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아우구스타)] || '''이름''' ||암니아의 마리아[br](Maria of Amnia)|| || '''출생''' ||[[770년]] [[동로마 제국]] 소아시아 북부 파플라고니아 암니아(현재 [[터키]] 중앙 아나톨리아 일대) || || '''사망''' ||미상|| || '''할아버지''' ||성 필라레토스|| || '''남편''' ||[[콘스탄티노스 6세]]|| || '''자녀''' ||[[에우프로시나]], 이리니||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 [[이사브리아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의 황후. == 생애 == 770년경 소아시아 북부 파플라고니아의 암니아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사로, 훗날 [[정교회]]로부터 [[성인(기독교)|성인]]으로 시성된 필라레토스이다. 788년, [[이리니]] 태후는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신부 선발 대회를 열었다. 그녀는 심사위원단을 제국 각지로 보내 이상적인 기준을 갖춘 후보자들을 선정하게 하였다. 그 결과 13명의 후보자가 선정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는데, 최종 우승자는 암니아 출신의 마리아였다. 그녀의 집안은 확고한 성상 공경파였기에, 같은 성향이던 이리니에게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마리아는 788년 콘스탄티노스 6세와 결혼하고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마리아는 콘스탄티노스 6세와의 사이에서 두 딸 에우프로시나와 이리니를 낳았는데, 그중 [[에우프로시나]]는 훗날 [[미하일 2세]]의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는 마리아를 싫어하였고, 결혼 6년만인 794년 이리니의 시녀였던 [[테오도테]]를 아내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795년 1월, 그는 이혼을 공식 선언했고, 마리아와 두 딸은 프랑키포 섬에 보내졌다. 그리고 그해 9월, 콘스탄티노스와 테오도테는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에 교회 측에서 황제의 이혼과 재혼을 반대했지만, 콘스탄티노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리니는 총대주교 타라시우스에게 끝까지 반대하라고 요구했지만, 타라시우스는 황제와 타협하여 마리아가 머리를 깎고 수녀가 되는 걸 허용했다. 이로 인해 이리니와 콘스탄티노스 모자간의 사이가 벌어졌다. 마리아는 이혼 후 성 에우로시네 수도원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편이 797년 어머니에 의해 두 눈이 먼 후 프린키포 섬으로 유배되었을 때도 생존했다. 823년 딸 [[에우프로시나]]가 미하일 2세와 결혼하기 위해 수도원에서 끌려나갈 때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무시당했다. 그녀가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분류:동로마 황후]] [[분류:아우구스타(동로마)]] [[분류:770년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