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교통]][[분류:역사]]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280px-The_Swan_with_Two_Necks,_1831,_engraved_by_F._Rosenberg_after_a_painting_by_James_Pollard.jpg|width=100%]]}}}|| || {{{#000000,#ddd {{{-1 [[19세기]] [[영국]] [[런던]]의 대표적인 역참이었던[br]'The Swan with Two Necks.'}}}}}} || [목차] [clearfix] == 개요 == '''역참'''([[驛]][[站]], public stage station)은 과거 [[마구간]]과 [[여관]]을 제공하고 [[지방(지리)|지방]]의 공적 업무를 대행하던 장소를 일컫는 말이다. 역참의 '역(驛)'이라는 용어는 오늘날에도 [[역(교통)|열차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라는 뜻으로 바뀌어 남아 있다. 한편으로 역참의 '참'은 [[중화권]]에서 [[철도역]]과 [[시외버스]] [[터미널]], [[시내버스]] [[정류소]]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한국사]]에서는 특히 지리적 거점에 설치되어 [[조정]]의 [[문서]]를 전달하고, 외국 [[사신(외교)|사신]]을 맞아 접대하는 등의 일을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 시설로서 공공의 기별, 역마, 역원 등 여행 체계를 합쳐서 이르는 말이었다. 대개 25리마다 1참을 두고 50리마다 1원을 두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역참(驛站)「[[명사]]」 『[[역사]]』 [[조선 시대]]에 있던 공공의 기별, 역마, 역원 등 [[여행]] 체계를 합쳐서 이르는 말. 조선 시대에는 대개 25리마다 1참을 두고 50리마다 1원을 두었다." 참조.] == 용어의 뜻 == '역'은 원래는 '[[말(동물)|말]]을 [[카센터|키우고 관리]]하면서 사람과 말이 쉴 수 있는 [[숙박시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역의 [[등급]], 형태, 위치, 기능 등에 따라서 다양한 역의 분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공통적인 개념은 '''지친 말을 바꿔 탄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원(숙박시설)|원]](院)과 합쳐 역원(驛院)이라고 불렀고, [[중국]]에서 역을 주로 부르는 표현인 참([[站]])[* 파발 제도하에서, 역과 비슷한 일을 하는 파발꾼용 시설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과 합쳐 역참(驛站)이라 부르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역참이라고 불렀으며 현재의 [[도카이도 본선]], [[도카이도 신칸센]] 이름의 유래가 된 [[도카이도]] 53역참이 유명하다. == 역사 == 전통적인 '역'의 개념이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삼국시대]]로, 이때도 전국 곳곳에 설치되었고 이동은 이런 역을 거치며 했지만 아쉽게도 구체적인 위치나 전국 역참의 목록 같은 것이 따로 남아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신라]] [[소지 마립간]]이 설치한 우역(郵驛)이나, 역 이름까지 남아있는 사례로는 [[울산광역시]] 지역에 설치한 굴헐역(屈歇驛)이나, [[충주시]] 근처에 설치한 욕돌역(褥突驛) 등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국내 이동뿐 아니라 주변국으로 역이 쭉 이어지는 노선도 정비돼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천정군(지금의 [[원산시]] 일대)부터 [[발해]]의 책성부(동경 용원부로 추정)에 이르는 길목에 39개의 역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전국 도시나 주변국으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에는 역참이 줄지어 있어서 여행자의 편의를 도왔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고려 때는 전국에 22개의 길과 525개의 역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 중국을 정복한 [[몽골]]([[원나라]])은 중국뿐만 아니라 몽골 등 지배 전역에 걸쳐 역전제도를 실시했고 [[명나라]] 또한 원의 역참제도를 계승, 발전시켰다. 명나라 시대의 역참은 1700곳이 넘었고 명나라 조정은 역참 도로의 포장, 보수부터 각 역참 사이의 이동기한에 이르기까지 역참관리를 매우 빡빡하게 하였는데 명의 역참제도는 [[티무르 제국]]의 사절단이 감탄할 정도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기존에 역원을 대부분 [[절(불교)|절]]들이 운영하던 것에서 전부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영 시설로 바뀌어 역마다 책임자인 종6품 찰방(察訪)을 임명했고 조선 후기에 들어 비슷한 역할을 하던 [[원(숙박시설)|원]](院)을 점차 흡수된 이래 [[구한말]] 우체사가 설치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당시 도로는 군사적인 목적이 강해, 조선시대 역은 지금의 [[국방부]] 격인 [[병조]]에서 관리하였다. [[사찰]]이 역의 역할을 했던 게 다소 의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고려만 그런 것은 아니고 중세 [[유럽]]에서도 [[수도원]]이나 [[성당]] 등에서도 숙박업 등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 당시에는 나라에서 직접 곳곳에 숙박/교통시설을 운영하기에는 행정 능력이 부족했고, 민간 자본으로 운영하기에는 [[자본주의]]나 기술력이 충분히 뒷받침될 만큼 발달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노숙]]을 하자니 [[치안]] 능력의 부족으로 인한 [[범죄자]]들이나 자연 개발이 덜 된 탓으로 설쳐대는 맹수들이 많았기 때문. 그런 상황에 일반 [[마을]]이나 [[영지]]에서 떨어진 교통의 요지에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을 하고 [[도적]]이나 [[맹수]]로부터 자체 방어가 가능한 수준의 일정한 인원과 시설을 갖춘 비교적 안전한 쉼터는 종교시설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중세만 해도 중세의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자체 방어를 위해 [[수도자]]나 [[승려]]가 무술을 연마하거나, 절이나 수도원에 성벽을 쌓아 요새화 하는 게 의외로 흔했다. 