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82년 출생]][[분류:1951년 사망]][[분류:독일의 남작]][[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제국군/군인]][[분류:독일의 정치인]][[분류:나치당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슈투트가르트 출신 인물]] [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include(틀: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바이츠제커1.jpg|width=100%]]}}}|||| ||<#666> {{{#FFF 이름}}} ||<(>'''Ernst Freiherr von Weizsäcker'''[br]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 남작|| ||<#666> {{{#FFF 출생}}} ||<(>[[1882년]] [[5월 25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슈투트가르트 || ||<#666> {{{#FFF 사망}}} ||<(>[[1951년]] [[8월 4일]], [[서독]] 린다우 || ||<#666> {{{#FFF 복무}}} ||<(>[[슈츠슈타펠]] (1938년 ~ 1945년) || ||<#666> {{{#FFF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소장(계급)|소장]] (여단지도자) || ||<#666> {{{#FFF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 ||<#666> {{{#FFF 가족}}} ||<(>[[아들]]: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물리학자, 원자핵 모델과 항성 핵융합 반응에 관해 연구했다. 질량이 큰 별의 수소 핵융학 경로인 CNO 순환반응을 [[한스 베테]]와는 독립적으로 발견하였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서독]] 제6대 [[독일 대통령|대통령]]] ||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의 군인, 외교가. [[독일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을 거치며 파란 많은 이력을 쌓았다. == 유년 시절 == [[슈투트가르트]]에서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재상이던 카를 폰 바이츠제커 남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 군 경력 == [[1900년]]에 해군에 입대했다. 이후 해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주로 베를린에서 근무하여 군 경력을 쌓으며 승진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주로 라인하르트 쉬어 제독 밑에서 근무하며 유틀란트 전투 등에 참전했다. [[1916년]]에 남작작위를 상속받았다. [[1917년]]에 1급 철십자 훈장 및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8년 8월부터 라인하르트 쉬어 제독과 함께 해군 참모부에서 근무하였다. 패전 후 1919년 헤이그에 해군 대사로 파견되어 근무했다. == 외교관 경력 == [[1920년]]부터 [[바이마르 공화국]] 외교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1921년 이후 [[바젤]], [[코펜하겐]], [[제네바]], [[오슬로]], [[베를린]] 등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1931년 오슬로 공사(envoy)에 임명되었다. 1933년 베른 공사로 부임했다. 1933년 나치 집권이 시작되었다. 1936년 베른 대사(ambassador)에 임명되었다. == [[나치당]] 입당과 [[슈츠슈타펠|친위대]] 입대 == [[1938년]]에 [[나치당]]에 입당 후 [[슈츠슈타펠|친위대]]에 들어갔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의 아래에서 외무차관을 지낸 바이츠제커는 전쟁도 불사하는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문제에서 상사인 폰 리벤트로프에게 불려가 질책당하기도 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 [[독소불가침조약]]당시 외무차관이기도 했던 바이츠제커는 [[1942년]]에 친위대 명예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43년 [[바티칸]]의 대사로 부임하여 [[1945년]] 종전 때까지 자리에 있었다. 그는 독일이 이탈리아를 점령할 때 바티칸을 점령하지 말라고 [[히틀러]]에게 탄원해 승낙을 받아내기도 했다. == 전후 [[전범 재판]]과 최후 == || [[파일:바이츠제커2.jpg|width=100%]] || || 재판에 회부된 폰 바이츠제커 || 패전 후인 [[1947년]]에 연합군에 체포된 바이츠제커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장관급 인물로 취급되었다. 바이츠제커는 침략전쟁 초기에 외무차관이었기에 전쟁 주도혐의로 기소되었고 프랑스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것에 협력한 혐의도 인정되어 인도에 반한 죄도 추가되었다. 바이츠제커는 유대인 관여는 자신은 하지 않았다고 변론했지만 재판결과 징역 7년이 선고되었다가 다시 5년형으로 감축되었다. [[1950년]]에 은사석방된 바이츠제커는 이후 반전, 반나치 운동에 대한 회고록을 편찬했는데 [[1951년]]에 바이에른 주 [[린다우]]에서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 가족관계 == [[1911년]]에 뷔르템베르크 왕국군 장교의 딸인 마리아네 폰 그레페니츠(Marianne von Graevenitz, 1889~1983)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1912~2007) * 에른스트 빅토어 폰 바이츠제커(?~1915) - 영아기에 사망 * 아델하이트 폰 바이츠제커(1916~2004) * 하인리히 폰 바이츠제커(1917~1939) - [[폴란드 침공]]에서 전사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1920~2015) 장남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는 원자핵 모델과 항성 핵융합 반응 등에 관한 업적으로 널리 알려진 저명한 핵물리학자였으며, 막내아들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는 전후 [[서독]]의 [[독일 대통령|연방 대통령]]이 됐고, [[독일 재통일]]을 재임중에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