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예란 페르손]][[분류:인물별/생애]]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예란 페르손)] [include(틀:예란 페르손)] [목차] == 초년 == [[1949년]] [[1월 20일]]에 [[스웨덴]] [[쇠데르만란드]]의 빙오케르에서 그는 노동자 계급 가정의 세 아이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릭 페르손은 트럭 운전사였고, 어머니 이르마는 공장 노동자였다. 어린시절부터 자라는 동안 스웨덴 내외의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고등학교 재학 중 학생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고, 대학 재학 중에도 정치 활동을 계속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사제가 되고 싶었다고 밝혔으나,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외레브로]] 대학교에 지원하여 사회학을 전공했으나 졸업하지는 않았다. == 정계 입문 후 == [[1970년]],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에 입당해 청년조직인 스웨덴 사회민주청년동맹(SSU)에서 일하다 24세였던 [[1973년]], 고향인 카트리네홀름에서 지방 의원으로 선출되며 첫 공직을 맡게 된다. 지방 의회에서 일할 당시에 교육, 사회 복지, 경제 개발과 관련된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그 당시 지성, 근면, 그리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헌신으로 유명해진다. 그러던 [[1979년]]에 스웨덴 동부의 [[쇠데르만란드]]에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 소속 [[스웨덴 의회|스웨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의원으로 일할 때에도 지방 의회 시절과 동일하게 교육, 사회 복지, 경제 개발과 관련된 문제들에 계속해서 초점을 맞추었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정책 결정에 대한 실용적인 접근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야당과도 꾸준히 협력하는 등 "일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국회의원 재임시절에는 스웨덴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는데, 대표적으로 실업률 감소, 교육과 의료에 대한 접근 확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들을 옹호했다. === 제6대 학사장관 === [[1989년]], 제1차 [[잉바르 칼손|칼손]] 내각 동안 교육부의 학사(學事)장관(Skolminister)으로 임명되었다. 학사장관 재임기간 동안, 교육 정책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에 집중했는데, 특히 교사 양성과 전문적인 개발을 시스템을 개선하고, 저소득 지역의 학교를 위한 기금을 늘렸으며, 교실 내 더 많은 다양성의 포용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사장관으로서 주요 계획 중 하나는 비판적 사고, 문제 해결, 그리고 창의적인 표현을 강조하는 새로운 커리큘럼의 도입이었다. 이 커리큘럼은 "Lpo 94"로 알려지게 되었고 스웨덴에서 더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교육 시스템을 육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91년]] 스웨덴 의회 총선에서 스웨덴 사민당이 경제위기의 책임을 물어 패배하면서 밀려나면서 동시에 학사장관직도 물러났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육 정책에 전념했고 사민당이 다시 정권을 되찾는 [[1994년]]까지도 교육현장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 야당 시절 === [[1991년]], 스웨덴 총선에서 사민당이 패배한 이후, 당의 부대표로 선출된다. 부대표로서 당의 지지기반을 재건하고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 사회정의와 경제성장, [[지속가능발전|환경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정책 플랫폼을 개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야당 시절에는 [[칼 빌트]]의 중도우파 정부를 비판하는 것에 앞장섰는데, 주로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 의료, 교육을 포함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정부를 비판했다. 집권 여당을 비판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사민당에 대한 풀뿌리 지지를 동원하고 다른 야당들과 동맹을 구축하는 일을 했다. 야당시절 그의 주요 우선순위들 중 하나는 광범위한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정책 플랫폼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웨덴이 사회적 책임과 경제성장, 경쟁력을 결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일자리 창출과 투자, 혁신을 촉진하는 정책을 주창했다. 이 시기 그에게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환경 지속 가능성이었다. 그는 [[기후 변화]]를 방지하고 스웨덴의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조치들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는 또한 재생 에너지와 청정 기술에 대한 더 많은 투자를 추진했다. 당시 스웨덴은 90년대 초반에 시작된 경기 침체, 높은 실업률, 막대한 예산 적자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당시 칼 빌트 총리는 온건당 외 3당들 사이의 취약한 연합에 의존하고 있었던 터라 1994년 스웨덴 의회 총선거에서 사민당이 45%에 달하는 압승을 거둘 있었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야당 부대표 시절은 사회민주당을 재건하고 광범위한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 강령을 개발하는 데 약속으로 점철되었다. 그의 노력은 1994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정권교체]]를 통해 재집권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후 당대표가 되는 데에도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평가받는다. === 정권교체와 제4대 재무장관 === [[1994년]] 사민당의 압승과 함께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어 1996년까지 재직했다. 재무 장관으로서 자신의 재직 기간 동안 페르손은 1990년대 초에 국가를 강타한 재정 위기로부터 스웨덴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책들을 시행하는 데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정책들은 후술할 정부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인상하며, 재정 건정성을 확보하고, 은행 부문을 구조조정하는 것을 포함했다. 당시 스웨덴은 부동산 시장의 투기 거품 붕괴와 그로 인한 금융 위기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고 있었기에 강력한 구조조정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경제 위기의 결과로 경제는 급격히 위축되었고, 정부는 큰 예산 적자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경제를 안정시키고 재정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많은 조치들을 시행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페르손 계획(Persson-plan)"으로 불리는데, 이러한 조치들에는 공공 부문에 대한 지출의 규모를 줄이고 다양한 산업에 대한 보조금을 줄이는 것을 포함한 일련의 지출 삭감을 단행하는 등의 지출 구조조정과, 수년에 걸친 소득세·소비세·재산세의 세금 인상, 파산한 은행들의 국유화 및 통폐합을 통한 더 강력한 금융 기관의 설립 포함하는 국가 주도적 은행 부문의 구조 조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웨덴의 통화인 [[크로나]]를 평가절하하는 결정 등이 포함되어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그 당시 큰 논란이 되었고, 일부 비평가들은 위와 같은 조치들이 되려 경제 성장을 억제하고 국가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러한 조치들이 스웨덴을 위기에서 구제하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받게 된다. 페르손의 재무장관 재임기 이후, 총리 재임기인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스웨덴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재정 상태는 크게 개선되었다. === [[예란 페르손/일생/총리 재임기|제31대 스웨덴 총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예란 페르손/일생/총리 재임기)] [[1996년]] 총리였던 [[잉바르 칼손]]의 뒤를 이어 유력한 총리 후보였던 부총리 모나 살린을 제치고 [[스웨덴 총리]] 및 사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총리 재임 시절에는 '90년대 초반의 스웨덴 경제 위기를 극복해냈고, [[2001년]]에 발생한 [[닷컴 버블]] 붕괴로 인한 경기 침체도 이겨내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무려 10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이는 [[타게 엘란데르]]의 뒤를 이은 스웨덴 역대 두번째 최장수 집권 기록에 해당한다. == 정계 은퇴 후 == [[2007년]] [[10월]], 회고록 《나의 길, 나의 선택(Min Väg, Mina Val)》을 출간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재임 기간을 기록한 4개의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SVT]]에서 방영되었는데, 자신의 정적들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한 것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예란 페르손, versio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