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br]{{{-1 [[라틴어]]: Aulus Postumius Albi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아버지)[br][[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99년 집정관)|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아들?)[br][[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110년 집정관)|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아들?)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51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66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br][[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52년 집정관)|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기원전 151년 집정관)|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기원전 150년 집정관)|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br][[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기원전 150년 집정관)|마니우스 아킬리우스 발부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 가문인 포스투미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는 기원전 18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삼촌으로 기원전 174년 집정관을 역임한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파울룰루스]]와 기원전 173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173년 집정관)|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있었다. 기원전 168년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지휘하에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여했다. [[피드나 전투]] 이후 사모트라케로 피신한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단의 일원을 맡았지만 임무는성공하지 못했다. 나중에 페르세우스가 항복하자, 파울루스는 그에게 페르세우스와 장남 필리포스를 로마로 이송하게 했다. 이후 13년간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다가 기원전 155년 로마 시의 사법 재판을 담당하는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당시 두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66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이탈리아 외곽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로마의 최고 재판관을 맡았고, 이 자격으로 원로원을 소집하고 회의를 주재했다. 이때 아테네에서 사절단이 찾아왔는데, 이중에는 카르네아데스, 셀레우키아의 [[스토아 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 리키아의 크리톨라오스 등 3명의 철학자도 있었다. 헬라 문화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그는 이들에게 로마 귀족 젊은이들을 상대로 철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로마에서 그리스 철학 열풍이 확산되었다. 그는 연대기와 시를 집필했는데, 현존하지는 않지만 두 작품 모두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대 카토]]는 그가 서문에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언어와 문체가 불완전할 수 있으므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알비누스에게 글을 쓰도록 강요하지 않았으므로 자비를 요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폴리비오스]]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어와 교육에 관심이 많았지만 지나치게 수다스럽고 공허하며 자기 칭찬이 과한 모습을 보여서 저명한 로마인들 사이에서 헬라 문화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고 비판했다. 반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잘 교육받고 웅변술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밝혔다. 기원전 154년 [[페르가몬 왕국]]의 국왕 [[아탈로스 2세]]와 [[비티니아 왕국]]의 국왕 [[프루시아스 2세]] 사이의 전쟁을 종식시키는 임무를 맡은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51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기원전 151년 집정관)|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제비 뽑기를 통해 루쿨루스가 가까운 히스파니아 속주로 가서 켈티베리아인들과의 전쟁을 수행하기로 했고, 그는 이탈리아에 남아 행정을 주관했다. 기원전 146년 [[아카이아 전쟁]]을 벌인 [[루키우스 뭄미우스 아카이쿠스]] 휘하 [[레가투스(로마)|레카투스]]를 맡았다. 이때 이스트미아 지협과 [[델포이]]에 그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99년 집정관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99년 집정관)|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기원전 110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110년 집정관)|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그의 아들이라는 설을 제기하지만,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는 두 집정관의 조부와 부친에 대한 언급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다른 기록들 역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