중세 유럽의 수도자가 [[전쟁]]에 참여한 사례도 있고, [[고려사]]에도 [[서경(고려)|서경]] 반란 진압 당시 자원해서 참전한 관선이라는 [[승려]]가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혼자서 반란군 십여 명을 썰어버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의 [[승병|소헤이]]는 아예 도를 넘어 유력 사원이 사실상 지방 영주화된 케이스. 종교시설/교단 입장에서도 숙박비와 여러 사람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열리는 [[시장(경제)|시장]] 기능, 여기에 기본적으로 운영자금을 대기 위해 나라에서 주거나 [[교회]] 차원에서 지원하는, 혹은 사람이 모이면서 자체 노동력으로 개간하는 재물과 논밭, 여행자들이 무사여행을 빌면서 내는 재물들 덕택에 역원은 상당한 수입원이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족으로 중세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 시설이 부분적으로 행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문맹률]]이 높던 시절 행정 실무에 필수적인 글을 아는 사람들이 그나마 많은 곳은 종교시설뿐이었으니까. 지금도 [[독일]]에서는 [[결혼식]]을 하면 근처 교회에 이를 등록하는 경우가 있는데, 과거 중세 시절의 문화가 아직 남은 것이다.] == [[암행어사]]와의 관련점 == 이 역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일꾼들을 역졸이라고 부른다. 본래는 양인이지만 신량역천이라 해서 천한 일을 하는 부류로 취급받았다. 이 역졸들은 암행어사가 필요할 때 병력 역할도 했다. [[시대극]]에서 '[[암행어사]] 출두야!'라고 외치며 관아에 쳐들어오는 장정들이 이 역졸이다. 이웃 고을 포졸들은 100%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중앙정부 직속이라 지방 [[수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역졸들을 병력으로 동원한 것. [[마패]] 또한 본래는 역참을 이용하기 위한 증표으로, 암행어사의 신분증명서가 아니며[* 그러나 실제 암행어사로 활동했던 박내겸의 일화에서 볼수있듯 당시에도 마패는 암행어사를 상징하는 물건의 위상으로 자리매김한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암행어사 외 역참을 사용하는 자들도 마패를 지니고 다녔다. 역참의 인력, 물건이 암행어사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이유는, 암행어사가 지방에서 신뢰할 수 있고 다루기도 쉬운 중앙 정부 직속 기구가 역참이었기 때문이다. == [[지명]]에 남은 흔적 == 전국에 있는 수많은 '역말(驛말)' *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동]] - 과거 이름이 역말로 영서역에서 유래하였다. [[서울 지하철 6호선]] [[역촌역]]이 근처인 녹번동과 역촌동의 경계에 있다. *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강남구)|역삼동]] - 조선시대 있던 [[양재역]] 주변의 3개 마을이 있어 이 지명이 붙었다. 공교롭게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 ~ [[강남역]]의 3역 모두가 역삼동의 좌우 경계 안쪽에 있다. *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 [[역동]] - 경안동은 경안역에서 유래했다. 역동에는 광주시의 대표역 [[경기광주역]]이 소재한 곳이다. *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 덕풍역(徳豊驛)에서 유래하였다. *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중앙선]] [[아신역]]과 [[중앙선]] [[오빈역]]은 역참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 [[경기도]] [[용인시]] [[역북동]] - 이 동네도 본래는 역동과 북동으로 나누어져 있던 곳으로 이곳에 소재하던 금령역이라는 역참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 북한의 [[청단군]] - 광복 당시 [[황해도]] [[벽성군]] 추화면으로, 역참 이름에서 유래했다. *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1가, 청파동2가, 청파동3가 - 청파역(靑坡驛)에서 유래했다. 현재는 인근의 [[서울역]]이 기능하고 있다.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낙생초등학교, 낙생중학교, 낙생고등학교 - 낙생역(樂生驛)에서 유래했다. *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 대화역(大火驛)에서 유래했다. 해외 * [[신주쿠]] == 기타 == 역이 말을 갈아타는 시설이기 때문에 역에서 쓰이는 말들은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역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곤 했는데, 여기서 [[역마살]] 이라는 용어가 유래되었다. '한참'이란 말도 이 역참제에서 나온 말이다.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를 옛날엔 '한 참(站)'이라 했는데 요즘 말로는 '한 [[정거장]]'이란 말과 같다. 그런데 고려시대 때에는 이 '한 참'의 거리가 100리(약 40km)였고 조선시대 때에는 30리(약 12km)였다. 그러니 고려시대 때엔 '한 참'을 간다고 하면 40km나 가야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이의 거리가 멀다보니 먼 곳을 갈 때 '한참을 간다.'고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학교대사전]]에는 '수업시간에 [[쪽지]]를 돌리면 신속하게 수신자에게 도착하는 체계'라고 나와 있다. 쪽지를 받을 사람의 중간 위치에 있는 [[친구]]들을 거치는 게 역참제를 연상케 해서 그렇게 부르는 듯.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역(교통) ,version=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