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아메리카의 독재자]][[분류:아이티의 군인]][[분류:아이티의 독립운동가]][[분류:아이티 국왕]][[분류: 자살한 인물]][[분류: 1767년 출생]][[분류: 1820년 사망]][[분류:망국의 군주]][[분류:창업군주]][[분류:화폐의 인물]] [include(틀:역대 아이티 국왕)] ||||<:> [[파일:앙리 1세.jpg|width=100%]] || || '''이름''' ||앙리 크리스토프(Henri Christophe) || || '''생몰년도''' ||1767년 10월 6일~ 1820년 10월 8일 (53세) || || '''재위기간''' ||1811년 3월 28일 ~ 1820년 10월 8일 || || '''대관식''' ||1811년 3월 28일 || || '''출생지''' ||영국령 그레나다 || || '''사망지''' ||'''[[아이티 왕국]]''' [[카프아이시앵]] || || '''후임자''' ||[[앙리 2세(아이티)|앙리 2세]] || [목차] [clearfix] == 개요 == * [[영어]]: Henry I (헨리 더 퍼스트) * [[스페인어]] : Enrique I de Haití (엔리케 프리메로 데 아이티) * [[프랑스어]] : Henri I^^er^^ (르 프르미에 앙리) [[아이티 왕국]]의 국왕, 군인, 정치가. 본명은 '앙리 크리스토프'이며 조상은 서아프리카에서 왔다. == 생애 == [[노예]]였으나 이후 [[아이티 혁명]]에 혁명군으로 참가한 장군 출신이다. 아이티가 독립하고 초대 국가원수가 된 [[장 자크 데살린]]이 칭제했다가 암살당한 뒤, 앙리 크리스토프는 1807년 북부에서 독자 정권을 세운 뒤 [[아이티국]](State of Haiti)의 대통령이자 [[대원수]]가 되어 남부를 근거지로 했던 [[알렉상드르 페시옹]]과 아이티의 최고 권력자 자리를 놓고 다퉜다. === [[아이티 왕국]] 국왕으로 === 1810년 페시옹과 평화 조약을 맺어 일단 아이티를 반분하는 데 합의한 후, 앙리는 밀로(Milot)라는 마을을 왕도(王都)로 삼고, 그곳의 주교[* Jean-Baptiste-Joseph Brelle]를 불러다 1811년 3월 28일에 '''국왕 앙리 1세'''로 즉위했다. 앙리 1세는 프랑스와 남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부를 요새화했으며, 밀로에다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 1843년 지진으로 반파되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지었다. 또한 4명의 [[대공(작위)|대공]]([[Prince]]), 7명의 [[공작(작위)|공작]], 22명의 [[백작]], 40명의 [[남작]], 14명의 [[기사]]를 [[귀족]]으로 서임했는데 [[유럽]]에서는 이 귀족 서임을 비웃었다. 교육을 진흥하고 앙리 민법전(Code Henry)을 만드는 등의 업적은 있었으나, 인기없는 전제군주였던 그는 말년에 우울증을 앓다가 불안한 정세 등을 비관해 1820년 10월 8일에 53세를 일기로 총으로 자살했다.[* 페시옹은 1816년 종신 대통령이 되었지만 1818년에 병사했고 [[https://en.wikipedia.org/wiki/Jean-Pierre_Boyer|장 피에르 부아예]]가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사후 아들 '자크 빅토르 앙리 크리스토프' 왕태자가 '''앙리 2세'''로 즉위했으나 10월 18일 16세를 일기로 암살당했고, 아이티는 [[아이티 제1공화국|남부 공화국]]에 의해 통일된다. == 기타 == 앙리 1세는 아이티의 마지막 군주는 아니었다. 앙리 1세 사후인 1849년~1859년에는 [[아이티 대통령|대통령]]이던 [[포스탱 엘리 술루크]]가 [[아이티 제2제국|황제]]로 즉위했다가 폐위당했고 그 후 아이티는 쭉 공화정을 유지한다. [[아이티 구르드|아이티 100구르드]] 지폐의 인물이다. 90년 초반에 국내에 나온 어린이 괴담집에서는 아이티 유령 이야기에 크리스토퍼 앙리라는 이름으로 나와 그가 [[폭군]]으로 벌인 학살로 인한 원혼으로 아이티에 그 유령들이 나왔다고 나오기도 했다. 폭압으로 반대파 저항이 벌어지고 우울증이 빚어져 자살했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