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후우마이야 군주)] >{{{+1 الحکم بن هشام }}} > 알 하캄 이븐 히샴 재위 796년 6월 12일 ~ 822년 5월 21일 생몰 771년 ~ 822년 5월 21일 == 개요 == [[후우마이야 왕조]]의 3번째 아미르. == 상세 == [[히샴 1세]]의 아들로, 그를 계승하였다. 즉위 직후 부왕 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축출된 숙부 술레이만과 압둘라가 돌아와 각각 [[탕헤르]]와 [[발렌시아(스페인)|발렌시아]]의 통치권을 요구하였다. 알 하캄이 이를 거절하자 압둘라는 두 아들인 우바이둘라와 압둘 말리크를 [[아헨]]의 [[샤를마뉴]] 궁정으로 파견해 원군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술라이만은 프랑크의 개입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코르도바(스페인)|코르도바]]를 공격했으나 패하였고 메리다로 후퇴했으나 붙잡혀 처형되었다. (800년) 이후 항복한 압둘라는 사면되었으나 --그토록 원했던-- 발렌시아에 유배되었다. 한편 내전을 틈타 프랑크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고 801년 백작령을 설치하여 프랑스와의 완충지대 겸 교두보로 삼았다. 이후로도 샤를마뉴의 개입은 계속되었다. 이후로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톨레도]], [[사라고사]], [[메리다]]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두 차례나 수도 코르도바를 위협하였다. 806년에는 궁정 내부에서도 알 하캄을 폐위하고 그의 사촌 무함마드 이븐 알 카심을 옹립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11월 16일 72명의 귀족들과 (일설에 의하면) 5천에 달하는 그 일족이 연회 자리에서 멸문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박혀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 전시되었다. 이는 반역자들 혹은 기독교 세력권의 수급들이 코르도바 성문에 효수된 당대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잔혹한 편이었다. 그 틈에 프랑크 군이 재차 공세에 나서 806년 팜플로나를 점령하였다. 다만 808년의 [[토르토사]], 811년의 [[타라고나]] 공격은 격퇴되었다. 이에 샤를마뉴는 피레네 산맥 남쪽에 마르크 (변경백)를 세우고 귀환하였다. 816년 압둘 카림 이븐 압둘 와히드가 프랑크 침공군을 격퇴한 후에야 안달루스는 북방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코르도바의 음모를 진압하며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알 하캄은 코르도바의 서고트 코뮌의 지도자 라비[* 안달루스의 세금 징수관 테오둘프의 아들. 하지만 훗날 부정부패 혐의로 십자가 형에 처해짐]를 대장으로 한 개인 경호대 알 하라스를 창설하였다. 그럼에도 반란은 이어졌다. 809년 리스본 총독 투물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고, 818년에는 코르도바 과달키비르 남안의 알 리바드 지구에서 성직자들이 주도한 반란이 있었다. 후자의 결과로 300여명의 귀족들이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이를 묵인한 죄로 주민들은 추방되었다. 이들은 안달루스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를 점거했다가 [[크레타]]를 점령하고 정착하게 된다. --동로마 의문의 1패-- 일부는 [[페즈]]에 정착하거나 레반트의 해적이 되었다. 안정적인 통치를 할 겨를도 없이 822년에 알 하캄은 사망하였다. 26년의 긴 통치에도 반란에 얼룩졌다는 점에서 고조부인 칼리파 [[히샴]]과 비교된다. 그동안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히샴 1세]] 때의 타격을 극복하고 813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산티아고]] 성지를 세우며 때를 기다렸다. [[분류:코르도바 아미르]] [[분류:771년 출생]][[분류:82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