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하스몬 왕조 국왕)] [include(틀:역대 이스라엘 대제사장)] ||<-3><#FFFFF0> '''{{{#000000 하스몬 왕조 11대 군주}}}''' [br] {{{+2 {{{#000000 '''מַתִּתְיָהוּ | 마타디아'''}}}}}}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png|width=100%]]}}} || ||<|4><#FFFFF0> '''{{{#000000 제호}}}''' ||<#FFFFF0> '''[[한국어|{{{#000000 한국어}}}]]'''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 || ||<#FFFFF0> '''[[히브리어|{{{#000000 히브리어}}}]]''' ||מַתִּתְיָהוּ || ||<#FFFFF0> '''[[그리스어|{{{#000000 그리스어}}}]]''' ||Αντίγονος || ||<#FFFFF0> '''[[라틴어|{{{#000000 라틴어}}}]]''' ||Antigonus II Mattathias || ||<-2><#FFFFF0> '''{{{#000000 존호}}}''' ||코헨(כֹּהֵן , 제사장)이자 국왕 || ||<-2><#FFFFF0> '''{{{#000000 생몰 년도}}}''' ||미상 ~ 기원전 37년 || ||<-2><#FFFFF0> '''{{{#000000 재위 기간}}}''' ||기원전 40년 ~ 기원전 37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하스몬 왕조]] 11대이자 마지막 군주. == 행적 == 하스몬 왕조 10대 군주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이다. 기원전 63년 아버지가 [[폼페이우스]]에 의해 폐위된 뒤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끌려갔다. 기원전 57년 감옥에서 아버지와 함께 탈출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간 뒤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진압당하고 도로 로마로 끌려갔다. 기원전 49년, 아버지가 형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석방된 뒤 시리아로 파견되어 폼페이우스와 대적하는 2개 군단에 가담했다가 도중에 독살당했다. 이후 그는 자신을 하스몬 왕조의 유일한 상속자로 여기고, 어떻게든 왕위를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기원전 47년, 시리아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찾아가 이두매인 안티파트로스와 [[요한 히르카노스 2세]]의 찬탈을 규탄하며, 자신이 아리스토볼로스 2세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로서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안티파트로스가 지원해준 덕분에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하기도 했고, 막대한 뇌물을 받은 적도 있었기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42년, 처남 프톨레마이오스 메네이의 지원에 힘입어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헤로데 대왕|헤로데]]에게 패배하고 산악 지대에 숨었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이 발발하자, 그는 파르티아 편에 서기로 마음먹고, [[파르티아]] 사령관 [[파코로스 1세]]로부터 전사 500명을 지원받은 후 예루살렘으로 잠입해 [[사두가이파]]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이후 바르자파르네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분견대와 합세해 요한 히르카노스 2세, 안티파트로스의 두 아들 파사엘과 헤로데를 격멸했다. 요한 히르카노스 2세는 붙잡힌 뒤 귀가 절단된 채 바빌론으로 끌려갔고, 파사엘은 처형되었다. 헤로데는 [[마사다]]로 숨어서 한동안 버티다가 로마로 피신했다. 이후 그는 파르티아인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대의 왕이자 대제사장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헤로데는 곧 반격을 개시했다. 기원전 39년 로마에서 돌아온 헤로데는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가 파견한 실로의 지원에 힘입어 욥바를 공략하고 마사다를 거점으로 삼은 뒤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겨울이 될 무렵 실로가 그로부터 상당한 뇌물을 받은 뒤 더 이상의 협력을 거부하고 겨울 숙영지로 철수하는 바람에 예루살렘 공략에 실패하고 일단 물러섰다. 기원전 38년, 헤로데는 그로부터 갈릴리 속주를 탈환했지만, 헤로데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사모사타로 갔을 때 갈릴리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헤로데의 형제 요셉을 죽이고 헤로데의 군대를 축출했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은 뒤 유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에 맞서 [[여리고]] 인근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당시 헤로데에게는 그의 군대를 대적할 병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는 병력을 분산시키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고, 헤로데는 이 틈을 타 곳곳에 흩어진 적을 각개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유대 지방을 공략했다. 기원전 37년 봄 예루살렘을 포위한 헤로데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안티고노스의 추종자들은 로마의 하수인 노릇하는 헤로데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과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사력을 다해 싸웠다.그러나 3개월 내지 5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식량이 바닥나서 더 이상 항전할 수 없게 된 그는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할 테니 신변을 보장해달라고 청원했다. 헤로데는 그가 안토니우스의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참가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목숨을 건지면 장차 왕위를 다시 노릴 거라고 예상했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에게 그를 처단해야 한다고 간곡히 설득했고, 안토니우스는 이 말에 따라 그를 처형했다. 이리하여 하스몬 왕조의 마지막 왕은 사라졌고, [[에돔]] 출신의 헤로데가 유대 왕국의 군주로 등극했다. [[분류:하스몬 왕조 국왕]][[분류:기원전 37년 사망]][[분류:망국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