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66년 출생]][[분류:1931년 사망]][[분류:칠레 대통령]][[분류:자동차 사고로 죽은 인물]] [include(틀:역대 칠레 대통령)] [[파일:President_Emiliano_Figueroa.jpg]] Emiliano Figueroa Larraín 1866년 7월 12일 ~ 1931년 5월 15일 [목차] [clearfix] == 개요 == 에밀리아노 피게로아 라라인은 1925년 12월 23일부터 1927년 5월 10일까지 [[칠레]]의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또한 1910년에 몇 달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 전기 == 피게로아는 1866년 7월 12일 [[산티아고]]에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피게로아 아라오스와 로잘리아 라라인 에체베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산 이그나시오 학교에서 공부한 후 주립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1889년에 졸업했고 같은 해에 [[산티아고]] 총독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피게로아는 정치 경력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더 강력한 간부를 지지하는 자유 민주당에 가입했다. 그는 1900년에 빅토리아와 멜리필라의 대리인으로 선출되었고 1903년에 재선되었다. 1907년, 그의 임기가 끝나자, 그는 같은 해 7월에 사망한 후안 호세 발렌수엘라 레레 푸차카이 부총리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1909년, 피게로아는 다시 한번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07년 10월 25일 [[페드로 몬트]] 대통령은 피게로아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하여 1909년 9월 15일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페드로 몬트]] 대통령은 1910년 8월 16일 사망하였고, 후임으로 엘리아스 페르난데스 알바노 내무장관이 되었다. 페르난데스는 피게로아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했지만, 같은 해 9월 6일에 사망했다. 피게로아는 페르난데스의 후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12월 23일 [[라몬 바로스 루코]]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911년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었고, 1914년 [[아르헨티나]] 대사가 되었다. 피게로아는 무해한 정치인으로 여겨졌고, 보수당, 자유당, [[칠레 급진당]]의 3개 주요 정당은 1925년 [[칠레 대통령]] 선거를 위한 컨센서스 후보로 그를 선택했다. 단일 후보를 낸 목적은 나라가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서 정치적 유세를 피하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인 호세 산토스 살라스는 3당의 합의를 무시하고 사회공화당 노동자 연합의 지원을 받아 출마를 선언했다. 1925년 12월 23일 피게로아는 살라스를 쉽게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었다. 피게로아는 야심찬 장군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를 전쟁부 장관으로 유지했고, 후에 그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1927년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는 피게로아의 형 하비에르 앙헬의 체포를 명령했다. 정치적 압력을 견디지 못한 피게로아는 사임했고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98%의 득표율로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는 대통령이 되어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1928년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는 피게로아를 [[페루]] 대사로 임명하였다. 1929년 [[칠레]] 중앙은행의 총재가 되었다. 1931년 5월 15일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