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수서)] [include(틀:북사)] 楊勇 (? ~ 604년)[* 생년은 미상이나 둘째 양광이 569년 생인 만큼 최소 560년대 중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차] == 개요 == [[수나라]]의 [[황족]]. [[문제(수)|수문제]]와 [[문헌황후]]의 [[적장자]]. 수나라 최초의 황태자이자 최초의 폐태자이다. == 생애 == [[북주]] 때에 조부 [[양충]]의 공으로 박평후에 봉해졌다. 이후 580년에 아버지 [[양견]]이 [[승상]] 겸 수왕(隋王)에 봉해지자 수왕세자(隋王世子)에 책봉되었고, 그 이듬해인 581년에 아버지가 [[황제]]가 되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문제(수)|수문제]]는 양용에게 군국에 관한 정사에 참여하는 것을 명하면서 이에 대한 결정권을 주었다. 양용 본인의 성격은 관대하고 후덕했지만 생각과 감정에 짧았으며 교만하면서 꾸미는 행동이 없었다. 양용은 [[호색한|속으로 총애하는 여인이 많았고]] 591년에 소훈 운씨를 총애했다가 그의 태자비 원씨가 이로 인해 마음의 병을 얻어 이틀 만에 사망하자 [[문헌황후]]에게 책망받았으며, 수문제 본인이 절약과 검소함을 실천했기에 양용이 가지고 있던 촉 사람이 만든 방패를 그가 문장으로 꾸미자 수문제가 이를 좋아하지 않고 훈계했다. 동지 때 문무백관이 양용에게 오자 음악을 베풀고 축하를 받았는데, 수문제가 이를 알고 동지에 조회에서 하례하고 토산물로 공물을 만들어 따로 동궁에 올리는 것을 정지시켰다. [[양제(수)|양광]]이 [[궁녀]]를 양용의 집에 보내 술을 마시게 하는 등 계획적으로 사치스럽다는 이미지를 뒤집어씌우면서 독고황후가 양용이 태자로 있기에는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 판단해 양광, 독고황후는 양용을 태자 자리에서 폐위하려는 모의를 한다. 양용은 이 일을 알고 걱정하고 두려워했지만 계책이 없어 왕보현에게 여러 가지 저주하는 물건을 만들어 좋은 운수가 돌아오도록 하는 비방을 했으며, 후원에 낮고 누추한 서인촌을 만들어 그 안에서 자고 쉬면서 베옷을 입고 풀로 만든 자리를 깔면서 이 문제를 감당해내길 바랐다. 이 일로 인해 수문제가 양용이 불안해하는 것을 알고 [[양소(수나라)|양소]]를 보내 살피도록 했는데, 양소가 동궁에 도착해서는 누워서 쉬면서 들어가지 않았다. 양용은 허리띠를 묶고 그를 기다렸지만 양소는 고의로 오랫동안 나아가지 않아 양용이 노하면서 이를 악물고 말과 얼굴빛에 드러냈으며, 이로 인해 수문제는 양소가 험담하는 소리를 듣고 양용을 의심했다. 문헌황후가 사람을 보내 [[동궁]]을 엿보고 미세한 일도 모두 상주해 알리도록 했으며, 속이고 꾸며서 그의 죄를 만들자 수문제는 양용을 멀리고 정탐꾼을 가득 두어 동정을 살피게 했다. 600년에 이부시랑 소좌보, 태자가령 주문동 등과 연무장에 나눈 얘기들이 양광 일파에 의해 역모로 변질되었고, 결국 600년 12월에 양용은 황태자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 때 상서좌복야 [[고경]]이 양견을 말렸으나 문헌황후의 설득으로 결국 승인되었다. 결국 양용은 정신 이상을 명분으로 태자에서 폐위되어 방릉왕(房陵王)으로 강등된 후 내사성으로 옮겨 5품 관직에 해당하는 양식을 받았으며, 604년에 양광의 사악함이 밝혀져서 아버지 수문제에 의해 다시 태자로 복권될 수 있었으나 이를 눈치챈 양광의 의해 아버지 수문제가 죽고 수양제가 즉위하면서 수양제의 부하인 우문지급에 의해 피살당했다.[* 웃긴 건 그를 죽이라고 사주한 동생 수양제 역시 결국 같은 우문지급에게 피살당한다.] 양용의 자식으로는 아들이 10명, 딸이 1명 있었다고 한다. 정비는 2일 만에 사망했으니 전원 측실 소생일듯. 