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보편 칼리파)]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00, #000000 20%, #000000 80%, #000000);" '''{{{#FFF,#FFF 아바스 왕조 제28대 칼리파}}}[br]{{{#FFF,#FFF {{{+1 알 무스타지르}}}[br]المستظهر}}}'''}}} || || {{{#FFF,#FFF '''이름'''}}} ||아부 알 아흐메드 이븐 압둘라 알 무크타디[br]أبو العباس أحمد بن عبد الله المقتدي || ||<|2> {{{#FFF,#FFF '''출생'''}}} ||1078년 4월/5월 ||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 ||<|2> {{{#FFF,#FFF '''사망'''}}} ||1118년 8월 6일 (향년 40세) || ||[[아바스 왕조]] [[바그다드]] || ||<|2> {{{#FFF,#FFF '''재위 기간'''}}} ||{{{#000 아바스 칼리파}}} || ||1094년 2월 3일 ~ 1118년 8월 6일 '''(24년)''' || || {{{#FFF,#FFF '''전임자'''}}} ||[[알 무크타디]] || || {{{#FFF,#FFF '''후임자'''}}} ||[[알 무스타르시드]] || || {{{#FFF,#FFF '''별명'''}}} ||알 무스타지르 빌라흐(المستظهر بالله: 신의 뜻을 받드는 자) || || {{{#FFF,#FFF '''부모'''}}} ||[[아버지]] : [[알 무크타디]][br][[어머니]] : 타이프 알 아프와 || || {{{#FFF,#FFF '''종교'''}}} ||[[이슬람]] [[수니파]] || [목차] [clearfix] == 개요 == [[아바스 왕조]] 28대 [[칼리파]]. [[셀주크 제국]]의 보호 하에서 즉위한 세번째 칼리파이다. 부친 [[알 무크타디]]와 모친 알튼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094년 알 무크타디가 사망한 후에 칼리파가 되었다. 즉위 직후부터 셀주크 내전과 십자군의 시리아 침공과 그로 인한 지하드 (성전) 요구 등 혼란이 이졌지만 알 무스타지르는 바그다드 궁정에서의 조용한 삶을 택하며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알 무크타디가 제한적으로 관여한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1099년 8월, 예루살렘 함락 직후 다마스쿠스의 카디 이부 사드 알 하라위가 이끄는 팔레스타인의 난민이 칼리파 궁정 앞에서 시위하였고[* 이때 시위대는 라마단 기간임에도 공개적으로 음식 먹고 주변에서 제지하려 들자 성지의 함락에도 침묵하면서 이런 의레에만 신경 쓴다며 호통침] 1110년에는 시리아의 쉬아파 군중이 바그다드의 쉬아파와 연대해 시위하며 칼리파 부인의 입성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셀주크 내전은 1105년 술탄 무함마드 1세가 승리하며 종식되었다. 알 무스타지르는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두 차례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긴 했지만 형식상에 그쳤다. 그러던 1111년 2월, 알레포의 카디 이븐 알 카샤브가 주도한 금요일의 지하드 요구 시위는 동로마 사절의 도착과 함께 폭동으로 변하여 대사원에 위치한 민바르 (설교단)과 칼리파의 옥좌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그해 말엽 셀주크 군대가 파견되었는데, 두드러진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마저도 1118년 4월 술탄 무함마드 1세가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알 무스타지르 역시 사망하였고, 야심찬 아들 [[알 무스타르시드]]가 계승하였다. 무능하다는 평과 조용히 셀주크 조가 약해질 틈을 기다렸다는 평가가 공존한다. == 생애 == 1078년 4/5월 아바스 왕조 27대 칼리파 [[알 무크타디]]와 이집트 출신 여노예 타이프 알 아프와의 아들로 출생했다. 1094년 2월 3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얼마 후, [[무라비트 왕조]]의 초대 에미르 유수프 이븐 타슈핀이 바그다드에 사절을 보내 충성을 서약했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일 뿐이었고, 유수프는 칼리파의 다른 칭호였던 아미르 알 무미닌, 즉 "신자들의 사령관"을 칭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1097년 봄, [[제1차 십자군 원정|십자군]]이 아나톨리아에 진입하여 니케아를 공략했다. 그 후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남하하여 1097년 10월 20일 안티오키아를 포위했다. 셀주크 제국의 술탄 [[바르키야루크]]는 소규모 병력을 안티오키아에 보냈지만, 형제 및 친척들과 내전을 치르고 있던 중이라 그 이상의 지원을 해주지 못했고, 안티오키아는 결국 함락되었다. 1099년 6월 7일,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당도한 뒤 공성전에 착수했다. 7월 15일에 기어이 함락시키고 도시 내의 무슬람과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이 소식이 바그다드에 전해지자, 곳곳에서 울음과 탄식이 쏟아졌고 설교자들은 거리를 돌며 애도하라고 외쳤다. 카디 이부 사드 알 하라위는 십자군을 피해 바그다드로 피신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이끌고 칼리파 궁정 앞에서 [[지하드]]를 선포하라며 거센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대는 [[라마단]] 기간에 공개적으로 음식을 먹었다. 관료들이 이를 제지하려 하자, 하라위 등은 비난을 퍼부었다. >"너희는 성지가 프랑크에게 더럽혀졌는데도 침묵했으면서 이런 의례에만 신경쓰느냐?" 그러나 칼리파에게는 병력을 동원할 권한이나 능력이 없었고, 실질적으로 이슬람 세계를 이끌던 셀주크 제국은 심각한 내전으로 인해 십자군에 반격할 여력이 없었다. 알 무스타지르는 이러한 현실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고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한편 십자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한 사람인 레몽 4세는 1101년 바그다드 마저 공략하려 했지만 메르시반 인근에서 튀르크군에게 패배했다. 셀주크 내전은 1105년 술탄 무함마드 1세가 승리하며 종식되었다. 알 무스타지르는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십자군에 대한 지하드를 두 차례 선포했지만 이를 위한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시민들은 소극적으로 일관하는 당국에 분노했고, 1110년에는 시리아의 [[시아파]] 군중이 바그다드의 시아파와 연대해 시위하며 칼리파 부인의 입성을 방해하다가 진압되기도 했다. 1111년 2월, 알레포의 카디 이븐 알 카샤브가 주도한 금요일의 지하드 요구 시위는 동로마 사절의 도착과 함께 폭동으로 변하여 대사원에 위치한 민바르(설교단)와 칼리파의 옥좌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그해 말엽 셀주크 군대가 파견되었으나 혼란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무함마드 1세는 어쩔 수 없이 지하드를 선포하여 민심을 가라앉히고 모술 총독에게 알레포를 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모술 총독은 알레포 에미르와 갈등을 벌이기만 할 뿐 제대로 된 지원을 하지 않다가 본거지로 돌아갔다. 1115년, 무함마드 1세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중앙 시리아로 진군해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트리폴리의 프랑크 군주들과 알레포, 다마스쿠스의 무슬림 연합군에 맞섰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셀주크군은 몇 달만에 철수했다. 1118년 4월 술탄 무함마드 1세가 사망하면서 셀주크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해 8월 알 무스타지르 역시 사망했고 아들 [[알 무스타르시드]]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시종일관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던 아버지와는 달리 혼란에 빠진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아바스 왕조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이를 이루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분류:아바스 칼리파]][[분류:1078년 출생]][[분류:1118년 사망]][[분류:바그다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