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Achmad Nawir.jpg|width=100%]] || || 이름 ||아흐맛 나위르[br](Achmad Nawir) || || 생년월일 ||[[1911년]] [[1월 1일]] || || 사망년월일 ||[[1995년]] [[4월]] (항년 84세) || || 국적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width=28]] [[인도네시아]] || || 출신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 || 포지션 ||하프백 || || 신체조건 ||168cm | 65kg || || 소속팀 ||HBS 수라바야 (?-?) || || 국가대표 ||1경기 / 0골 (1938) || [목차] [clearfix] == 개요 == [[네덜란드령 동인도]](現 [[인도네시아]])의 전 축구 선수 겸 [[의사]].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 === 선수 생활 === 나위르는 HBS 수라바야에서 뛰다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일본]]의 기권[* [[중일전쟁]]으로 인해 기권했다.]으로 인해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프랑스 월드컵]]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주장]]으로 대회에 참가했지만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는 체급차가 너무 심한 상대였다. 결국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헝가리에 0대6으로 참패를 당하고 단 한 경기만에 짐을 싸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독립을 했음에도 아직 [[FIFA 월드컵|월드컵 본선]] 진출을 못하고 있는 관계로 나위르가 현재까지 인도네시아 축구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 주장인 셈이다. === 월드컵 이후 === 1939년에 정식으로 [[의사]]가 된 나위르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의료 여단 소속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전쟁 이후엔 [[수라바야]]에 진료소를 개업했다. == 뒷이야기 == * 나위르는 [[레오폴트 킬홀츠]]와 함께 [[FIFA 월드컵]] 경기 중 [[안경]]을 착용한 몇 안되는 선수였다.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월드컵]] 때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상대팀]]의 [[주장]]으로 만났던 [[샤로시 죄르지]]와는 나중에 둘다 [[박사|박사학위]]를 받게 되는 공통점이 있다.[* 샤로시는 나중에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월드컵에서 같은 경기를 치른 양팀의 주장이 박사학위자가 되는 경우는 현재까지 이 경우가 유일하다. [각주] [[분류:1911년 출생]][[분류:1995년 사망]][[분류:인도네시아의 남자 축구 선수]][[분류:수비수]][[분류:의사]][[분류:인도네시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