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오대십국시대/인물]][[분류:송나라/인물]][[분류:912년 출생]][[분류:971년 사망]][[분류:스자좡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include(틀:동도사략)] [목차] == 개요 == 楊廷璋 (912년 ~ 971년) [[오대십국시대]], [[북송]]의 인물로 자는 온옥(溫玉). == 생애 == === 초기 생애 === 진정부(眞定府) 출신으로, 912년 양홍유(楊洪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홍유의 집안은 가난했고 누이가 과부가 되어 수도에 살고 있었다. 당시 [[곽위]]가 미천했을 때 양정장의 누이를 보고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는데, 양정장의 누이가 따르지 않으니 중매인을 시켜 양정장의 누이에게 협박을 했다. 양정장의 누이가 이 사실을 양정장에게 알리자, 양정장은 곽위를 찾아가기로 했고 곽위를 만난 뒤 누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람은 얼굴이 보통이 아니니 거절할 수 없습니다. 양정장의 누이는 결국 양정장의 말에 따르게 된다. 뒤에 곽위가 [[유지원]]을 따라 태원(太原)에 진수할 때 양정장은 여러 차례 자신의 누이를 문안하러 갔고 곽위는 양정장의 순박함과 신중함을 총애하였다. 누이가 죽은 뒤 양정장을 자신의 주위에 두었다. 곽위가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 말에 벌어진 3차례의 반란을 진압하고 후한 조정을 전복시키는 과정에서 양정장은 여러 차례 곽위에게 기묘한 계책을 바쳤다. === 후주 시기 === 951년 곽위가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한 뒤, 양정장의 누이를 숙비(淑妃)로 추봉하고 양정장을 우비룡사(右飛龍使)로 발탁하려고 했다. 양정장은 우비룡사를 고사하며 받지 않았고 대신 곽위에게 아버지 양홍유(楊洪裕)에게 은상을 내릴 것을 주청하였다. 곽위는 양홍유를 불러 부궐하게 했지만 양홍유가 노병으로 인해 사양하여 대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진정부소윤으로 임명하였다. 양정장은 황성사(皇城使)·소의군(昭義軍) 병마도감(兵馬都監)·전주순검사(澶州巡檢使)를 역임하였다. 당시 전주자사는 곽위의 양자인 시영이었는데, 양정장을 외숙부로 불렀다. 시영이 전연(澶淵)에서 수도로 돌아올 때 곽위에게 양정장이 재간이 있다고 칭찬하여 양정장은 객성사(客省使)로 승진하였고 하양(河陽)으로 부임했다. 당시 사의(史懿)가 병을 핑계로 입조하지 않자, 곽위는 양정장에게 사의를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양정장이 장차 출발하려고 할 때 곽위는 양정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의가 조명을 받지 않는다면 곧바로 양정장을 도모하시오. 양정장은 경주(涇州)로 도착하여 주위 사람들을 물린 뒤 사의에게 곽위의 조서를 보여주니 사의는 바로 그날 조정으로 향했다. 뒤에 곽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양정장은 피를 토하고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곽위의 양자인 시영이 즉위한 뒤 양정장은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으로 임명되고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를 맡았다. 시영이 [[유민(북한)|유민]]을 정벌할 때 건웅군절도사(建雄軍節度使)로 임명되었다. 양정장은 여러 해 동안 절도사를 맡으면서 군민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 태원(太原) 경계로 입성하여 인의채(仁義砦)·고벽채(高壁砦) 등을 함락시키고 자사와 군교 수십 명을 사로잡았으며, 태원의 백성 수천 호를 사로잡고 병기와 양, 말 수만을 노획하였다. 북한이 심주(沁州) 이남 200리를 포기하고 신성(新城)으로 물러나자, 양정장은 보안채(保安砦)·흥동채(興同砦)·백벽채(白壁砦) 등 10여 개의 성채를 축조하였다. 때마침 습주(隰州) 자사 손의(孫議)가 죽자, 양정장은 감군(監軍) 이겸부(李謙溥)에게 습주자사를 대리하도록 명했다. 이겸부가 습주로 부임한 뒤 북한이 습주를 공격하자, 양정장의 수하 장수들은 마땅히 재빠르게 이겸부를 구원해야 한다고 건의했는데, 양정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습주는 성벽이 견고하오. 북한은 갑자기 도착했기 때문에 공성무기를 준비하지 못했을 테니 마땅히 기병을 내어 물리쳐야 하오. 그리고 1백여 명의 군사들을 모아 그들에게 큰 포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했고 지름길을 따라 사람을 보내 이겸부에게 내응하기로 약속하였다. 