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learfix] == 개요 == [[1912년]] [[6월 8일]]~[[1986년]] [[5월 3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교육자.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 생애 == 안병무는 1912년 [[평안남도]] [[안주시|안주군]]에서 태어났다. 1930년 백부인 안이식이 도산 [[안창호]]에게 보내는 밀서를 들고 [[중국]] [[상하이시|상해]] 유학을 떠났고, [[푸단대학]]에 재학 중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자 [[천도교]] 청우당원의 신분으로 푸단대학 학생의용군에 가담해 항일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중국 19로군에 편입해 대일전에 참전했다. 대일전에 참전하는 한편 상해 한인학우회에 가입해 재무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37년 [[광저우시|광저우]] [[중산대학]] 법학원 정치과를 졸업하고, [[난징시|난징]]에서 한국국민당 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38년 부터 1940년 8월 까지 [[장사시]]의 중국어 일간지 '역전', '항전일보', 반월간지 '건군반월보' 등에 일제를 비판하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실정 및 독립운동 현황을 기고하였다. 1940년 9월에는 '일본 제국주의 철제 하의 조선'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한국 내의 일본의 폭정을 폭로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0년 9월 [[광시성]] [[대만 군관학교|중국중앙 군관학교]] 제6 분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고, [[국민혁명군]] 제3전구에서 대적 선전을 담당하였다. 1941년 부터 1943년 까지 [[장시성]] [[상라오시|상라오]]에서 제3전구 정치부 전선일보사 편집조사부장을 맡았고, 1943년 10월 광복군 사령부에 합류해 사령부 선전부 비서 및 선전조장으로 활동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한 대적선전에 앞장섰다. 1944년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해 [[임시의정원]] 비서를 역임했고, 주중 미국대사관에서 한국인 공작반을 신설하자 [[엄항섭]], [[송면수]], [[안우생]], 박영만 등과 파견되어 [[미국 전략사무국|OSS]]와 광복군의 연합작전에 공을 세웠다. 1945년에는 중한문화협회 비서로도 활동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천도교 정우당에서 활동하였고, 1946년 [[간도]] 내 동포들의 실정을 보고하는 한편,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의 진상조사단으로 활약했다. 1947년 [[좌우합작위원회]]와 건민회를 중심으로 통일전선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자 [[조봉암]], [[김약수]] 등과 상임위원에 선출되었고, 천도교총본부 비서로 활동했다. 건국 후 1949년 주불공사대리 [[공진항]]의 비서로 주불공사관에서 근무하였고, 1950년 4월 윤용규 감독의 영화 [[마음의 고향]]을 한국 영화 최초로 프랑스에 수출하도록 주선하였다. 공진항 공사의 농림부 장관 입각으로 귀국 후 1950년 11월 [[6.25 전쟁]]으로 인한 천도교의 전시체제 순응을 위해 조직된 천도교 보국연맹에 기획위원에 선임되었고, 국제연합 한국재건단에서 근무하다가 1955년 경제사절단 기술보좌역, 1957년 국립체신학교 부교장을 지냈고 이후 옥천고등학교, [[금곡고등학교(경기)|금곡고등학교]], [[의정부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퇴임 후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광복군동지회 부회장을 지내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예후에 힘썼고,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86년 5월 31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보훈병원|보훈병원]]에서 사망했다. == 여담 == * 1982년 손자를 대동해 [[조선일보]]가 주관한 [[독립기념관]] 모금운동에 참여해 성금을 기탁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손자에게 역사의 산교육장이 될 것 같아서 같이 참여했다고 하며, 온 국민의 합심으로 독립기념관 건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2090900239110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2-09-09&officeId=00023&pageNo=10&printNo=18901&publishType=00010|#]] * 2000년 [[3.1 운동]] 82주년을 맞이해 아들 안재정씨가 안병무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당시 중국에서 쓴 기고문 및 기사들을 번역한 문서들을 공개했다. 안재정은 당시 기사 및 기고문들을 번역하기 위해 1991년 부터 중국어를 공부해 10 여 년 간 직접 번역했다고 한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0/02/28/2000022870229.html|#]] * 1973년 제1차 상하이사변 당시 복단대학 학생들이 대일항쟁에 의용군으로 참여한 과정과 [[윤봉길]]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에서 사용한 폭탄을 제조한 과정을 [[조선일보]]에 기고하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분류:국민혁명군/군인]][[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안주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교육자]][[분류:1912년 출생]][[분류:1986년 사망]][[분류:푸단대학 출신]][[분류:중산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