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중화군 출신 인물]][[분류:1876년 출생]][[분류:1946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 || 성명 ||<(> 여순근(呂淳根) || || 이명 ||<(> 오순근(吳淳根) || || 생몰 ||<(> [[1876년]] [[3월 19일]] ~ [[1946년]] [[3월 5일]] || || [[출생지]] ||[[평안남도]] [[중화군]] || || 사망지 ||<(> [[강원도]] ||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여순근은 1876년 3월 19일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9년 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에 임관되어 1902년 부위(副尉)로 승진했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강원도에서 의병에 가담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한일병합]] 후 은거했다가 1919년 [[3.1 운동]] 이후 [[유성삼]]·이수영(李秀英)·주석환(朱錫煥)·표영준(表永準)·명덕상(明德相) 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훈련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해 11월에는 안동현 임시의사회에 참여했다. 1920년 2월 말, 여순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 휘하에서 경호부장에 임명되었고, 19204년 4월에는 [[안병찬(1881)|안병찬]]을 총재로 하는 대한청년단연합회가 조직되었을 때 경호부장에 임명되었으며, 9월 21일에는 임시정부 평북연통제의 경무사(警務司)로 임명되었다. 1920년 12월 대한독립단이 광복군사령부에 통합되자, 그는 사령장 [[조맹선]]의 부관으로서 참모장 [[이탁(1889)|이탁]] 등과 함께 대일 무력항쟁을 수행했으며, 훈련국장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전념했다. 1922년 환인현에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였으나, 채상덕(蔡相德)·김유성(金有聲) 등이 통의부에서 탈퇴하여 의군부를 조직하는 내분이 발행하자 유응하(劉應夏) 등 전 한교회(韓僑會) 인사 13명과 함께 “통의부는 내분이 야기되고 신·구파의 대립중이므로 통일의 실현을 거둘 수 없기 때문에 태도를 선명히 하여 탈퇴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따로 대한군민부(軍民府)를 조직했다. 이후 일본군의 탄압이 거세지자 만주에서 은거했다가 [[8.15 광복]] 후 귀국했고, 1946년 3월 5일 강원도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여순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아들 [[여행렬]] 또한 평양부청에 폭탄을 투척했다가 8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