종결되었다. || || 11대 || [[알 문타시르]] || 861~862 || 이슬람의 혼란기가 시작되었다. || || 12대 || [[알 무스타인]] || 862~866 || 튀르크계 장군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제5차 피트나'''가 일어났으며,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었다. || || 13대 || [[알 무타즈]] || 866~869 || 아바스 왕조의 지방 통제력이 무너져 내렸다. || || 14대 || [[알 무흐타디]] || 869~870 || 이븐 와시프와 무사 이븐 부가간의 대립끝에 이븐 부가가 승리했다. || || 15대 || [[알 무타미드]] || 870~892 || 사마라의 혼란기가 종식되었다. [[잔즈 반란]]과 [[사파르 왕조]]의 침입을 막아내어 아바스 왕조가 중흥기를 맞았다. || || 16대 || [[알 무타디드]] || 892~902 ||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북부, 이란 서부 등을 직접 지배령으로 수복하고, [[툴룬 왕조]]와 [[사파르 왕조]]로부터 형식적인 충성을 받아냈다. || || 17대 || [[알 무크타피]] || 902~908 || [[툴룬 왕조]]를 정복했다. 와지르의 권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사후 아바스 왕조의 중흥기가 끝났다. || || 18대 || [[알 무크타디르]] || 908~932 || || || 19대 || [[알 카히르]] || 932~934 || || || 20대 || [[알 라디]] || 934~940 || || || 21대 || [[알 무타키]] || 940~944 || || || 22대 || [[알 무스탁피]] || 944~946 || 알 무크타디르 사후 다시 칼리파를 좌지우지하던 튀르크계 용병들을 격파하고 쉬아 계열 [[12이맘파]] 국가인 [[부와이 왕조]]가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이후 수니파 아바스 칼리파는 쉬아파 부와이 왕조, 그 다음에는 수니파 셀주크 왕조에 굴복하여 종교적인 권위만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 || 23대 || [[알 무티]] || 946~974 || || || 24대 || [[알 타이]] || 974~991 || || || 25대 || [[알 카디르]] || 991~1031 || || || 26대 || [[알 카임(아바스 왕조)|알 카임]] || 1031~1075 || || || 27대 || [[알 무크타디]] || 1075~1094 || || || 28대 || [[알 무스타지르]] || 1094~1118 || || || 29대 || [[알 무스타르시드]] || 1118~1135 || || || 30대 || [[알 라시드]] || 1135~1136 || || || 31대 || [[알 무크타피]] || 1136~1160 || 아바스 왕조의 제2차 중흥기가 시작되었다. || || 32대 || [[알 무스탄지드]] || 1160~1170 || || || 33대 || [[알 무스타디]] || 1170~1180 || || || 34대 || [[알 나시르]] || 1180~1225 || 후제스탄을 점령했다. || || 35대 || [[알 자히르]] || 1225~1226 || || 36대 || [[알 무스탄시르]] || 1226~1242 || 아바스 왕조가 모술을 제외한 이라크 전체를 회복했다. || || 37대 || [[알 무스타심]] || 1242~1258 || 바그다드가 몽골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아바스 칼리파조가 사실상 멸망했다. || === 카이로 아바스 왕조 === || 대수 || 이름 || 재위기간 || || 38대 || [[알 무스탄시르 2세]] || 1261~1262 || || 39대 || [[알 하킴 1세]] || 1262~1302 || || 40대 || [[알 무스탁피 1세]] || 1302~1340 || || 41대 || [[알 와시크 1세]] || 1340~1341 || || 42대 || [[알 하킴 2세]] || 1341~1352 || || 43대 || [[알 무타디드 1세]] || 1352~1362 || || 44대 || [[알 무타와킬 1세]] || 1362~1383 || || 45대 || [[알 무스타심(카이로 칼리파)|알 무스타심]] || 1377 || || 복위 || [[알 무타와킬 1세]] || 1377~1383 || || 46대 || [[알 와시크 2세]] || 1383~1386 || || 복위 || [[알 무스타심(카이로 칼리파)|알 무스타심]] || 1386~1389 || || 복위 || [[알 무타와킬 2세]] || 1389~1406 || || 47대 || [[알 무스타인(카이로 칼리파)|알 무스타인]] || 1406~1414 || || 48대 || [[알 무타디드 2세]] || 1414~1441 || || 49대 || [[알 무스탁피 2세]] || 1441~1451 || || 50대 || [[알 카임(카이로 칼리파)|알 카임]] || 1451~1455 || || 51대 || [[알 무스탄지드(카이로 칼리파)|알 무스탄지드]] || 1455~1479 || || 52대 || [[알 무타와킬 2세]] || 1479~1497 || || 53대 || [[알 무스탐식]] || 1497~1508 || || 54대 || [[알 무타와킬 3세]] || 1508~1516 || || 복위 || [[알 무스탐식]] || 1516~1517 || || 복위 || [[알 무타와킬 3세]] || 1517 || |||| '''[[셀림 1세]]에게 선양''' ||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include(틀:송사)] [각주] [[분류:아바스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