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북이스라엘 국왕)] [목차] ||<#00008B> {{{#FFFFFF '''이름'''}}} ||<-4>예후 Jehu || ||<#00008B> {{{#FFFFFF '''생몰년도'''}}} ||<-4>기원전 882년~기원전 814년 || ||<#00008B> {{{#FFFFFF '''출생지'''}}} ||<-4>[[남유다 왕국]] || ||<#00008B> {{{#FFFFFF '''재위년도'''}}} ||<-4>기원전 841년~기원전 814년[br]약 28년|| ||<#00008B> {{{#FFFFFF '''종교'''}}} ||<-4>[[유대교]] → [[우상숭배]] || ||<#00008B> {{{#FFFFFF '''아버지'''}}} ||<-4>[[여호사밧]] || ||<#00008B> {{{#FFFFFF '''이전 국왕'''}}} ||<-4>[[여호람(이스라엘)|여호람]] || ||<#00008B> {{{#FFFFFF '''다음 국왕'''}}} ||<-4>[[여호아하즈(이스라엘)]] || == 개요 == [[성경]]의 등장인물. 북왕국 예후 왕조의 초대 국왕이며, 성경 이외의 기록에도 나오는 엄연한 실존인물이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은 성경 기록의 사실성과는 유무로 다들 실존인물이었다.] == 초기 생애 == 예후는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로, 군 사령관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9대 왕 [[여호람(이스라엘)|여호람]](요람)이었는데, 그는 [[아합]][* 구약성경 [[열왕기]]에 따르면, 아합은 [[여호와]]가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 숭배를 전국에 퍼뜨린 악한 왕이었다.]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선지자 [[엘리사]]는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당시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그를 왕으로 세운다는 의미였다. 당장 이스라엘 왕국의 사울과 다윗이 이런 방식으로 왕권을 인정받았다.] 아합 왕가를 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예후가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예언자(엘리사)는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말씀을 전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 야훼의 백성을 다스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다. 내가 이세벨의 손에 죽은 예언자들뿐 아니라 나의 모든 종들의 원수를 갚으리라. 그러니 너는 네가 섬기던 아합의 가문을 쳐부수어라. 내가 아합 가문에 속한 사내 녀석들은 종이든 자유인이든 씨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리라. 그리하면 아합의 온 가문이 망하리라. 나는 아합의 가문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가문이나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가문처럼 만들리라. 이세벨의 시체는 묻어주는 사람이 없어, 이즈르엘에 있는 제 땅에 버려져 개들이 뜯어먹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젊은이는 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열왕기하 9:6~9:10(공동번역성서) == 역성혁명 == 예후는 그 명령에 따라 휘하 병력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여호람 왕을 활로 쏘아 죽인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죄로 [[엘리야]]에게서 신이 저주를 내릴 것이라 예언 받았는데, 이 때 아합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아내 이세벨이 벌인 짓이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엘리야도 한 발 물러서서 왕조의 멸망은 그의 아들 대에 닥쳐올 것이라 예언한다. 그 예언대로 아들이었던 여호람 대(代)에 이르러 그의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고, 여호람의 시체는 아합이 나봇에게서 빼앗은 바로 그 포도원에 던져진다.][* 이때 잘 지냈냐는 여호람에게 "당신 어미이자 이교를 몰고 온 이세벨이 살아있는데 퍽이나 그렇겠소?"라고 [[응 니 애미|비꼬았다]]고 한다.] 그 후 아합 왕조의 사위가 되어 악을 행한 [[남유다 왕국|남유다]] 왕 아하시야를 처단한다. 그리고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죽이러 찾아갔다. 이세벨은 예후가 자기를 죽이러 찾아오는데 꽃단장을 하는 대범함을 보였고, 예후를 보자, 저주를 퍼붓는다. >예후가 문에 들어서자 소리쳤다. "상전을 죽인 역적 [[시므리|지므리]][* 공동번역성서 이외의 판본에서는 시므리.] 놈아, 그래 일이 잘 되었느냐?"[* 이세벨이 이야기한 지므리, 즉 시므리는 바아사 왕조를 멸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지만 왕이 된지 불과 7일 만에 아합의 아버지(즉 이세벨의 시아버지)인 오므리에게 찬탈당하고 죽었다. 즉 찬탈했다가 1주일 만에 죽은 시므리 꼴이나 나라고 예후를 저주한 것. 물론 예후 왕조는 4대를 이어간 오므리 왕조보다 조금 더 많은 5대를 이어가 북이스라엘 최장수 왕조가 되었으니 완벽하게 빗나갔다. 게다가 오므리 왕조는 아합 사후 단 십수년 만에 몰락한 반면 예후 왕조는 즈가리야 뺴고 안정적으로 재위해서 왕은 한 명만 더 즉위했는데 존속기간은 2배나 차이가 난다.] >열왕기하 9:31(공동번역성서) 예후는 자신이 포섭한 내시들을 시켜 그녀를 창문 밖으로 던지게 하였고, 떨어져 죽은 시신의 위로 마차를 몰고 지나가 확인사살을 했다. 그래도 이전 왕족이었으니, 시신이라도 장례를 치러주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장례를 치르기 위해 수습한 시신은 머리와 손, 발 외에는 모조리 곤죽이 된 것으로 모자라 엘리사의 예언대로 개들이 전부 뜯어먹은 뒤였다.(...) 왕위에 오른 예후는 아합 왕가의 왕족들을 숙청한 뒤, [[바알]] 숭배자들을 처단하는 철저한 혁명을 전개한다.