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사학자]], [[미술사학]], [[역사 관련 정보]] [목차] == 소개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by_Warburg.jpg]] '''"내 마음은 [[함부르크]], 내 피는 [[유대인]], 내 정신은 [[피렌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Abraham Moritz Warburg[* Aby라는 이름은 Abraham의 애칭이다.] 1866.06.13 - 1929.10.26 독일의 문화사학자이자 미술사학자. 미술사에서는 [[미술사학#s-2|도상학]]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지만, 어째 [[에르빈 파노프스키]]에 비하면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쇼미더머니]]와 탁월한 지성이 결합했을 때, 엄청난 파급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남자 == 아비 바르부르크는 독일 [[함부르크]]의 [[유대인]] 은행가 가문인 바르부르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17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이주해온 인물로 '바르부르크'라는 성은 그의 조상이 처음 정착했던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마을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18세기에 바르부르크 가문은 함부르크 인근의 알토나(Altona)[* 지금은 함부르크 시에 병합 되어 있다.]로 이주했고, 바르부르크 은행[* 현재도 함부르크를 근거지로 영업중이다.]을 설립한 바 있다. 이런 바르부르크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은행가로서의 부유한 삶이 보장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정작 아비 바르부르크 본인은 문학과 역사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본(독일)|본]] 대학교에서 종교사학자 스테판 우센어와 문화사학자 칼 람프레히트, 그리고 미술사학자 칼 유스티의 강의를 들었고 [[뮌헨]]과 [[스트라스부르]]에서 학업을 지속했다. 그의 관심사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인문학에 접목하는 것이었고,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영향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을 연구하는 활동을 계속해나갔다. 물론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부유한 집안을 등에 업고 연구에 전념하는 보통의 유대인 학자였겠지만...... == [[쇼미더머니]]!!! == 아비 바르부르크는 연구활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수집한 온갖 종류의 문헌들을 보관하고 계속해서 수집해나가면서, 동시에 젊고 유망한 학자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둘째동생 막스 바르부르크를 찾아가 장자상속권을 포기하는 댓가로 자신의 프로젝트에 돈을 댈 것을 제안하여, 바르부르크 문화학도서관(Warburg Kulturwissenschaftliche Bibliothek[* 독일어 Kulturwissenschaft는 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을 지칭하는 용어지만,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문화학'이라는 새로운 학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영미권에서는 Human Science로 번역하고, 일본에서는 문화학이라고 번역한다. 아무래도 일본의 번역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을 건립하는데 이것이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시작이었다. 도서관을 설립한 후, 아비 바르부르크는 장서수집과 함께 도서관을 관리하고 연구에 종사할 학자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바르부르크 도서관에 들어온 학자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노예-- [[프리츠 작슬]][* 고령에 몸이 좋지 않던 바르부르크 대신에 도서관의 살림살이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훗날 바르부르크 도서관을 함부르크 대학의 부속기관으로 만들었고, 1933년 나치의 등장과 함께 도서관을 런던으로 옮기는 것을 주도했다.]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 그리고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대표적이었고, 훗날 [[언스트 곰브리치]] 역시 이 도서관의 일원으로 합류한다.[* 곰브리치가 합류한 것은 이 연구소가 런던으로 옮긴 뒤인 1936년이긴 하다.] 이게 뭐가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아비 바르부르크는 어디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학자를 추구했기 때문에 대학에서 일하지 않았을 뿐더러, 도서관을 만들면서 자신의 사재[* 물론 동생에게 받은 거지만]로 도서관을 설립한 것이다. 장서의 수집 뿐만 아니라 연구원들의 생계(..)도 자신이 책임졌다는 소리다. 게다가 이 도서관을 만들 당시 바르부르크의 나이는 26살(...) == 영향 == 아비 바르부르크가 활동하던 시기의 미술사는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던 학문이었다. 그러니까 [[조르조 바사리]] 시대에서 이루어졌던, 단순한 형태의 문헌연구+박물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거다. 바르부르크와 동시대의 살았던 [[하인리히 뵐플린]]이 '양식분석'이라는 독자적인 방법론을 만들어냈다면, 바르부르크는 [[도상학]]이라는 방법론을 만들어냈고, 이 두 방법론은 근대적인 학문으로서의 미술사를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바르부르크가 설립한 [[바르부르크 연구소]]의 모체였던 바르부르크 도서관은 런던으로 옮겨가서도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지속해나갔으며, 미술사학의 변방이었던 영국이 미술사학계에서 큰 힘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윌리엄 터너]] 등 일부 화가들만 유럽에 알려졌을 뿐, 유럽 미술사에서 큰 비중 없던 영국의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연구하면서 '연구할 만한 대상'으로 바라본 것도 바르부르크 도서관과 함께 이주한 독일계 학자들이었다. [[언스트 곰브리치]]는 그 공로로 기사작위도 받았다. [[분류:미술사학자]][[분류:독일의 역사학자]][[분류:1866년 출생]][[분류:1929년 사망]][[분류:유대계 독일인]][[분류:함부르크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