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의 남성 기업인]][[분류:니가타현 출신 인물]][[분류:1837년 출생]][[분류:1928년 사망]] ||<-2>[[파일:okura.jpg|width=100%]]|| || '''이름'''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다른 이름으로 쓰루히코(鶴彦)가 있다.] || ||<|2> '''출생''' ||1837년 ||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출력= )] [[일본]] [[에치고|에치고국]] 간바라군[br](現 [[니가타현]] [[시바타시]]) || || '''사망''' ||1928년 || || '''직업''' ||사업가 || [목차] = 개요 = [[메이지 시대|메이지]], [[다이쇼 시대]]에 활동한 [[재벌/일본|일본 재벌]]. 식민지 조선의 문화재를 대규모로 반출한 다음, 오쿠라슈고칸(大倉集古館)이라는 미술관을 세워 보관했다. = 생애 = 오쿠라 기하치로는 일찍이 [[도쿄]]에 상경해 장사를 시작했다. 특히 오쿠라야(大倉屋)라는 철포상을 운영하게 된 것이 시대와 잘 맞아떨어져 큰 돈을 벌었다.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보신 전쟁]]부터 시작하여 [[세이난 전쟁]]을 거쳐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발발해 무기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평소 신용을 잘 쌓아 두었던 오쿠라의 철포 장사가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철포 뿐만 아니라 군수물자 보급에도 관여했던 오쿠라는 관 주도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사업을 문어발처럼 확장해 나갔다. 오쿠라는 건설, 무역, 의류, 호텔, 철도, 운송, 화학, 보험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했다. 또 다른 재벌인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이 과정에서 친교를 쌓았다고 한다. 1927년에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1928년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1882년 4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박영효는 오쿠라의 자택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k&levelId=sk_011r_0010_0100_0090_0010&types=r|#]] 오쿠라는 1897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부산포에 오쿠라구미(大倉組) 지점을 설립하고 기업 활동을 개시했다. 1902년에는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5838|부산매축회사]]를 설립하고 부산항 일대를 매립해 부지를 조성했다. 이때 생겨난 동네가 오늘날의 [[부산광역시|부산]] [[중구(부산)|중구]] [[중앙동(부산)|중앙동]]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오쿠라초(大倉町)라고 불리며 부산의 중심가 역할을 했다.[[https://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51104000020|#]] 오쿠라는 여러 학교를 설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00년 도쿄에 오쿠라상업학교[* 오늘날 도쿄경제대학의 전신.]를 설립했다. 1907년에는 한성에 선린상업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이후 [[선린인터넷고등학교]]가 된다.[* 다만 학교 입장에서는 밝히기 껄끄러운지 드러내고 있지 않다.] 같은 해 일본 오사카에는 오사카오쿠라상업학교(大阪大倉商業学校)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다른 학교와 합병해 오늘날의 간사이오쿠라고등학교가 된다.[* 선린인터넷고등학교와는 자매결연을 맺었다.[[https://mindan.org/old/kr/front/newsDetailf722.html?category=2&newsid=14277|#]]] >선린상업학교(善鄰商業學校)를 개시하고 일본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씨가 금 이십만원을 기부하여 한국재단법인으로 삼고 경성에 선린상업학교를 설립한다 함은 본보에 이미 게재하였는데, 우리 정부에서 찬성하여 경성 명동(明洞)에 있는 전(前) 관립 농상공학교 교사와 교구를 모두 하부(下附)하고 기타 경상비도 보조하기로 작정하였고, 그 학교에서 금차에 일본 에히메현립 마츠야마상업학교(松山商業學校) 교장 혼주쿠 이에마사(本宿家全)씨를 교장으로 초빙하고 학칙의 제정과 기타 제반 준비가 완료된 4월 하순부터 개교할 예정으로 학생 모집에 착수하였는데.. >---- >善鄰商業學校, 『[[황성신문]]』, 1907. 4. 1.[[https://nl.go.kr/newspaper/detail.do?content_id=CNTS-00093801244&from=%EC%8B%A0%EB%AC%B8%20%EA%B2%80%EC%83%89|#]] 일본의 침투가 노골화되면서 조선에서의 사업도 나날이 불어났다. 