[* 그 방법이 꽤나 무시무시한 것이 바알 숭배자들에게 바알을 모시는 제사를 크게 지낼 것이니 바알 숭배자와 바알의 선지자며 바알을 섬기는 성직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신전에 모이고, 안 오는 자는 죽인다고 공고를 냈고 바알 숭배자들은 예후가 자신들을 잘 대접할 거라 여겼는지 좋아라 하면서 바알 신전에 모였다고 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예후의 부하들이 정문을 틀어막고 병사들이 들이닥쳐 바알 숭배자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이후 신전 장식 등을 모두 부숴버리고 공중 변소로 바꿨다고 한다. 사실상 바알 신앙을 뿌리채로 뽑아버린 셈이다.][* 다만 바알 신앙은 이미 전대인 여호람 대부터 쇠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여호람은 아버지인 아합이 세운 바알의 기념 기둥을 치웠고 때문에 아합과 이세벨에 비해서는 그리 큰 죄를 짓지는 않았다고 평가받는다. 금송아지 숭배가 우상숭배기는 해도 야훼=금송아지라는 왜곡된 야훼 신앙이니 일단은 야훼를 대상으로 한 신앙이고 또 여로보암 1세 때부터 해온 일인 것과는 달리 바알은 아예 이방인 신이라 거부감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합 시절에도 엘리야가 바알 숭배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군중들을 동원해 바알의 사제들을 죽였는데 이것이 그 증거라고 볼 수 있을지도] 열왕기에 따르면, 예후는 그의 자손이 북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낼 것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예후는 바알 신앙 대신에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 1세]]가 퍼뜨린 [[금송아지]] 숭배를 다시 회복하였고, 결국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이스라엘 영토가 [[아람]]에 의한 침공을 받는다. 예후는 죽은 후 북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에 장사되었고, 그 아들 [[여호아하즈(이스라엘)|여호아하즈]]가 11대 왕이 되었다. === 텔 단 비문 === 1993년에 발견된 '텔 단 비문'은 위에 나온 아람 왕 하사엘이 세운 비문으로, 이 비문에는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유다의 아하시야 왕을 모두 자신이 죽였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예후의 쿠데타가 아람의 사주에 의한 반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https://yoda.wiki/wiki/Tel_Dan_stele|텔 단 비문]][* 성경의 내용을 토대로 봐도 나름 일리가 있는데 예후에게 기름부음을 준 엘리야는 먼저 아람의 하자엘에게 기름부음을 주었고 엘리사는 아람 장군인 나아만의 문둥병을 치료한 바 있다. 즉 두 사람이 아람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고 예후와 아람간의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거기다가 엘리사 자신도 엘리야로부터 직접적으로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이기도 하다.] == 아람의 침공 == || [[파일:640px-Jehu-Obelisk-cropped.jpg]] || || 살마누아사리두 3세 앞에 무릎꿇고 조공을 바치는 예후 || 성경 외의 기록에도 등장하는데, [[아시리아]] 비석 중 하나인 ‘블랙 오벨리스크’에서 아시리아 왕 살마누아사리두(살마네셰르) 3세 앞에 엎드려 은을 조공으로 바치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런데 자기 손으로 오므리 왕가를 다 죽인 예후가 이 비문에서는 ‘오므리의 자손 예후’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황상 정통성 문제를 없애기 위해[* 비슷한 예로 조선에서도 [[중종반정]] 후 명나라에 "[[연산군]]이 병들어 스스로 동생에게 양위하고 시골에 은거했다."라고 명나라를 속였던 사례가 있다.] 예후가 오므리 왕조의 혈통을 사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합 때에 카르카르 전투에서 격퇴했던 아시리아에게 스스로 숙이고 들어간 것은 예후의 쿠데타 정권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인데, 마찬가지로 엘리사가 세운 아람 왕 하사엘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시시각각 북이스라엘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었고,[* 예후가 길르앗 라못에서 회군한 탓에 갓 지파, 르우벤 지파, 므낫세 지파의 땅인 아로엘과 길르앗, 바산 일대가 모조리 아람에게 넘어가 버렸다.] 남유다 역시 살아남은 아합 왕의 딸인 태후 [[아달랴]]가 다윗 왕가를 숙청하고 스스로 여왕이 되면서 북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적대관계로 돌아서 버렸다. 결국 위아래로 고립되어 버린 예후는 시리아 북방의 강국인 아시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는데, 과거 아합과 벤하닷 2세가 공동전선을 펼쳐서 막아낸 적이 있던 아시리아 왕 살만누아사리두는 예후의 SOS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에 예후는 아시리아를 상국으로 섬기며 조공을 바치게 되었는데 이는 후일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양국이 아시리아에게 먹히는 날을 앞당기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아합은 성경에선 욕을 먹지만 실제로는 유능한 군주였으나 예후는 성경에서 그나마 악평이 덜하지만 실제로는 아합보다 못한 군주일 가능성이 높다. == 열왕기하의 평가 == 반면 열왕기에서는 야훼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바로잡고 옳은 일을 했다는 칭찬과 금송아지 숭배를 버리지 못하고 야훼의 율법도 따르지 않았다는 비판을 하면서도 예후 왕조가 예후 다음으로 4대를 이어나간 것은 바알 신앙을 따르던 오므리 왕조를 멸했기 때문이라며 그나마 역대 북이스라엘 왕들 중에선 나은 평을 남겼다. [[분류:이스라엘 국왕]] [include(틀:포크됨2, title=예후, d=2022-07-11 13: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