그러나 양용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니 그의 자식들도 죽임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 대중매체에서 == * 2005년에 소설가 [[김진명]]이 쓴 소설 <살수>에서는 부황의 명에 따라 [[고구려]] 원정 때 환웅을 섬기던 무녀를 범해 사생아 딸을 낳게 했다.[* 이름은 '가연'이며, 당시 이 소식을 듣게 된 양광이 가연을 사실상 자신의 딸처럼 돌본 덕분에 가연은 아버지 양용보다는 숙부인 양광을 더 따르게 된다.] 그리고 1차 고수전쟁 당시 직접 무장을 하고 양견 앞에 가서 자신을 지휘관으로 삼아 출전을 허락해 달라고 하여 출전하긴 했지만, 정작 실패하게 됐고 회군 이후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인 탓이 아닌 양량 및 다른 장수들의 탓이라고 우겼고, 그걸 본 양량은 양용이 아닌 양광 밑으로 가는 걸 택하게 된다.[* 이 당시 양량은 양용을 따라 출전한 바 있었고, 그 이전에는 양용 밑에서 아부나 떠는 역할 외엔 비중이 없지만, 양용이 패전한 후엔 큰형보다는 그나마 개념있는 둘째형 양광을 따르게 되었다.] 폐태자 신세가 된 이후에는 역사와 비슷하게 양광이 보낸 자객들에 의해 살해된다. [[파일:연개소문_폐태자_양용.jpg]]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는 배우 김용헌이 연기했다.[* 재미난 점은 극 중과는 달리 실제 김용헌은 1963년 생으로 동생 양광 역을 맡은 [[김갑수]](1957년 생)보다 6살이나 더 어리다. 이후 당나라 시절에도 형 [[이건성]] 역을 맡은 [[최정우]]가 동생 [[이세민]] 역을 맡은 [[서인석]]보다 8살이나 더 어렸다.] 우둔하고 남을 잘 믿는 인물로 동생 [[양제(수)|양광]]에게 놀아나다가 결국 평소의 행실 탓에 미움털이 박혀 있던 어머니 [[문헌황후]]와 아버지 [[문제(수)|수 문제]]의 눈 밖에 나 양소의 국문을 받아 폐태자 당하고 서인으로 강등당한다.[* 실제로는 서인이 아닌 왕의 신분으로 강등됐지만 당시 폐태자가 된 양용의 처지는 드라마랑 다를 게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을 보이며 나무 위에 올라가 자신의 억울함을 부르짖으며 [[양소(수나라)|양소]]를 욕하는데 그 모습이 제법 절륜하다. 거기다 새로 태자가 된 양광이 양용을 가족들과 떨어뜨리고 일부러 음식과 의복 공급을 잘 해주지 않으면서 완전 거지 꼴이 된 양용은 반쯤 미친 채로 굶주린다.[* 그나마 1번은 양광의 수문장으로 지냈던 [[이밀]]이 양용에게 음식이라도 갖다준 적이 있기는 했다.] 촉왕 양수와 한왕 양량은 양용의 억울함을 알고 그를 구하고 태자로 복위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동생들이 양용을 적극적으로 구하려는 모습을 보니 동생들에게는 괜찮은 큰형이었던 듯. 촉왕 양수가 양광의 계략으로 폐서인당하고 같은 곳에 갇히자 양수에게 "처자식하고 함께 산으로 숨었어야지 여기 오면 어떡하냐?"고 한다. 결국 아버지 수문제가 양광에게 살해당할 때 그 역시 죽임을 당한다. 살해당하기 직전에 다시 정신을 차린 양용은 "이미 각오했던 일"이라 체념하며 "새 옷으로 갈아입고 아버지가 있는 방향으로 인사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마지막 부탁을 한다. 그러나 양용의 청은 묵살당했고 양용은 [[우문지급]]의 칼집에 맞아 쓰러지고 바로 목이 졸려 살해당한다. 숨이 끊어질 때 양용은 애처롭게 "아버지"를 부르짖는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수문제의 아들들)] [[분류:수나라의 황태자]][[분류:604년 사망]][[분류:질식사한 인물]][[분류:살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