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会津藩 (あいづばん) 현재 [[후쿠시마현]] 서부의 아이즈 지방을 지배한 일본의 옛 [[번(제후국)|번]]이다. == 역사 == 아이즈 지방은 [[센고쿠 시대]]에는 [[https://m.blog.naver.com/sten1/10188451253|아시나 가문]]의 영지였으나, 북쪽으로 아이즈와 이웃한 오키타마 지방([[야마가타현]] 남부 일대)에 근거지를 둔 다테 가문의 [[다테 마사무네]]가 아시나 가문을 멸망시키고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었으므로 히데요시가 아이즈 지방을 몰수해서 [[가모 우지사토]]에게 하사했다. 이후 다테 마사무네가 잇키 선동 혐의를 받으면서 오키타마 지방까지 몰수되어 가모령 아이즈 번에 더해져, 총 91만 9천 석이 되었다. 가모 우지사토는 아시나 가문의 거성이었던 구로카와 성(黒川城)을 개축하고 와카마쓰 성(若松城)으로 이름을 고쳐, 이후 아이즈 번의 번청이 된다. 가모 우지사토 사후 분란이 발생하여 후계자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B%AA%A8_%ED%9E%88%EB%8D%B0%EC%9C%A0%ED%82%A4_(1583%EB%85%84)|가모 히데유키]]는 다시 우쓰노미야(宇都宮)로 감/이봉(12만 석)되고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이 [[니가타|에치고]]에 있던 우에스기씨(上杉氏).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사도 섬과 쇼나이 지역([[야마가타현]] 북부 일대)은 그대로 보유한 채 에치고를 반납하고 아이즈를 본거지로서 받은 것이기에, 아이즈 번의 관할 구역은 아이즈 + 오키타마 + 사도 + 쇼나이 등 120만 석 규모로 불어났다. 그러나 우에스기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오키타마 30만 석[* 현대에는 오키타마 지역의 중심 도시인 [[요네자와시|요네자와]](米沢)의 이름을 따서 요네자와 번으로 부른다. 오키타마의 위치는 아이즈 번 최북단이다.]으로 전락하게 되고, 쇼나이 지역은 [[모가미 요시아키]]에게 뜯겼고, 사도 섬은 [[에도 막부]]의 직할지가 되었다. 남은 60만 석 규모의 아이즈 번에는 옛 주인 가모 히데유키가 복귀했다. 이후 가모가는 가모 히데유키의 아들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B%AA%A8_%EB%8B%A4%EB%8B%A4%EC%82%AC%ED%86%A0|가모 타다사토]]가 후사 없이 급사하여 단절될 위기에 처했으나, 타다사토의 어머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인 점이 참작되어, 동생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B%AA%A8_%EB%8B%A4%EB%8B%A4%ED%86%A0%EB%AA%A8|가모 타마토모]]가 가모 가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이 대가로 [[마츠야마시|이요 마츠야마]]로 감/이봉(24만 석)되고, 후임으로 [[가토 요시아키]]가 40만 석으로 들어오지만, 아들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D%86%A0_%EC%95%84%ED%82%A4%EB%82%98%EB%A6%AC|가토 아키나리]]가 막부 법령 무시 및 폭정, 가신과의 불화를 이유로 [[가이에키]] 당하고,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배다른 동생이자 [[공처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아내가 무서워 숨겨둔 자식인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C%8B%9C%EB%82%98_%EB%A7%88%EC%82%AC%EC%9C%A0%ED%82%A4|호시나 마사유키]][* 마츠다이라(松平) 성은 서자인 3대 번주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3%B0%EB%8B%A4%EC%9D%B4%EB%9D%BC_%EB%A7%88%EC%82%AC%EC%B9%B4%ED%83%80_(%EC%95%84%EC%9D%B4%EC%A6%88_%EB%A7%88%EC%93%B0%EB%8B%A4%EC%9D%B4%EB%9D%BC%EA%B0%80)|마츠다이라 마사카타]] 때 회복]가 영주가 된다. 호시나 마사유키는 20만 석의 야마가타 번[* 아이즈 번의 이웃으로 위의 모가미 요시아키의 영지였다가, 요시아키 사후 가중소동으로 모가미 가가 쫓겨나면서 4분된 번이다. 모가미 대신 도쿠가와 막부의 후다이 도리이 가문이 들어왔으나 후사가 끊겨 호시나 마사유키가 번주가 됐다.]을 다스리고 있다가 3만 석이 늘어난 23만 석 규모로 아이즈 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한편, 가토 요시아키가 아이즈 번에 옮겨왔을 때 시라카와 10만 석을 떼어 니와 나가시게([[니와 나가히데]]의 아들)에게 줬고, 니혼마츠 3만 석과 미하루 3만 석을 지번으로 분리해 각각 요시아키의 사위(마츠시타 시게츠나)와 3남(가토 아키토시)에게 봉했는데, 가토 아키나리가 가이에키될 때 니혼마츠 번과 미하루 번도 모두 가이에키되고 각각 니와 가(위의 나가시게의 아들 미츠시게) 아키타 가([[안도 지카스에]]의 손자 도시스에)가 옮겨와, 아이즈 번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그러면서 니혼마츠 번은 7만 석, 시라카와 번은 4만 석, 미하루 번은 2만 석 증가했는데, 17만 석이 감소한 아이즈 번과 대비된다. 9대 번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교토 치안유지를 담당하여 [[신센구미]]의 상관으로도 유명하다. 이 영향으로 폐번치현 이후에도 일본 경찰조직에 아이즈 계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물론 대놓고 번벌로 위세를 부렸던 삿쵸와 달리 고위층들은 날아가서 실무진 정도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아이즈 번은 [[보신전쟁]] 당시 신정부군의 주적이 되기도 하였다. 토호쿠 지역 번들과 오우에쓰 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을 결성하여 신정부와 대항했으나, 이때 여성들까지 총을 들고 나와 싸우거나[* 드라마 [[야에의 벚꽃]]의 주인공인 니이지마 야에(新島八重)도 이때 참전했다고 한다.], 본대가 패전했다는 헛소문을 들은 소년병 집단 백호대가 쓰루가 성 근처 이모리 산에서 자결하는 등 안 좋은 일이 많았다. 이후 메이지 정부의 기도 다카요시는 아이즈 번 인구의 대부분을 혼슈 섬 최북단 토나미 번(아오모리 현 무쓰 시)으로 강제이주시킨다. 1871년 10월까지 4,332가구 17,327명이 이주되었으며 아이즈 번에 잔류한 사람들의 신분은 모두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1928년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 [[마츠다이라 세츠코]][* 신정부와 아이즈 번의 불편한 관계와는 달리, [[세츠코 비]]는 시어머니 [[데이메이 황후]]로부터 가장 총애받은 며느리다.]를 [[다이쇼 덴노]]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비(妃)로 맞이하는 등 [[일본 황실]]에서는 아이즈 번 및 마츠다이라 가문과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현재도 구 아이즈 번 지역 사람들은 [[일본 정부]]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이 없다고 하며 실제로 메이지 유신 당시 주축이 된 조슈-사쓰마 세력의 후신들이 중심인 자유민주당의 세력이 다른 도호쿠 현들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을사늑약]]의 공범 중 하나인 [[하야시 곤스케]]의 고향이 이곳이다. 또한 이곳에서 일어난 백호대 자결 사건은 러일전쟁과 2차대전 시기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로 널리 이용됐다. 덧붙여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은혼]]의 등장인물 [[마츠다이라 카타쿠리코]]의 모델이다. [[분류:에도 시대]][[분류:일본의 옛 행정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