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아편 전쟁.png|width=100%]]}}}|| || 아편전쟁의 전개 || [목차] == 개요 == '''아편전쟁'''([[阿]][[片]][[戰]][[爭]])은 [[1840년]]과 [[1856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과 [[청나라]]의 무역 수지 문제로 일어난 전쟁이다. 정확히는 계속 청으로 유출되는 은화(銀貨)를 영국이 다시 회수하기 위해 청에 아편을 살포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전쟁이다. ==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제1차 아편전쟁)] ==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제2차 아편전쟁)] == 영향 == 중국은 아편전쟁 전까지만 해도 대국, 동양의 잠자는 사자 등의 '침묵의 강자'라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선뜻 시비를 걸지 않았으나 전쟁 이후 허약한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자 청은 서구 열강[* 영국의 아편전쟁 이후 미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가담해서 청을 조금씩 갈취하기 시작했다.]의 덩치 큰 [[호구(유행어)|호구]],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비슷한 시기 참전한 [[크림 전쟁]]에서는 두 나라가 무려 40만 대군을 투입해 [[러시아 제국]]을 상대한 데 비해, 2차 아편전쟁에서는 겨우 20분의 1 정도인 2만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청나라의 무릎을 꿇렸다. 얼마나 동서양의 국력 차이가 벌어져 있었고 중국이 동네북 취급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후로도 [[중일전쟁]]까지 거의 100년 동안 중국은 외세의 침탈에 시달리며, 중국인들은 이 기간을 치욕의 시대로 기억한다.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에 의해 청이 패배했고, [[조선]]도 이 소식을 듣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 [[청나라|청]]이라는 거대한 방패 뒤에서 평화를 수백 년 간 누리던 조선은 [[세도정치|정치적으로 썩을 대로 썩어있었기에]], 서양 열강이라는 새로운 적들이 등장하자 백성들 사이에는 조선도 서양인들에게 멸망 당하지 않을까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이는 [[동학]]이라는 신흥 종교의 창설로 이어졌다.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은 180년 넘게 지난 현재도 [[마약]]과 관련된 범죄만큼은 무관용 원칙의 강경 대응을 고수하고 있다. 아편전쟁으로 처참한 패배을 맛보면서 이것이 중국사 전체로 봐도 대대적인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광서제|광서신정]] 때부터 아편단속을 꾸준히 강화해온 결과, 중국 및 대만은 물론 타 [[중화권]] 국가인 [[싱가포르]]나 중국 주변 [[한자문화권]] 국가들에서도 마약 정책은 서양이나 한자문화권 밖의 국가들보다 법률이 엄격한 편이다. 특히 중국의 마약 정책은 주변 국가들과 비교해도 유달리 엄격해졌으며 일정량 이상 제조, 유통까지 가게 되면 최소 [[종신형]]으로 시작해서 최고 [[사형]]까지도 집행할 수 있을 정도다. 옆나라 일본도 마약에 대해서는 역시 강경 대응하며, 한국 역시 마약 관련 처벌은 서방 선진국에 비해 무거운 편에 속하는 등 동아시아 국가들은 마약 관련 처벌이 매우 무거운데, 아편전쟁의 후유증이 그 근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중]] 성향의 한국 누리꾼들도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마약 때문에 경을 쳤다는 소식을 듣거나 마약으로 인해 어느 특정 인물이 구속 또는 소환 관련 기사가 올라오면 진보, 보수 진영 가릴 것 없이 마약만큼은 중국의 강경책을 옹호하고 찬양하는 등 전반적인 국민 여론도 마약을 죄악시하는 편이다.[* 중국처럼 마약 사범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하자는 누리꾼들도 있다.] 다만 마약에 대한 강경책과는 별개로 한국 내에서 아편전쟁을 이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호란의 업보라고 보는 시선도 존재하긴 한다. 중국의 이런 강경책은 외국인이라도 다를게 없어서 [[한국인]] 마약 사범이 체포되자 바로 사형 때리고 실제로 집행한 일이 2014년 말에도 있었다. 참고로 이 당시 한국인 마약사범을 체포하고 중국은 바로 [[한국 정부]]에 "사형을 집행할 것."이라고 통보를 날렸으며, 이를 접수한 [[한국 정부]] 측에서 "형을 집행하지 말고 당장 한국으로 양도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중국 정부는 이를 당연히 거부했고 형을 집행한 다음에 집행이 끝났다고 통보를 전하며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2009년에는 파키스탄계 [[영국인]] 아크말 샤이크가 마약 밀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영국 정부]]에서는 샤이크의 정신병 경력을 제시하며 샤이크의 감형을 호소했지만, 중국은 샤이크를 사형시켰다. 