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89년/사건사고]][[분류:쿠바의 역사]][[분류:사법살인]][[분류:숙청]] [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아르날도 오초아 == [[파일:external/www.thecubanhistory.com/ochoa-1.jpg]] 아르날도 오초아(Arnaldo Ochoa)는 쿠바의 전직 장군이다. [[쿠바 혁명]]에 참전했으며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의 [[좌파]] [[게릴라]]를 지원했고 [[에티오피아 내전]], [[앙골라 내전]]에 파병된 [[쿠바군]]을 지휘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정치적 입지도 강력하게 확대하던 오초아는 1989년 6월 5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체포되었다. == 재판 == 오초아가 체포된 혐의는 마약 거래였다. [[쿠바]]는 [[미국]]에 의해 경제가 사실상 봉쇄되었기 때문에 산업에 필요한 부품들을 밀수를 통해 공급하는 경우가 잦았다. 쿠바 정부는 이를 위해 [[파나마]] 등지에서 소규모 회사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초아는 그 책임을 맡고 있었다. 오초아가 관리하던 회사들은 변질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내무성에서 엄격하게 통제하였지만 오초아는 점차 내무성의 통제를 넘어 임의적으로 예산을 운영하였고 이 과정에서 마약 거래업자들과 접촉하기까지 했다. 카스트로는 오초아의 동기가 애국적이었다고 인정하였지만 그렇다고 오초아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국제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사안이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마약]] 거래에 사용된 불법 계좌들이 발각된 데 이어 콜롬비아 카르텔과의 커넥션과 [[앙골라 내전]] 파병 당시의 불법 행위까지 드러나면서 공화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오초아는 몰락했다. 국가이사회 성원 31명은 오초아의 [[사형]]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오초아 등 공범자로 지목된 4명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졌고 내무상 호세 아브란테 등 공범들도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정계에서 퇴출되었다. 아브란테는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91년 1월 21일 옥사했다. == 논란 == 한편 오초아 사건으로 오초아를 비롯한 주범들에게 [[사형]]이 집행되면서 너무 가혹한 판결이 아니냐는 비판과 함께 이 사건을 [[피델 카스트로]] 정권의 대표적인 정적 [[숙청]] 사건으로 조명하는 시각도 나타났다. 물론 쿠바에서 정치범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지기는 했어도 사형까지 가는 경우는 없던 상황에서[* 물론 온건하고 평화적인 경우에나 그랬다는 것이지 '테러범'으로 지목되면 얄짤없이 사형이 선고되었다.] 오초아 사건이 정말 정적 숙청이 목적이었다면 그 의미와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후에도 오초아 사건은 쿠바의 정적 탄압과 사형제 폐지 논쟁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의 전직 경호원은 카스트로의 호화생활과 비리를 폭로하면서 오초아 사건이 카스트로의 비리를 오초아에게 뒤집어 씌워서 숙청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0&aid=0002787023|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