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청나라의 군인]][[분류:안후이성 출신 인물]][[분류:1838년 출생]][[분류:1901년 사망]] [include(틀:청사고)] ||<-2> '''{{{+1 엽지초}}}[br]葉志超 ''' || || '''본명''' ||엽지초|| || '''출생''' ||1838년, [[청나라]] [[안후이성]] [[허페이시]]|| || '''사망''' ||1901년, [[안후이]] [[허페이시]]|| || '''국적''' ||[[청나라|[[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8]] 청나라]]|| || '''역임지위''' ||회군장령(???? ~ ????)[br] 직예제독(???? ~ 1894)[br] 제군총통(1894 ~ 1895)[* 기록 부족으로 인한 직위 추정.][* 제군총통 직은 정여창이 음독자살을 하고, 완전히 패배한 직후 책임을 질려고 물러났다.] || [목차][clearfix] == 개요 == 엽지초는 [[청나라]] 말기 시절 군인으로 자는 서청(曙青)이다. == 생애 == 1838년 청나라 안후이성 허페이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어린 시절 전부 돌아가셔서 외숙부에 의해 입양되었다. 외숙부가 소를 방류하고 잡화를 만드는 것을 도왔다. 한 번은 해선량이 연대를 이끌고 왕웨이 태평군을 공격하는 훈련을 했는데, 그는 참전을 요구하여 허락을 받았고 격전 중에 토총과 총탄이 그의 허리에 맞아 쓰러졌고, 사람들은 모두 엽지초가 죽었다고 여겼지만, 그는 일어나 전투에 참가했다. 해선량은 엽지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고 그 뒤 엽지초는 항상 앞장서서 진을 치고,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1862년에는 장쑤성 회군 소속 [[장수성]]의 장막으로 들어간 이래 탁월한 전공을 세웠고 유병장의 밑에서 휘군을 광살했다. 또 마보대를 이끌고 끝까지 추격하여 천장천으로 북진하였고, 또 반군을 남김없이 참수하여 동연군을 토벌하였다. 1875년 정정진 총병 직속으로 신식 훈련군을 이끌고 천진신성을 지키며 대고구 후로를 위해 해방을 방어했다.광서 8년, 청나라 조정은 육·해군을 정리하고 산해관 포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이홍장은 엽지초에게 그 임무를 맡기고 실제 총병을 수여했다. 광서 15년, 직예제독 겸 북양방군익장으로 승진하였다. 광서 17년, 열하조양(熱河朝陽) 금전도교(金田道敎) 교민(敎民)이 봉기하자, 청 조정의 명을 받아 정예를 이끌고 고북구로 나가 건창에 진군하여 롄커위린, 선자워관, 패자묘를 이끌고 장고의 포위를 풀고 오단성을 함락시켰으며, 1월에는 열하 전역을 거두어 백성 수령 이국진을 사로잡아 수레를 갈라 양옥향을 묶어 천진으로 보내 참수하였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조선정부는 청나라 정부에 지원군을 요청했으며, 이때 엽지초는 조선으로 가서 의병들을 진압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태원총병 엽사성과 회담을 하여 엽지초 자신은 공주에서, 엽사성은 아산에서 일본군에 맞써 싸우기로 약속하였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평양성으로 도주하였다. 그 후 [[이홍장]] 에게 성환 전투에서 승전을 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려버렸고 허위 승전보를 들은 이홍장은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은 채 황제인 광서제에게까지 보고하여 제군총통으로 올라 가버리는 촌극까지 일어났다. 엽지초는 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표창을 받고 진급하여 매우 기뻐하며 매일 술을 마시며 즐거움을 찾았다. 엄중한 전쟁 상황과 적정에 대한 분석과 연구는 하지 않고 포대 주변에 간단한 요새를 쌓고 방어에 소극적이었다. 군정을 거짓으로 보고해 평양 청군 총통 직함을 받은 장수들은 모두 불복했다. [[좌보귀]][* 좌보귀는 평양성의 현무문을 지키고 있었다.]가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엽지초는 후퇴할 것을 고수했다. 일본군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엽지초는 평양성에 백기를 걸어 도주했다. 이후 엽지초가 부대를 이끌고 안주로 향하자 섭사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안주의 지형은 험준하고 방어저격을 하는 곳입니다. 이곳을 고수하면 반드시 일본군을 격파하고 역전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엽지초는 이를 듣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주했다. 청 조정에서 이를 듣고 엽지초의 직위를 혁파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홍장]]은 청나라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소했다. 이듬해 경사로 보내져 형부의 재판을 받아 참형을 선고받았다. 1900년에 사면되었고 1901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매일 같이 알코올 섭취로 인한 간경화로 추정중.] == 기타 == *매일 술을 마셨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