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br]{{{-1 [[라틴어]]: Aulus Atilius Serra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조부)[br]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70년 || ||<#800080> {{{#ffffff '''전임''' }}}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71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br][[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71년 집정관)|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186년 집정관)|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br][[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기원전 169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노빌레스]] 가문인 아틸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는 기원전 257년과 기원전 250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아버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는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을 때 [[법무관]]을 맡아 보이족의 공격을 받은 동료 법무관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를 구원한 뒤 만리우스와 함께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기원전 218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임페리움]]을 넘겼다. 이후 기원전 216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아틸리우스 세라누스'라는 [[조영관]]이 동료 조용관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함께 메갈레시아 경기를 처음으로 조직했으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조언에 따라 [[원로원]] 의원들에게 일반 대중과 분리된 좌석을 할당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170년 집정관 아울루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지만, 다른 학자들은 기우너전 185년 [[법무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93년 [[법무관]]에 선임된 뒤 먼 히스파니아 속주로 배정되었지만, 스파르타의 참주 나비스와의 전쟁을 위해 로마 함대의 지휘권을 맡았다. 그는 함대와 함께 그리스에 도착했고 나비스가 [[아이톨리아 동맹]]에 의해 살해된 뒤 스파르타가 로마의 동맹인 [[아카이아 동맹]]에 가담하자 아카이아 지도자 필로포이멘이 스파르타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도왔다. 기원전 191년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안드로스 섬에서 셀레우코스 함대를 격파한 뒤 법무관 [[가이우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로마로 귀환했다. 기원전 173년 2번째로 법무관을 맡아 로마에서 사법 재판을 관장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평화 협약을 갱신했다고 한다. 기원전 172년, [[원로원]]은 로마에 대한 적대행위를 멈추지 않는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병력을 모집할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그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186년 집정관)|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를 사절로 보내 페르세우스와 협상하게 했다. 두 사람은 에페이로스, 아나톨리아, 테살리아를 잇따라 들러서 그곳의 주민들에게 로마 편을 들라고 촉구했다. 이후 피네이오스 강에서 페르세우스 왕과 만난 그들은 페르세우스에게 평화에 대한 거짓된 희망을 안겨주고 로마로 사절을 보내 협상을 계속하도록 설득했다. 페르세우스는 이를 믿고 로마에 사절단을 보냈고, 로마는 그 사이에 군대를 조직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 후 필리푸스와 세라누스는 보이오티아로 가서 그곳의 도시국가들에게 "보이오티아 연맹을 해체하고 로마의 보호를 받으라"고 설득했으며, 뒤이어 에우보이아와 펠로폰네소스를 방문해 로마에게 지지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 해 겨울에 로마로 돌아온 그는 기원전 171년 초 선봉대를 이끌고 발칸 반도로 건너가 라리사를 급습한 뒤 할키스에 집결한 로마 해군에 합류했다. 기원전 170년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만키누스가 마케도니아에서 페르세우스와 대결하는 동안, 그는 리구리아를 배정받아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여러 도시를 순회했고 그 해 말에 로마로 돌아와 다음 고위 행정관 선거를 실시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