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중국 삼국시대 공손정권의 인물, rd1=양조(삼국지))] 楊肇 (? ~ 275)[* 사위인 [[반악]]이 지은 『양형주뢰 楊荊州誄』에 의하면 [[함녕]](咸寧) 원년(275) 4월 을축일에 훙(薨)했다.]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대]] [[중국]]의 [[서진]]의 장수이며 자는 계초(季初)로 [[양기(삼국지)#s-2|양기]]의 아들이자 [[반악]]의 장인. [[사례(중국)|사례]] 형양군 원릉현 사람. == 생애 == 절충장군을 지냈고 272년 [[형주]] [[자사(관직)|자사]]를 지내다가 [[오(삼국시대)|손오]]의 장수인 [[보천]]이 [[투항]]하면서 [[오나라]]의 공격을 받자 보천을 구원하기 위해 서릉으로 왔는데, [[육항]]이 직접 [[삼군]]을 인솔해 양조에게 대항했다. 각 군영에게 서릉을 [[포위]]하는 벽을 공고하게 구축하도록 하면서 밖으로 방어를 했는데, 그 와중에 오나라의 진영에서 달아나는 자가 나와 장군 [[주교(삼국지)|주교]]와 [[유찬#s-4]] 등이 양조에게 왔다. 유찬에게서 들은 정보로 다음날에 과거 이민족 병사들이 지키던 곳을 공격했는데, 육항이 반격하도록 하자 사상자만 늘어났으며, 서릉에 도착한 지 1개월이 지나 계획이 좌절되자 밤에 퇴각했다. 육항이 북을 울려 병사들을 경계시키면서 추격하려는 것과 같이 하자 양조의 부하들이 떠들썩해지고 두려워 해 모두 무기를 풀어놓고 도주하면서 육항이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에게 뒤에서 추격하도록 하자 크게 패했다. 이 패배로 양조는 파면당해 평민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는데, 반악은 뇌문을 통해 초서, 예서를 모두 잘 썼고 척독(尺牘)은 반드시 보배로웠으니, 붓의 움직임이 나는 것 같고 종이의 떨어짐은 구름 같다고 했다. 장회관의 서단에서는 양조의 예서, 초서를 능품으로 평가했다. ==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 [[파일:external/kongming.net/074-Yang-Zhao.jpg]] || || 삼국지 9, 10, 11 || ||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826.jpg|width=400]] || || 삼국지 13, 14 ||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하며 능력치는 보통 [[공손연]]군의 [[무장]]인 [[양조(삼국지)|양조]]보다는 ~~아주 약간~~ 괜찮으나 이쪽도 '''[[영 좋지 않다]]'''. [[삼국지 9]]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3/무력 69/지력 72/정치력 71로 의외로 제법 준수하다. 분전, 돌진, 제사, 몽충 등 쓸만한 병법도 제법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5/무력 61/지력 67/정치력 70/매력 55로 어정쩡하다. 특기는 상업, 일제, 반목 3개로 정치가 70이라도 되니 특기는 그나마 활용하라고 잘 던져준 편.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0/무력 65/지력 68/정치력 62/매력 58로 전작에 비해 정치력이 하락했지만 그 대신 모든 능력치가 상향됐다. 적성은 창병 A/극병 B/노병 A/기병 B/병기 B/수군 C로 조금 모자란 만능형이다. 등장이 242년이라 역사 시나리오에서는 얼굴 볼 일이 영 없으나 노병 적성이 A에 진양에서 등장하므로 [[영웅집결]] [[정원(삼국지)|정원]]군에서는 중요한 인재로 쓰인다. [[삼국지 12]]에서는 짤렸다가 [[삼국지 13]]에서 복귀했는데 능력치는 매력만 빠진 상태에서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순찰]]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순찰이고 전법은 궁공강화. [[일러스트]]는 검을 뽑으려 하고 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6, 무력 65, 지력 67, 정치 62, 매력 55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4, 지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동요, 주의는 패도, 정책은 침략황폐 Lv 2, 진형은 방원, 학익, 전법은 제사, 고무,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히카루의 바둑의 등장인물인 [[오가타 세이지]]로 등장한다. 서릉 전투 (4)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전쟁에서는 병삘이었지만 서예에서는 명필'''이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서릉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보천이 진에 투항한 이후 [[양호(삼국지)|양호]]가 육항 견제를 위해 강릉으로 향했고, 양조는 보천을 지원하기 위해 3만의 병력을 끌고 서릉으로 향했다. 서릉에서 한참 육항군을 압박하던 도중 주교와 유찬이 투항해오자 이를 수용하고, 영[[도독]]으로 있던 유찬이 가져온 정보에 근거하여 보천과 말을 맞춘 뒤 최정예병을 이끌고 유찬이 찍어 준 포인트를 공략하고자 [[야습]]을 감행했다. 그러나 유찬이 투항한 순간 육항은 유찬이 자신들의 약점을 공략해 들어올 것임을 직감했기에 병력을 교체하고 진군을 기다리고 있었고, 결국 [[강습]]한 양조는 전투 초반에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고 만다. 정예병을 다 잃고 나니 뭘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양조는 퇴각을 결심하나, 육항의 병사들이 양조군을 추격하면서 그대로 군이 궤멸되어 버렸다. 양조가 무너져버리며 양호도 강릉에서 물러났고, 둘 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나란히 강등을 당했다.[* 양조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평민으로 좌천됐다. 참고로 양호는 거기장군에서 평남장군으로 직책이 깎였다.] 덧붙여 양조는 좌천 2년 뒤에 병사했다고 서술되기도 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양조, version=89)] [[분류:서진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