양정장은 곧바로 소리를 내지 않으며 밤에 습격했고 이겸부의 군사들이 양정장에게 내응하여 출병하니 북한의 군대는 크게 무너졌고 북쪽으로 수십 리를 추격하여 1천여 급을 참수하고 수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승전보가 도착하자 시영은 기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며 양정장을 칭찬하였다. >나의 외숙부는 진실로 능히 도적을 막을 수 있소. 시영이 북한을 정벌하고 돌아온 뒤 양정장은 검교태보(檢校太保)가 더해졌다. 959년, 양정장은 휘하 부대를 이끌고 다시 북한으로 입성하여 13개의 성채를 함락시키고 순검사(巡檢使) 근한조(靳漢晁) 등 3명을 항복시켰다. 같은 해 시영이 붕어하고 [[시종훈]]이 즉위하자, 검교태부(檢校太傅)가 더해졌다. === 북송 시기 === 960년, 조광윤이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북송]]을 건국하고 제위에 오르니 이가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이다. 양정장은 이때 검교태위(檢校太尉)가 더해졌으며,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이 예궐하여 비석을 세워 양정장의 공덕을 칭송하기를 청하자 태조는 [[노다손]]에게 비문을 짓고 양정장에게 상을 내렸다. 같은 해, [[이균]]이 조광윤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뒤 몰래 측근을 보내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에 구원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양정장은 이균의 사신을 사로잡아 수도로 압송하고 이균을 공략할 계책을 바쳤으며, 태조는 곧바로 양정장에게 작전을 위임하였다. 태조가 이균을 친정할 때 양정장은 부하들을 이끌고 음지(陰地)로 입성하여 이균을 견제했고 이균이 평정된 뒤 자신의 진으로 돌아갔다. 양정장은 다시 같은 해에 내조하여 빈주(邠州)로 옮겨 진수하였고, 966년 부주(鄜州)로 옮겼다. 969년 우천우위상장군(右千牛衛上將軍)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971년 사망하였다. 양정장은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대신 표문을 올려 오직 양정장의 외조카인 안숭훈(安崇勳)을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으로 천거하였다. 안숭훈은 [[후당]]의 추밀사(樞密使) 안중회(安重誨)의 아들이었다. 양정장의 아들인 양탄(楊坦)과 양운(楊塤)은 모두 진사에 급제했으며, 양탄은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 염철부사(鹽鐵副使), 염철판관(鹽鐵判官)을 역임했고 양운은 도관낭중(都官郞中)을 역임했다. == 기타 == * [[송사]]의 기록에 의하면 양홍유가 젊은 시절에 일찍이 경내의 초구피(貂裘陂)에서 고기를 잡을 때 빠른 말을 탄 사람이 나타나 두 개의 돌기러기을 양홍유에게 주었는데, 하나는 왼쪽 날개를 가렸고 하나는 오른쪽 날개를 가렸다. 말을 탄 사람이 양정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북악(北嶽)의 사자이니라. 말을 탄 사람은 위의 말을 한 뒤 갑자기 사라졌다. 이 해에 숙비가 태어나고 다음 해에 양정장이 태어났으며 집안이 마침내 융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양정장이 진주(晉州)에 진수할 때 태조가 형한유를 검할(鈐轄)로 임명했다. 형한유는 양정장이 후주의 곽위와 인척 관계이기에 양정장이 다른 뜻을 품지 않을까 의심하여 양정장의 관청으로 들어갈 때마다 형한유를 따르는 이들이 모두 도검을 지녀서 양정장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양정장이 정성껏 형한유를 대우하여 조금도 방비하지 않으니 형한유 또한 감히 손도 대지 못했고 역시 아무런 근심도 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양정장이 경주(涇州)에서 사의를 보전하고 음덕을 쌓은 보답이라고 여겼다. * 양정장은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상의는 길게 입고 하의는 짧게 입었으며, 모습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고 비록 아전을 만나더라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선비들을 잘 대우했고 그의 막하에 소속된 이들은 대부분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