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알바니아의 역사]][[분류:유럽의 왕국]][[분류:20세기 멸망]][include(틀:알바니아의 역사)] [include(틀:제1차 세계 대전 참전국)] ||<-4><:>{{{#130D0D '''{{{+2 알바니아 공국 }}}'''[br]Principality of Albania [br]Principata e Shqipërisë }}} || ||<-2><:> [[파일:알바니아 공국 국기.svg|width=150]] ||<-2><:> [[파일:알바니아 공국 국장.svg|width=150]] || ||<-2><:> {{{#130D0D '''국기'''}}} ||<-2><:> {{{#130D0D '''국장'''}}} || ||<-4> {{{#130D0D '''지도'''}}} || ||<-4> [[파일:알바니아 공국(1914).svg|width=100%]] || ||<-4><:> {{{#130D0D '''1914년 2월 21일'''}}} {{{#130D0D '''~'''}}} {{{#130D0D '''1925년 1월 31일'''}}} || ||<-3><:> {{{#130D0D '''표어'''}}}||Atdheu mbi te gjitha (모든 것 위에 조국) || ||<-3><:> {{{#130D0D '''국가'''}}}||[[깃발의 찬가]] || ||<-3><:> {{{#130D0D '''수도'''}}}||[[두러스]] (1914년 2월 ~ 1920년 2월) [[티라나]] (1920년 2월 ~ 1925년 1월) || ||<-3><:> {{{#130D0D '''면적'''}}}||28,748 km2 || ||<-3><:> {{{#130D0D '''언어'''}}}||[[알바니아어]] || ||<-3><:> {{{#130D0D '''인구'''}}}||979,000명 || ||<-3><:> {{{#130D0D '''종교'''}}}||[[알바니아 정교회]], [[가톨릭]] || ||<-3><:> {{{#130D0D '''정치체제'''}}}||[[군주제]] || ||<-3><:> {{{#130D0D '''통화'''}}}||폐지됨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유럽]] [[발칸 반도]]의 [[알바니아]] 지역에 존재하던 공국. == [[오스만 제국]]으로 부터의 독립과 건국 == [[알바니아]]는 1478년경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협상국]]은 1913년 5월 런던 강화조약에서 [[알바니아]]의 독립을 인정했고 이후 1914년 2월 21일 알바니아 공국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협상국]]은 [[루마니아 왕국]]의 엘리자베트의 조카인 빌헬름 비트 대공을 새로 독립한 알바니아의 군주로 선출했다. 1914년 3월 7일 빌헬름은 수도인 [[두러스]]에 왕가와 함께 알바니아 공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동년 9월 3일 에사드 파샤가 일으킨 [[아랍 반란]] 이후, 빌헬름은 [[티라나]]를 중심으로 한 [[중앙 알바니아 공화국]]의 군사 사령관인 악시 카밀리가 이끄는 군대와 함께 알바니아 공국을 떠났다. 하지만 빌헬름은 왕위에 대한 주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 [[제1차 세계 대전]]과 주변국의 분할 시도 == [[제1차 세계 대전]]은 [[알바니아]]의 모든 정부 활동을 중단시켰고 설상가상으로 여러 지방 정부로 분열되었다. 이후 1914년 9월 빌헬름은 [[알바니아]]에 도착한 지 6개월 만에 알바니아 공국을 떠나 동부 전선에서 복무했다. 그리고 남은 [[알바니아인]]들은 비트 대공이 떠난 후 종교적인 선과 부족적인 선을 따라 나뉘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새로운 왕을 요구했고, [[오스만 제국]]을 그들이 누렸던 특권의 보호자로 보았기 때문에 많은 귀족들과 씨족 지도자들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후 동년 10월 말 [[그리스 왕국]]군은 코르푸 의정서에 따라 [[알바니아]]에 입성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왕국]]은 [[블로러]]를 점령했고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은 [[알바니아]] 북부의 일부를 점령했다. 1915년 4월에 체결된 [[런던 밀약]]에 따라 [[삼국 협상]]국들은 [[이탈리아 왕국]]에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블로러]]와 인근 영토를 얻고 [[알바니아]]에 대한 보호령을 얻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은 [[알바니아]] 북부의 대부분을 약속받았고 [[그리스 왕국]]은 알바니아 공국 남부의 대부분의 영토를 약속받았다. 이후 1918년 9월 [[협상국]]은 [[테살로니키]] 북쪽의 [[동맹국]] 전선을 돌파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알바니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몇달 뒤,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하자 [[이탈리아 왕국군]]은 [[알바니아]]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세르비아 왕국]]은 알바니아의 북부 산악지대를, [[그리스 왕국]]은 알바니아 공국의 1913년 당시 국경 내의 작은 영토를 점령했다. == 종전 후 다시 찾아온 위협들 == [[알바니아]]의 정치적 혼란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알바니아]]는 단 하나의 정부도 인정받지 못했고, [[알바니아인]]들은 [[이탈리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그리스 왕국]]이 알바니아 공국의 독립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분열시키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왕국군]]은 [[알바니아]]가 점령한 지역의 정치 활동을 통제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외교 정책을 주도한 [[세르비아인]]들은 [[알바니아]] 북부를 점령하려 했고, [[그리스인]]들은 알바니아 공국 남부를 장악하려고 했다. == 독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 동년 12월 [[두러스]]에서 만난 전후 [[알바니아]] 국민의회가 파견한 대표단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알바니아 공국의 독립을 옹호했지만, 열강들은 알바니아 공국의 공식 대표단을 거부했다. 하지만 [[알바니아]]를 온전하게 유지하기를 열망한 국민의회는 알바니아 공국이 영토를 잃지 않는 한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와 심지어 이탈리아 왕국의 왕자를 통치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920년 1월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영국]], [[그리스 왕국]]의 협상가들은 [[이탈리아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 사이의 영토 분쟁에 대한 타협안을 찾기 위한 외교적 편의를 위해 [[알바니아]]를 [[유고슬라비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으로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알바니아인]]들의 뒤에서 이루어졌고 [[미국]] 협상가가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뤼쉬네에서 열린 두 번째 [[알바니아]] 국회의원들은 분할 계획을 거부하고 [[알바니아인]]들이 독립과 영토 보전을 위해 무기를 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 국회는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4명의 섭정을 임명했다. 그리고 [[양원제]] 의회도 만들어졌는데, [[알바니아]]에서는 12,000명 당 1명의 하원의원이 선출되었고, [[미국]]에서는 알바니아 공동체를 위해 1명의 하원의원이 선출되었다. == [[우드로 윌슨]]의 지지와 주권의 인정 == 한 달 후인 1920년 3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파리 강화 회의]]을 저지하기 위해 개입했다. [[미국]]은 [[워싱턴]] 주재 [[알바니아]] 대표를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알바니아 공국의 독립에 대한 지지를 강조했고, 12월 17일 [[국제 연맹]]은 알바니아 공국을 정식 회원국으로 인정함으로써 알바니아 공국의 주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알바니아 공국의 국경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알바니아]] 공국의 새 정부는 [[이탈리아 왕국]]의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해 시위를 벌였고, 농민들이 [[이탈리아 왕국군]]을 저지하도록 장려했다. 동년 9월 [[블로라 전투]] 이후 [[이탈리아 왕국]] 정부는 알바니아 공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블로라 만 어귀에 있는 사잔 섬을 제외한 알바니아 공국 전역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 역쿠데타와 공국 멸망 == [[판 놀리]] 수상의 통치하에 정부는 [[조구 1세]], 벨라치 등에 대한 사형 선고를 가결로 통과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특별 재판소를 설립했다. 하지만 판 놀리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조구 1세]]는 용병을 모집했고 알바니아 공국에게 무기와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1,000명, 백군계 이민인을 제공하여 [[세르비아인]]들이 지배하는 [[코소보|분쟁 지역]]을 가져오기를 희망했다. [[판 놀리]] 정권이 세르비아 지배 가문과 앙숙인 [[소련]]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로 결정한 후 알바니아 공국 정권이 [[볼셰비키]]를 포용하려고 한다는 엉뚱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후 1924년 12월 13일 [[조구 1세]]의 지원군은 알바니아 영토로 넘어갔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조구 1세는 수도를 재탈환했다. 그 후 [[판 놀리]]와 정부는 [[이탈리아 왕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조구 1세]]의 정부는 6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았고,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적 상황을 바꾸고 공국을 멸망시키고 [[알바니아 제1공화국]]을 건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