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남원 양씨]][[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860년 출생]][[분류:192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 성명 ||<(> 양제안(梁濟安) || || 호 ||<(> 벽도(碧濤) || || [[본관]] ||<(> [[양(성씨)|남원 양씨]] || || 생몰 ||<(> [[1860년]] [[4월 9일]] ~ [[1929년]] [[5월 25일]] || || [[출생지]] ||<(>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 죽장면 두마리 || || 사망지 ||<(>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양제안은 1860년 4월 9일 경상북도 영일군 죽장면 두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6년 이기찬(李起贊)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중군장으로 임명되었고, 금산, 성주 일대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했다. 이에 그는 흩어진 병사들을 진천으로 이동시켜 항전하다가 고종의 해산 명령을 받자 의진을 해산시켰다. 이후 자택에 은거했던 그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해 금연보채(禁煙報債) 운동을 벌였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영주 풍기에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29년 5월 25일 영일군에서 사망할 때까지 아들 [[양한기]]와 함께 교육에 전념하여 후진에게 배일사상과 항일투쟁정신을 고취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양제안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