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염필수}}}'''[br]'''廉弼守[* 廉'''{{{+1 泌}}}'''守라고 표기한 문헌도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염필수.png|width=100%]]}}} || ||<-2> 1934년 6월 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본관''' ||[[파주 염씨]][* 국파공파-諱세경-효언계 22세 수(守) 항렬.] || ||<|2> '''출생''' ||[[1914년]] [[5월 9일]][* 음력 4월 15일.]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횡정 64번지[br](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서야동) || ||<|2> '''사망''' ||[[1950년]] [[7월 15일]] ||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시]]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14년 5월 9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횡정(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서야동) 64번지에서 아버지 염봉남(廉鳳南, 1876. 9. 27 ~ ?)과 어머니 [[창녕 조씨]](1890. 8. 3 ~ ?)[* 조성택(曺成澤)의 딸이다.]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창녕 조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 [[은진 송씨]](1873. 3. 22 ~ 1903. 12 .15) 송덕오(宋德五)의 딸은 슬하에 형 염인수(廉仁守, 1897. 7. 1 ~ ?)를 두고 1903년 별세하였다.] 이후 달성군 달서면 내당동(현 대구광역시 [[서구(대구)|서구]] [[내당동]])으로 이주하였다. [[계성고등학교(대구)|대구 계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동맹휴학 건으로 그해 3월 학업을 중단했다. 그러다가 그해 4월 [[일본]]으로 유학, [[교토]] 도시샤중학교(同志社中學校) 4학년에 편입하여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7&idx=3732|학업을 지속했다]]. 1931년 3월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6월 말, 대구 중등학교 비밀결사단체 사회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7월 21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6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0287&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받고 출옥하였다]]. 이때부터 학생운동과 동시에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출옥 후 그해 11월, 사회과학연구회 동료 및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경상북도 조직원들 일부가 만든 적색노동조합 건설 대구 협의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32년 12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22&evntId=0034988892&evntdowngbn=Y&indpnId=000002009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주요 활동지를 평안남도로 이동해 1933년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고 그해 10월 [[평양시|평양부]]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평양 사동공작위원회에 참여하였다가 1934년 [[서울서대문경찰서|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http://db.history.go.kr/id/ia_3111_2399|검거되어]][* 당시 주소지는 [[평안남도]] [[평양시|평양부]] 신양리(현 평양시 [[보통강구역]] 유경1동) 숭실전문학교 기숙사였다.] 1년여 간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구금되었다. || [[파일:염필수(1934년).png|width=90%]] || || 1934년 4월 6일 [[서울서대문경찰서|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그리고 1935년 3월 9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의 예심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 [[http://db.history.go.kr/id/ia_3110_2399|처분을 받고]] 풀려났으며, 1936년 5월 관동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차 체포되었으나 [[훈방]]으로 풀려났다. 석방된 후에는 평안남도와 대구부를 오가며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활동에 집중하다가 1939년경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허베이성]] [[창저우시(허베이성)|창저우]]역 앞에 거주하면서 점원으로 [[http://db.history.go.kr/id/im_108_10154|일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 대구시당 결성에 참여, 조직부장에 취임하였으며, 또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대구 지방 평의회 결성에도 참여한 후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9월 [[박헌영]]의 사주를 받아 남조선노동자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철도파업 노동자들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경상북도지부에 집결시킨 뒤 계획적인 파업지도 및 민심 선동에 나섰다. 같은 달 24일 파업 노동자들을 이끌고 대로로 나아가 '적기가'를 부르며 식량 추가 배급 및 임금 인상 등의 구호를 외치며 [[https://blog.naver.com/bhee639/90188500208|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는 얼마 뒤 [[대구 10.1 사건]]으로 발전한다.] 이후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15일 [[6.25 전쟁]] 중에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더불어 그의 공훈을 기려 202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중구(대구) 출신 인물]][[분류:파주 염씨]][[분류:1915년 출생]][[분류:195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총기에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