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6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안자정}}}[br]安子精'''}}} || || '''초명''' ||안재숙(安在璛) 또는 안소(安塑) || || '''자''' ||자정(子精) || || '''호''' ||분암(憤庵, 墳庵) 또는 야계(倻溪) || || '''본관''' ||[[순흥 안씨]][* 참찬공파 28세 토(土)변 재(在) 항렬. 족보명은 안훈(安壎).] || ||<|2> '''출생''' ||[[1880년]][* 순흥안씨대동보 2권 640쪽에는 188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12월 8일]] || ||[[전라도]] [[곡성군|곡성현]] [[오곡면|오지면]] 대리[br](현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대동마을)[* [[순흥 안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안재창]]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 ||[[1957년]] [[2월 22일]][* 순흥안씨대동보 2권 641쪽에는 1958년 2월 12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 || '''묘소'''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봉조리 현조마을 || || '''상훈''' ||건국포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안재창]]은 그의 6촌 재종형(再從兄)이다. == 생애 == 1880년 12월 8일 전라도 곡성현 오지면 대리(현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대동마을)에서 아버지 안홍섭(安洪燮, 1854. 10. 17 ~ 1925. 9. 25)과 어머니 [[함안 조씨]](? ~ 1893. 5. 10)[* [[생육신]] [[조려]]의 후손으로, 조성순(趙性順)의 딸이다.]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그의 영특함을 알아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301|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으로부터 자정(子精)이라는 자(字)를 받았고, 20세 되던 1899년에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82|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의 문하에 들어가 한문을 수학했다. 이후 1901년 곡성군 오지면 덕양리(현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 덕양마을) 51번지에 [[http://mfis.mpva.go.kr/memorial/movementView.do?gubunCode=ALL&sid=139&pageIndex=96&searFacilgubun=&searTopicsort=&searAddr_sigun=&searMpvabranch=&searGbn=tit&searTxt=|완계정사]](浣溪精舍)를 건립하고 후진양성을 시작했다. [[경술국치]] 후 1911년 전 호남 의병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760|이석용]](李錫庸)이 의병활동을 재개하려 군자금을 모집할 때 [[목화]] 20근을 군자금으로 제공했고, 또한 이석용이 의병활동의 거점조직으로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을 조직하자, 이듬해인 여기에 입단해 이듬해인 1912년 [[남원시|남원군]]지역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13년 이석용이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조선인 형사 김대형(金大亨)에게 체포되자, 곧 귀향해 1913년부터 다시 완계정사에서 후학교육에 전념했다. 이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비밀리에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1941년에는 의병장 이석용의 추모비를 건립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http://mfis.mpva.go.kr/memorial/movementView.do?gubunCode=ALL&sid=139&pageIndex=96&searFacilgubun=&searTopicsort=&searAddr_sigun=&searMpvabranch=&searGbn=tit&searTxt=|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57년 2월 22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순흥 안씨]][[분류:곡성군 출신 인물]][[분류:1880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건국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