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목차] == 개요 == 楊愼矜 (? ~ 747) [[당나라]]의 관료. [[수나라]] 황실의 후손으로 [[양정도]]의 손자이자 [[양숭례]]의 아들이었다. == 생애 == === 초기 생애 === 양신긍은 침착하고 재간이 있었으며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하고 벗을 사귀기를 좋아했다. 처음 여양현령(汝陽縣令)을 지내며 유능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양숭례가 태부경(太府卿)에서 면직되어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물러난 뒤 [[현종(당)|현종]]은 양숭례의 세 아들 중 부친의 직무를 맡을만한 인물을 물색했는데 재상은 양숭례의 세 아들인 양신여(楊愼餘), 양신긍, 양신명(楊愼名)이 모두 근면하고 정중한 성격에 청렴결백하며 부친의 기풍이 있지만 양신긍이 가장 뛰어나다며 그를 추천했다. 현종은 양신긍을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임명했고 태부의 출납을 그에게 맡겼다. 738년, 양숭례의 장례를 마친 뒤 양신긍은 시어사(侍御史)로 승진하며 태부의 출납을 그대로 맡았다. 또한 어사대에서 여러 해 동안 지잡사(知雜事)를 맡으면서 풍격이 매우 높았다. 743년, 권판어사중승(權判御史中丞)으로 전임되고 경기채방사(京畿采訪使)를 맡음은 물론 태부의 출납도 그대로 맡았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우상(右相) [[이임보]]가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양신긍은 자신이 관직에 오른 것이 자신의 집안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직무를 맡지 못할까 두려워서 이를 고사했으며 결국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제수되고 시어사(侍御史)를 겸임하며 태부의 출납도 그대로 맡았다. 이후 홍려소경(鴻臚少卿) 소량(蕭諒)이 어사중승이 되었지만 소량은 조금도 양보하는 구석이 없었고 양신긍과의 사이가 매우 좋지 못해서 양신긍은 결국 협군(陜郡) 태수로 전출되었다. 이임보는 양신긍이 자신에게 굴종했다고 생각해서 그를 다시 어사중승으로 발탁하고 제도주전사(諸道鑄錢使)로 충임하였다. 당시 산기상시(散騎常侍)이자 협군 태수였던 위견이 어사중승을 겸임하며 수륙전운사(水陸漕運使)를 맡고 있었는데 그 권력이 재상을 능가했다. 시어사 왕홍이 위견을 추문하자 양신긍은 중립을 지키며 사태를 관망했고 왕홍과 이임보는 이로 인해 양신긍을 원망하게 되었다. 양신긍은 왕홍의 부친 왕진(王瑨)과 외사촌 관계였고 왕홍은 양신긍의 오촌 조카였기에 젊은 시절에 두 사람은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왕홍이 어사대로 들어가고 양신긍이 시어사가 되었을 때도 추천을 했다. 왕홍이 어사중승으로 승진하면서 양신긍은 왕홍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되었지만 매번 왕홍을 이름으로 불렀고 이임보와 친하게 지냈던 왕홍은 점점 속으로 양신긍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746년,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승진하였다. 이임보는 양신긍이 현종의 총애를 받는 것을 속으로 질투했고 또한 왕홍과 양신긍의 갈등에 대해 알아내어 왕홍을 꾀어 양신긍을 모함했고 왕홍도 기회를 틈타 양신긍을 모함하였다. 왕홍은 양신긍이 자신의 직전(職田)을 빼앗고 뒤에서 왕홍의 험담을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모친을 헐뜯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747년, 이임보는 사람을 시켜 화청궁(華淸宮)에 있는 현종에게 양신긍에 대해 고발했다. 이임보의 고발을 접수한 현종은 매우 분노해서 양신긍을 상서성(尙書省)에 가두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소은지(蕭隱之), 대리경(大理卿) 이도수(李道邃), 대리소경(大理少卿) 양숙(楊璹), 시어사 [[양국충|양조]],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노현(盧鉉)에게 양신긍의 국문을 명했다. 또한 경조부(京兆府) 사조참군(士曹參軍) 길온(吉溫)을 낙양으로 파견하여 양신긍의 형인 소부소감(少府少監) 양신여와 아우인 낙양현령(洛陽縣令) 양신명 등을 체포하여 국문하는 한편 길온을 여주(汝州)로도 파견하여 사경충을 체포하여 행재로 압송하도록 명했다. == 기타 == * 양신긍의 형 양신여는 사농승(司農丞)을 지냈다가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제수되어 경창(京倉)을 감독하였다. 동생 양신명은 대리평사(大理評事)로 제수되고 감찰어사를 겸임했으며 도함가창출납사(都含嘉倉出納使)를 맡았다. * 양신긍이 온탕(溫湯)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붉은 옷과 두건을 쓴 키가 큰 귀신이 문짝 뒤에서 나타났다. 양신긍은 그 귀신을 꾸짖었지만 귀신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자 뜨거운 국물을 귀신에게 던졌고 그러자 귀신이 사라졌다. 이후 양신긍은 투옥되어 죽었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747년 사망]][[분류:홍농 양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