유럽인이 중국 공산당 집권 후 처형을 당하는 전례 없는 사건에 대해 영국과의 외교 문제로까지 떠올라 큰 갈등을 일으키기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048046|했다.]] 이 사건으로 양국이 벌인 기싸움은 몹시 오래 갔다. 세간에서 다시금 아편전쟁을 떠올린 것은 덤. [[싱가포르]]는 아예 입국 신고서 서류에 마약 밀수는 {{{#red '''사형'''}}}[* 영문으로 '''{{{#red DEATH}}}'''를 강조하고 있다.]이라고 경고 문구가 써져 있다. 다만 이에 대해 과장된 면도 없지 않은데, 단순 마약 소지 및 흡입 범죄는 당연하지만 마약 제조 및 판매, 유통 범죄에 비해 엄벌되지 않는다. 또한 사회 유력인사들이 암암리에 빠져나간다는 점도 그렇다. 중국 유명 가수인 인샹제나 [[성룡]]의 아들인 방조명은 그냥 단순 소지 및 흡입만 해서 징역 6개월 및 벌금에 그쳤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며 중국 네티즌들에게 쌍욕을 먹었다. 대표적인 [[하드 드러그]]인 헤로인 유통은 감소했지만 필로폰과 케타민 등의 [[향정신성 의약품|향정신성 마약들]] 경우에는 250만여 명이 이를 이용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 이상으로 심각한 마약은 'China White'라고 불리는 오피오이드계 마약 [[펜타닐]]로, 펜타닐은 중국보다 중국 밖, 특히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에서 가장 심각한 마약이며 이를 제작하여 파는 [[흑사회]] 같은 중국 범죄조직이 뿌린 펜타닐로 인해 매년 이 지역에서 7~8만명씩 오피오이드 중독 사고로 인해 사망하는데 그 중 80% 이상이 이 펜타닐 과다흡입이다. 한편, 제1차 아편전쟁 이전 아편 무역에 정면으로 맞섰던 [[임칙서]]는 현재 중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허나 대중국 무역 침탈은 가속했어도 아편 자체의 판매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편이란 게 양귀비 가공하면 뚝딱 나오다 보니 중국이 아편의 국산화에 성공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영국령 인도의 아편들은 판로를 잃었고, 이는 영국으로 수출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영국은 왜 청이 아편을 단속했는지 뒤늦게 깨달았지만 때는 늦어 영국에 아편이 대량 보급된 후였다. == 기타 == * 이 아편전쟁 때문에 [[대한민국]]의 서브컬처 홈페이지 등에서, 소위 [[약빨다|약을 빨았다]]고 일컬어지는 영국(인)의 각종 기행이나 해괴한 물품, 작품들을 일컬어 '''[[홍차]]에 아편을 탔다'''고 표현하는 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 인도의 아편을 동인도회사와 연결한 민족이 [[파르시]]였다. 그들은 이를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다. * [[학교대사전]]에서는 [[담배]]를 둘러싸고 교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사투를 아편전쟁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다. 담배도 아편과 마찬가지인 마약으로 보기도 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비유로 보인다. * 아편으로 인한 청의 국가기강 해이와 몰락을 지켜본 것을 계기로 동북아 3개국은 마약에 대해 다른 지역들보다 강력히 엄벌하는 전통을 갖게 된다. 현재도 한일은 기본 징역형, 중국은 사형까지 집행할 정도로 마약사범을 강력히 처벌하는 이유. 심지어 대한민국에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아편을 넣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편에 관한 죄]]를 따로 두고 있는데, 현재 사실상 사문화된 이 법률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 또한 아편전쟁의 결과물이다. * 훗날 중국이 아편 등 마약류를 강력하게 규제하는 건, 아편전쟁에서 비롯된 역사적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또한 공산주의 진영으로서 기독교 등을 배제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 세력이었던 영국이 중국에 아편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 === 아편의 해악성은 과장되었다? === * [[https://gall.dcinside.com/m/alternative_history/709523|당시 청나라에서 복용하던 아편에 대한 이야기]] * [[https://gall.dcinside.com/m/alternative_history/717289|청나라의 은 유출에 대한 가설]] [[수정주의]]적 시각으로는 당시 아편의 해악성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는 시각도 존재하며, 아편의 해악성은 후대의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과장하였다는 이론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프랑크 디쾨터(Frank Dikötter)'''가 대표적인데[* [[마오쩌둥]] 평전으로 유명한 그 학자가 맞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의견이기는 하나, 아직까지는 소수의견이다. == 미디어 == [youtube(AJIcA2E8ce4)]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1997년에 [[중국]]에서 만들어져흥행에 성공한 영화 <아편전쟁(鴉片戰爭, The Opium War)>이 있다.