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노르웨이 관련 문서)] [[파일:360_F_314313655_7zw4QoqgvieVtgW7UXr5lN3IDCNmpDGn.jpg]] [[노르웨이어]]: Det kongelige slott [목차] [clearfix] == 개요 == [[노르웨이]]의 [[수도(행정구역)|수도]] [[오슬로]]에 있는 [[노르웨이/왕실|노르웨이 왕실]]의 [[법궁|정궁]](正宮). == 역사 == 노르웨이는 [[스웨덴 국왕]] [[망누스 4세]] 대에 [[스웨덴]]과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나,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와 스웨덴 국왕 망누스 4세의 자녀 정략결혼으로 인해 사실상 타국의 군주를 자국 군주로 모시는 신세가 되었다. [[칼마르 연합]]을 거쳐 스웨덴이 [[구스타브 1세 바사|구스타브 바사]]의 주도로 독립할 때 노르웨이는 [[덴마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덴마크 최후의 왕위 계승 전쟁이었던 백작 전쟁(Grevens Fejde) 당시 노르웨이의 [[가톨릭]] 대주교이자 섭정이었던 올라프 엥엘브렉손(Olav Engelbrektsson 1480~1538)이 [[크리스티안 3세]]에게 패하면서 사실상 덴마크의 [[속주]]로 굴러떨어졌다. 이후 덴마크 국왕들은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것으로 노르웨이 왕위 대관식도 퉁쳤으며, 노르웨이 방문은 커녕 [[덴마크인]] 귀족들을 [[부왕]] 또는 [[총독]]을 보내 대리통치했다. 이렇게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끄나풀 취급을 당하던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말기에 들어설 무렵 덴마크 총독들은 팔레트(Paléet)라는 건물에 거주했다. 원래는 [[노르웨이인]] 거상 베른트 앙케르(Bernt Anker 1746~1805)가 자신이 사용하던 연립주택이었는데 1814년 노르웨이가 독립을 선언하고 국왕으로 추대한 [[크리스티안 8세|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가 처음으로 사용했고, 이후 스웨덴 왕태자로 지명된 [[베르나도테 왕조]]의 [[칼 14세 요한|칼 요한]]이 노르웨이에 방문할때마다 이곳에 거주했다. 칼 요한이 스웨덴 국왕 칼 14세 요한이자 노르웨이 국왕 칼 3세 요한으로 즉위한 후 팔레트를 대체하기 위해 크리스티아니아(Kristiania)[* 오슬로의 옛 지명.] 서쪽을 새 왕궁이 지어질 부지로 택했고, 덴마크인 건축가 한스 린스토우(Hans Linstow 1787~1851)의 주도로 1824년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사 비용 문제로 1827~1833년 사이에는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으며 [[노르웨이 의회]]는 [[스웨덴-노르웨이 관계]]를 더 가깝게하고자 했던 국왕의 노력을 탐탁지 않게 여겨 보조금 지원을 거부하는 등 공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1844년 왕궁이 완공되었으나 칼 요한은 오슬로 왕궁이 완공되기 전 사망했고 이후 [[오스카르 1세]], [[칼 15세|칼 4세]], [[오스카르 2세]]가 이 왕궁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오스카르 1세와 칼 4세는 노르웨이에 흥미가 없어 여름 몇 달만 잠시 머무르다 [[스톡홀름]]으로 되돌아갔고 유일하게 오스카르 2세가 노르웨이에 흥미를 보여 이곳에서 자주 머물렀다. 1905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은 해체되었고,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칼 왕자가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로 선출되었다. 처음에 호콘 7세는 왕궁을 노르웨이 의회로 사용하려고 했으나 마음을 바꾸어 다시 왕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고 2년의 정비를 거쳐 호콘 7세 일가는 왕궁에 입주하였다. [[올라프 5세]] 치세 동안에는 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난장판이었고 현 국왕인 [[하랄 5세]] 대에 이르러 재차 정비를 시작해 2002년부터 대중에게 개방하고 있다. [[분류:노르웨이]][[분류:유럽의 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