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명''' ||<(> 오와인 로고크[br] (Owain Lawgoch) || ||<-2> '''생몰년도''' ||<(>[[1330년]]경 ~ [[1378년]] [[7월]] || ||<-2>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서리 || ||<-2>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모르타뉴쉬르지롱드 || ||<-2> '''아버지''' ||<(> 토머스 압 로드리 || ||<-2> '''직위''' ||<(> 용병대장, 귀네드 왕위 주장자 || [목차] [clearfix] == 개요 == [[웨일스 공국]]의 왕위 주장자.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잉글랜드로부터 웨일스의 독립을 꾀한 인물이다. == 생애 ==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Llywelyn ab Iorwerth, 1173 ~ 1240)의 후손이다. 허웰린은 허웰린 대왕으로도 일컬어지는 [[귀네드]] 왕국의 [[명군]]으로, 1195년부터 1240년까지 45년간 웨일스 전역을 통합하고 현명하게 통치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내분이 끊이지 않아 귀네드 왕국의 위세는 갈수록 약화되었고, 결국 1277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침공에 귀네드의 마지막 국왕 르웰린 압 그루퍼드가 복종한 뒤 1282년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목숨을 잃으면서, 귀네드 왕국은 멸망하고 웨일스 전역이 잉글랜드에 복속되었다. 조부 로드리 압 그루퍼드는 귀네드 왕국의 마지막 국왕 르웰린의 형제로, 귀네드 왕국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잉글랜드 왕실이 내려주는 연금을 수급하며 조용히 지냈다. 아버지 토머스 압 로드리는 서리, 체셔, 글로스터셔 등지에 토지를 사들이고 인장에 귀네드 가문의 네 마리 사자 [[문장(그림)|문장]]을 사용했지만, 귀네드 왕국을 부활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토머스의 외아들인 오와인 로고크[* 정식 이름은 오와인 압 토머스(Owain ap Thomas)로, 로고크(Lawgoch)는 '붉은 손'을 의미하는 별명이다.]는 일찍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군대에 입대해 생애 대부분을 유럽 본토에서 보냈다. 1363년 아버지 토머스가 사망했을 때 해외에서 돌아와 유산을 물려받고 영지를 수년간 경영하다가 1366년 3월에 다시 프랑스로 떠났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그가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해 잉글랜드군과 대적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다른 증거는 없다. 1369년, 그는 웨일스인으로 구성된 용병대 지도자로서 프랑스군의 편에 서서 잉글랜드군과 대적했다. 오와인은 프랑스에서 봉사하는 동안 [[베르트랑 뒤 게클랭]] 및 여러 프랑스 장성과 우호 관계를 가졌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지원을 받았다. 1369년 12월, 오와인은 웨일스에 가서 반란을 선동하는 임무를 가지고 아르플뢰르에서 출항했다. 그러나 겨울 폭풍에 휩쓸려 곧 프랑스로 돌아왔다. 곧 이 사실을 알게 된 잉글랜드 정부는 오와인의 토지를 반역죄로 몰수하고 웨일즈에 있는 협력자들을 체포했다. 1372년, 프랑스 왕실은 그를 내세워 웨일스인들을 선동해 잉글랜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할 계획을 세웠다. 오와인은 그해 5월 파리에서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자신이 귀네드 왕국의 명군 허웰린의 후손임을 강조했고, 잉글랜드 왕들이 조상들에게 부당한 행동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샤를 5세는 그의 주장을 지지하며 30만 프랑을 지원했다. 그 후 오와인은 아르플뢰르에서 잉글랜드를 향한 항해를 떠났다. 그는 [[건지 섬]]을 습격해 수비대를 격파했지만 코넷 성을 함락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샤를 5세로부터 원정을 중단하고 카스티야로 가서 [[라 로셸 해전]]을 수행한 카스티야 함대와 합세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에 따랐다. 1372년 말 수비즈에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을 격파하여 [[토머스 퍼시]]와 [[장 3세 드 그레일리]]를 사로잡는 데 기여했다. 1373년 웨일스를 향한 원정을 다시 계획했지만, [[곤트의 존의 슈보시]] 때문에 프랑스 왕국의 관심이 [[곤트의 존]]을 막는 데 집중되었기 때문에 실행되지 않았다. 1374년 미레바우와 생통주에서 잉글랜드군에 대적했으며, 1375년 앙게랑 7세 드 쿠시에게 고용되어 전임 오스트리아 공작의 조카였던 앙게랑이 스위스를 정복하는 걸 도왔다. 그러나 앙게랑 7세와 오와인은 베른 수비대에게 패배해 원정을 포기해야 했다. 1377년, 오와인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지원을 받아 웨일스를 향한 원정을 계획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푸아투에서 모르타뉴쉬르지롱드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오와인을 암살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요원 존 램을 파견했다. 존 램은 그의 신임을 얻고 시종이 된 뒤 1378년 7월에 오와인을 암살했다. 1378년 12월 4일자 잉글랜드 재무부 발행 목록에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종자 존 램이 프랑스에서 반역자이자 왕의 적인 오윈 드 게일스(Owynn de Gales)를 암살한 공으로 20파운드를 지급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었다. 오와인은 프랑스 코냑 인근의 생레제 교회에 안장되었다. [각주] [[분류:1330년 출생]][[분류:1378년 사망]][[분류:서리주 출신 인물]][[분류:암살된 인물]][[분류:백년전쟁/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