조선에서 [[다이이치칸교은행|제일은행]] 지점, 제국제마, 조선비료, 두만강임업 등 여러 회사의 설립 또는 운영에 관여한 흔적이 있다. 철원에서는 철광을 운영했다. 군산에 대규모 농장을 소유했는데, 그 면적이 2,400만 평방미터에 이르렀다.[[http://www.grandculture.net/gunsan/toc/GC05700465|#]] 1915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남작위를 받았다. [[순종실록]]에도 이름이 보이는데, [[대한제국 훈장]] 중 팔괘장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일본국 사람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를 특별히 훈(勳) 1등에 서훈(敍勳)하고, 육군 중위 고바야시 토모〔小林智〕를 특별히 훈 4등에 서훈하고 각각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였다. >---- >순종실록 2권, 순종 1년 12월 23일[[https://sillok.history.go.kr/id/kzb_10112023_001|#]] = 수집한 문화재 = 오쿠라는 일본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https://www.shukokan.org/|오쿠라슈고칸(大倉集古館)]]을 지어 수집품을 보관했다. 이미 1902년에 자택 내에 전시 공간을 마련했었는데, 1917년에 재단법인의 형태로 오쿠라슈고칸을 설립했다. 오쿠라슈고칸은 1923년 [[관동 대지진]]의 피해를 입어 건물은 물론 보유한 문화재 다수가 소실되었다. 현재는 일본의 국보 3건, 중요문화재 13건과 중요미술품 44건 등 미술품 약 2500건을 수장하고 있다. 오쿠라슈고칸 옆에는 오쿠라 그룹 소유의 호텔 '오쿠라 도쿄'가 있다. * [[경복궁 자선당]]: 자선당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건물을 짓기 위해 철거되었다. 이후 오쿠라가 자선당의 부재를 인수하여 도쿄의 자택으로 옮겨 갔다. 조선총독의 허가를 얻으면 보물의 수출 또는 이출이 가능했기 때문에 총독부 사업에도 깊이 개입했던 오쿠라가 자선당을 가져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7년 오쿠라가 사립 미술관인 오쿠라슈고칸을 설립할 때, 자선당은 ‘조선관’의 이름을 달고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자선당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소실됐다. 하지만 기단을 비롯한 몇몇 유구가 그 터에 신축된 오쿠라 호텔에서 돌화분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결국 1996년 유구석 288개가 반환되었다.[[https://www.hankyung.com/article/1996010401861|#]] * 평양 율리사지 5층석탑: 자선당 정원에 두면 어울릴 문화재가 필요했던 오쿠라가 찾아낸 희생양. 1916년경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기단부터 탑신부가 팔각으로 되어 있다. * 이천 5층석탑: 오쿠라가 찾아낸 또다른 희생양이다. 신라의 영향을 받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원래 이천향교 앞에 있었는데, 조선물산공진회 때 전시할 목적으로 일제가 반출했다. 오쿠라는 원래 평양에 있던 흥복사지 7층석탑을 원했는데, 총독부에서는 이 탑이 정거장 앞에 있어 옮길 경우 세간의 이목을 끌 수 있다면서 이천 5층석탑을 대신 추천했다. 이천 5층석탑은 1918년 오쿠라의 손에 들어간 다음 일본으로 넘어갔다. * 건칠보살좌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건칠보살좌상(보물 2175호)와 매우 흡사해 일찍이 관심을 받아 온 문화재다. 2018년 [[https://www.museum.go.kr/site/main/archive/report/article_14855|조사보고]]에 따르면 두 보살상의 제작 기법이 동일, 본존불에 딸린 한 쌍의 협시보살로 함께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유출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 기타 = * 2014년 열린 한·중·일 문화장관회의에서 [[김종덕]] 문체부 장관이 일본 측에게 “오쿠라 컬렉션과 조선총독부 발굴 유물 등 우리나라에서 발굴해서 일본으로 가져간 우리 문화재 6만 7천여 점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알려져 장관이 [[오구라 컬렉션|오구라]]와 오쿠라를 잘못 알고 말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문체부는 실제 발언 내용은 ‘오구라 컬렉션’이었다며, [[https://www.mcst.go.kr/kor/s_notice/press/pressView.jsp?pSeq=13911&pMenuCD=0302000000&pCurrentPage=2&pAction=&pTypeDept=&pSearchType=01&pSearchWord=|보도자료]] 작성 실수였다고 해명했다.[[https://m.yna.co.kr/view/AKR2015022511510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