[* 당시 중국 영화로서는 최대 규모인 180억을 들였으며, 40척의 범선과 수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제작했다.] 제1차 아편전쟁을 다뤘다. 국내에도 개봉했지만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근, 현대사 강의를 하는 교수들 가운데 시청각 자료로 즐겨 쓰는 경우도 있다. [[임칙서]] 역은 [[삼국연의(1994)|84부작 삼국지]]에서 [[조조]]로 나온 중국의 국민배우 포국안이 맡았다. [[영국군]]들이 "낙후된 무기로 우리랑 맞붙냐?"라고 비웃자, 곁에서 한 영국 장교가 "[[중국]]에는 의가 있으니 그들은 그걸로 싸우는 겁니다"라고 좀 어이없는 말을 한다든지, 비겁자로 나오던 인물[* 작중에서 광둥성 광저우의 총병인 한조경.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처형할 죄인도 맘대로 보내주질 않나, 밖으로 영국 마약상과 결탁해 아편 무역을 눈감아주고 매년 아편 200여 상자를 빼돌렸다. 수십만 냥에 달하는 뇌물을 챙겨 배를 불리며 전형적인 [[탐관오리]]의 행세를 했다. 결국 임칙서에게 딱 걸리며 깜빵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이 마지막 광동성[* 광저우. 군문 책임자인 장군 관천배가 지키고 있었던 지역이다.]이 영국군에게 털릴 때 "매국노였으나 청을 위하여 죽겠다"고 나선다.[* 슬픈 역사를 담아내기 위해 실제 역사와 조금 다르게 촬영되었다. 아무튼 여러모로 중국 [[민족주의]]적인 요소들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평이다.] 약간의 개그씬도 있다. 황제의 특사[* 전권을 위임받은 흠차대신.]로 엘리엇 제독을 만나러 간 기선이 식사를 대접받는데,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사실상 날고기였던 레어 [[스테이크]]를 대접받고는 칼로 썰다 육즙이 나오는 걸 보고 더는 손대지 않고 치워 버리며 "날고기나 먹으니 성격이 흉폭해졌나보지"라며 [[영국 요리]]를 디스한다. 통역을 통해 그 말을 들은 엘리엇 제독은 "[[중국 요리]]가 산해진미인 건 맞는데, 대신에 당신네들은 대포가 쓰레기잖소?"라며 응수한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data&no=1673823|#]] 아편전쟁 작중에서는 좀 생략된 것이 있는데, 기선의 죄목이다. 감히 청나라의 영토인 홍콩을 영국[* 청나라 입장에서는 명백한 [[오랑캐]]였다. 야만스럽고 무지하다하여 말로 설득하라 했으니 말 다한 것. 다만 그 무시하던 양인에 털털 털린 것이 청나라였으니 대국으로서의 위엄을 지키지 못 한 것이였다.]에 맘대로 할양했다는 것이 그것. 그 후 기선은 불행하게도 흠차대신과 양광총독직에서 해임.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흑룡강으로 유배되는 형을 받았다.[* 당시 임칙서를 몰아가 관직에서 파면시켰는데, 결국 자신도 관직에서 짤려 먼 타지에 유배당했으니 [[자승자박]]인 셈.] 임칙서 또한 병사들을 선동해 국가에 누를 끼쳤다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유배된다. [[이재학]]이 그린 만화에서도 아편전쟁 당시 무협 고수들이 나오는 게 있었다. 1995년 여름 [[한가위]] 특선 추천만화로 [[씨네21]]에서 소개한 적도 있는데, 무협 고수들이 영국군 총기에 마구 죽어나가는 현실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1984년 중국본토에서 이연걸의 [[소림사]] 흥행에 고무되어 당시 남권 최고수였던 구건국을 주연으로 하여 제작한 영화 남권왕도 아편전쟁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양 제국주의가 아편을 대량으로 판매하여 갈수록 중독자가 늘어나자 흠차대신 임칙서가 아편근절정책을 강력히 펴는 한편, 서양의 침략에 대비해 서양의 최신총포 설계도를 광불철공소 지배인이자 남권의 고수인 임해남에게 의뢰한다. 임해남은 사교무리, 서양인과 결탁한 임칙서의 정적들에 맞서 가까스로 총포를 제작하여 해안경비대에게 보낸다. 또한 [[서태후]]의 일대기를 다루는 사극에서 2차 아편전쟁이 단골로 등장한다. 이른바 서태후 더 비기닝(?)이라 할만한 시기로, [[함풍제]]가 아우 [[공친왕]]에게 경성을 맡기고 열하로 도망가는 사이 영불연합군이 [[원명원]]을 잿더미로 만드는등 청조의 무능과 쇠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중국사의 암흑기인지라 이들 아편전쟁기를 다루는 사극들은 [[강건성세]]를 배경으로 하는 흔한 청나라 사극에 비해 몹시 우울한 분위기이다. 그나마 청말민초는 중국에서 높이 평가하는 [[신해혁명]]을 묘사하기 때문에 제법 '새 시대에 대한 희망' 같은게 묘사되지만, 18세기 초중반의 청조를 다룬다면 그저 그렇다. [[분류:청나라의 역사]][[분류:빅토리아 시대]][[분류:프랑스 제2제국]][[분류:동아시아의 전쟁]][[분류:19세기]][[분류:영중관계]][[분류:아편]] [include(틀:포크됨2, title=아편전쟁, d=2022-07-08 10:5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