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일본의 승려]][[분류:일본의 백작]][[분류:일본의 고고학자]][[분류:중국학자]][[분류:1876년 출생]][[분류:1948년 사망]][[분류:교토부 출신 인물]][[분류:중앙아시아 탐험가]][[분류:정5위]] [[파일:오타니고즈이.jpg]] [목차] == 개요 == 大谷光瑞, 대곡광서. [[1876년]] [[12월 27일]], [[교토]] ~ [[1948년]] [[10월 5일]], [[오이타현]] [[벳푸시]] [[일본]]의 [[불교]] [[승려]]. 법명(法名)은 교뇨(鏡如)이다. == 가문 == 아버지 오타니 고손(大谷光尊, 대곡광존) [[백작]]은 [[교토시]]의 유서 깊은 [[절(불교)|사찰]]인 서본원사 [[니시혼간지]]의 주지승(대처승)[* [[한국 불교]]와 달리 [[일본 불교]]에는 대처승이 많고, 가문 대대로 [[승려]]가 돼서 [[절(불교)|절]]을 물려받아 운영하는 일도 많다고.]이었고, 아버지가 죽자 고즈이는 주지승 자리와 백작 작위를 물려받는다. 한편 오타니 가문은 [[일본 황실]]과도 혼인으로 얽혔다. 고즈이의 아내 오타니 카즈코(大谷籌子, 대곡주자)는 [[데이메이 황후]](사다코)의 셋째 언니이고, 고즈이의 여동생 [[쿠죠 다케코]]는 카즈코와 데이메이 황후의 남동생인 쿠죠 요시무네(九条良致, 대곡량치)의 아내이다([[겹사돈]]). 타케코는 문학적 재능과 미모를 겸비하여 ‘다이쇼 시대의 3대 미인’[* [[쿠죠 다케코]], [[야나기하라 뱌쿠렌]], 에기 킨킨(江木欣々, 강목흔) or 하야시 키무코(林きむ子)를 ‘다이쇼 시대의 3대미인’이라고들 한다.] 중 하나로 꼽혔으며, 손위올케 카즈코와 함께 니시혼간지 불교부인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불교]]계 여학교인 [[교토여자대학|교토고등여학교]][* 오늘날의 [[교토여자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하기도 했다. == 생애 == 고즈이는 [[도쿄]]로 상경하여 황족들과 [[화족]]([[귀족]])들의 전용학교인 [[가쿠슈인]]에도 다녔지만 그만두었고, [[영국]] [[런던]]에 [[유학]]했다. 그는 영국왕립지리협회 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으로 [[불교]]가 전래된 경로와 불교의 역사를 탐구하기 위해 [[중국]] 서부와 [[중앙아시아]]를 여러 차례 [[탐험]]했다. 1902년~1904년의 1차 탐험을 시작으로, 1914년까지 총 3차례나 탐험했다. 여기서 쓸어담은 [[문화재]]는 아래 오타니 컬렉션 문단 참조. 고즈이는 아래 문단의 내용대로 1914년부터 탐험에는 손을 떼고 수집한 문화유산을 팔아치웠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동남아시아]]의 [[농장]]을 구입해서 [[일본인]]들을 이주시키고 [[커피]]농장과 [[고무]]농장을 경영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지금도 유명 [[관광지]]인 [[일본]] [[오이타현]] [[벳푸시]]에서 [[온천]] 관광지 개발 사업을 하다가[* 그래서 [[벳푸시]]의 유명 관광코스이고 한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지옥 순례' 근처에 오타니공원이 지금도 있다.] 1948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오타니 컬렉션 == 오타니 고즈이가 탐험을 하던 당시는 서양인 탐험가들도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자신들로서는 낯선 땅이었던 [[타클라마칸 사막]]과 [[티베트]] 고산지대 주변의 [[실크로드]]로 우르르 몰려갔다. 이 탐험을 통하여 이방인 탐험가들은 학문적인 성과도 거두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귀중한 문화재들을 마구 파괴하고 약탈하기도 했다. [[신라]] 출신 [[승려]] [[혜초]]의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도, 이 무렵(1908년) [[프랑스인]] 동양학자 폴 펠리오의 눈에 띄어 [[프랑스]]로 옮겨졌다. 고즈이는 [[둔황]](敦煌, 돈황)[* 현 [[중국]] [[간쑤성]](甘肅省, 감숙성) [[주취안]](酒泉, 주천)에 속함] [[막고굴]]과 [[쿠처시|쿠처]][* 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불상]], [[불경]], 벽화, 토기, 고문서(古文書) 등등의 유물들을 어마어마하게 발견했고, 서양인 탐험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도굴|유물들을 빼돌렸다.]] 이렇게 약탈한 유물들은 거의 5,000여점이나 되었는데, 이것들을 일명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한다. 고즈이는 이 유물들을 [[효고현]]에 있는 자신의 [[별장]]인 [[https://ja.wikipedia.org/wiki/%E4%BA%8C%E6%A5%BD%E8%8D%98|니라쿠소]](二樂莊, 이락장)[* [[아라비아]]실(アラビヤ室), [[영국]]실(イギリス室), [[인도]]실(印度室), [[중국]]실(支那室, 지나실) 등 세계 각국의 [[인테리어]]를 모방한 방들이 유명했다. 1932년 소실.]에 보관해 두었으나, 유물들을 끝까지 차지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그가 주지승으로 있던 [[니시혼간지]]에 재정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탐험에 드는 모든 비용은 니시혼간지에서 댔다.[* [[교토부]]의 1년 예산에 맞먹는 돈이었다고 한다.] 결국 재정이 어려워졌고, 재정을 담당하던 [[승려]] 몇 명은 감옥까지 가게 되었다. 궁색해진 고즈이는 컬렉션의 3분의 1 정도를 [[광산]][[재벌]] 쿠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구원방지조)에게 판매하여 돈을 마련했지만, 결국 1914년에 주지승 자리에서 물러난 건 물론, [[백작]] 작위도 남동생 오타니 고묘(大谷光明, 대곡광명)의 장남인 오타니 고쇼(大谷光照, 대곡광조)에게 물려주고 은거해야만 했다. 쿠하라는 이 유물들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에게 갖다주었다. 쿠하라는 데라우치와 같은 [[조슈번]]([[야마구치현]]) 출신이었고, 고향 선배인 데라우치에게 이국의 귀중한 유물들을 바치는 대가로 [[평안남도]] [[진남포시]]에 설립한 [[제련소]]의 운영에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오타니 컬렉션은 총독부박물관에 전시되었고, [[광복|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관하여 현 [[일본]] [[문화청]]의 전신인 문화재보호위원회는 [[한일기본조약]]을 위한 회담 도중 [[일본 외무성]]에 문화재 관련 자문을 하며(기본적 골자는 한국의 문화재 환수 문제였지만) 오타니 컬렉션에 대한 언급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편 니라쿠소에 있던 유물들을 옮긴 이후, 니라쿠소에서는 화재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다행히도 천우신조로, 천운으로 유물들이 화를 입지 않은 셈. 현재 오타니 컬렉션은 [[한국]], [[중국]], [[일본]]에 고루 흩어져 있다.